우리는 관계의 부재와 싸우는가, 관계의 방식과 싸우는가
서울의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침묵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옆 사람과 어깨가 닿을 만큼 비좁은 공간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서로의 존재를 애써 외면한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지 말 것’, ‘불필요한 도움을 주거나 받지 말 것’. 도시에서 체득한 이 생존 수칙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패인 동시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벽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있었지만 이제는 잃어버린 모습. 바하마에서 온 Kalo(가명)는 바로 그 낯선 풍경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저희 문화에서는 가게에 들어갈 때 인사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식료품점이든, 인터넷 요금을 내러 간 전자제품 매장이든,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좋은 아침입니다” 혹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손님과 점원 사이의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다. 공간에 있는 모두를 향한,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보내는 존중의 표시다.
영화표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서 앞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늘따라 줄이 왜 이렇게 길까요?”, “어떤 영화 보러 오셨어요?” 처음 보는 사이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몇 분간 대화를 나누고, 각자의 차례가 되면 표를 사고 쿨하게 헤어진다. 다시는 못 볼 사이일지라도, 그 순간의 연결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 문화는 참 이상하죠. 그 순간에는 마치 친구처럼 대화하지만, 그러고는 각자 갈 길을 가요. 다시는 안 볼 수도 있죠. 하지만 서로를 살피는 방식이 바로 그런 거예요.”
영국 연방(Commonwealth)의 일원이자 섬나라인 바하마의 문화는 이러한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웃의 이름을 모두 알고 지내며 도움이 필요할 때 스스럼없이 문을 두드리는 강한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공존한다. Kalo는 이를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하이브리드’라고 표현했다.
바하마의 공동체 의식은 스쳐 가는 인연에 대한 따뜻함에서 그치지 않는다. 7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지리적 특성은 그들만의 독특하고 끈끈한 관계망을 만들어냈다. 수도인 나소(Nassau)가 있는 섬을 제외한 다른 섬들을 ‘패밀리 아일랜드(Family Islands)’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가족의 섬’이라는 이 정겨운 명칭처럼, 그곳의 공동체는 더욱 긴밀하다.
“패밀리 아일랜드의 젊은이들은 대학 교육을 받기 위해 수도가 있는 섬으로 와요. 그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인연을 맺죠.”
대학 시절, 낯선 환경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쌓은 유대는 졸업 후 각자의 섬으로 흩어져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10년쯤 지나서 휴가차 그 친구의 섬에 놀러 갈 수도 있어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이렇게 말하죠. ‘어, 10년 만이네! 잘 지냈어?’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요. 시간의 공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시간과 거리는 관계의 깊이를 희석시키지 못한다. 한번 맺어진 인연은 삶의 중요한 일부로 남아, 언제든 다시 이어질 수 있는 튼튼한 끈이 되어준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는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섬과 섬으로 연결된 공동체라는 깊은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사람 사이의 정이 넘치는 곳이라면, 외로움이나 소외감 같은 현대 사회의 마음의 병은 훨씬 덜하지 않을까? 마침 그가 정신 건강 치료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공동체 안에서도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나요? 스트레스가 훨씬 적을 것 같은데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문제의 종류가 조금 달라요. 제 고객들은 고립감이나 외로움 때문에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오히려 너무 가까워서 생기는 문제들이 많죠. 가족이나 친구, 이웃 간의 잘못된 소통 방식, 사소한 말에서 비롯된 오해 같은 것들요. 관계가 촘촘하게 얽혀있다 보니, 그 안에서의 갈등이 더 직접적인 스트레스가 되는 거예요.”
물론 국제 금융업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계의 부재가 아닌, 관계의 마찰 때문에 힘들어했다. 따뜻한 공동체라고 해서 오해나 소통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에게는 기쁨을 나눌 이웃과 어려움을 토로할 친구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홀로 끙끙 앓는 대신, 어떻게든 부대끼며 함께 풀어갈 관계의 기반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사회적 안전망이란 아무런 위험이 없는 무균 상태가 아니라, 넘어져도 기댈 곳이 있고 마음이 힘들 때 솔직하게 털어놓을 사람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연결의 부재’일까, 아니면 ‘연결의 방식’에 대한 고민일까.
1. 바하마 (Bahamas)
바하마는 카리브해 북쪽에 위치한 7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이며, 영국 연방의 일원으로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수도는 뉴프로비던스섬에 있는 나소이고, 공용어는 영어를 사용한다. 국가 경제는 관광업과 해외 금융업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아름다운 해변과 해양 환경 덕분에 세계적인 관광지로 유명하다. 아프리카계 후손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정커누(Junkanoo)' 축제는 바하마의 고유한 문화를 상징한다.
2. 영국 연방 (Commonwealth of Nations)
영국과 과거 대영제국의 일부였던 국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발적인 국제 협력체이다. 현재 56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르완다처럼 영국과 역사적 관계가 없는 국가도 포함된 점이 특징이다. 이 연합체는 법적 구속력 대신 민주주의, 인권 등 공동의 가치를 담은 커먼웰스 헌장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모든 회원국은 동등한 주권을 가지며, 영국 국왕은 정치적 실권 없이 상징적인 수장 역할을 맡는 수평적 조직이다. 커먼웰스 게임 같은 문화 교류와 정상회의를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특한 소프트 파워 외교 무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