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잃은 도시 | 안전하게 숨 쉴 권리를 찾아서

각자도생의 캘리포니아를 떠난 어느 미국인의 기록

by morasafon

2023년, '기회의 땅'이라 불리던 미국 캘리포니아를 뒤로하고 동유럽 한 국가로 떠날 준비를 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Peregrine(가명). 중국계 미국인 2세로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 그가 고향을 떠나려 했던 이유는 뜻밖에도 지극히 기본적이고 절박한 것이었다. 바로 '안전하게 숨 쉴 권리'.


950달러라는 기묘한 가이드라인


2023년, 캘리포니아를 떠돌던 기이한 숫자는 '950'이었다. 프로포지션 47(Proposition 47)이라 불리는 법안 아래, 950달러 이하의 절도는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다. Peregrine은 당시의 무력감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제는 커피 한 잔을 마시러 나갈 때도 호신용 총을 챙기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쇼핑몰에 가면 누군가 대낮에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광경을 10번 중 9번은 목격하죠. 하지만 경찰은 움직이지 않아요. 체포해 봤자 950달러 미만이라는 이유로 곧바로 풀려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법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범죄자들에게 "이 정도는 괜찮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면죄부로 전락해 있었다. 몇 년 전, 그의 차창이 박살 나고 소지품을 도난당했을 때도 범인은 잡혔으나 곧바로 훈방되었다. 피해자인 그가 수백 달러의 수리비를 부담하며 상실감을 삭여야 했던 불합리한 시대였다. 공권력이 신뢰를 잃은 자리에는 시민들의 각자도생과 깊은 냉소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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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의 손길 대신 주머니를 턴 사람들


Peregrine이 미국에 등을 돌리게 된 가장 아픈 기억은 그로부터 몇 년 전 겪은 사고였다. 조깅 중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길 위에 쓰러진 그에게 몇몇 행인이 다가왔다. 고통 속에서 그는 그들이 구급차를 불러줄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그들은 쓰러진 나를 돕는 척하며 운동화를 벗기고, 손목시계와 주머니 속 핸드폰을 빼앗아 유유히 사라졌어요. 나를 친 운전자는 부유한 배경 덕에 가벼운 처벌에 그쳤지만, 나를 더 절망하게 한 것은 고통받는 이웃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은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는 이 비극이 단순히 치안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붕괴'라고 했다. 정직한 노동보다 빠르고 쉬운 약탈을 선택하는 사람들, 옳고 그름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의 실종이 그의 떠날 결심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웃이 쓰러졌을 때 주머니를 터는 것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그는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무너진 식당가와 상실된 책임감


무질서의 파도는 소상공인들의 삶마저 덮쳤다. Peregrine은 동양계 미국인 친구들이 운영하던 식당이 폐업해야 했던 사연을 전하며 가슴 아파했다. 손님들이 음식을 배불리 먹고는 계산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이른바 '먹튀'가 매일같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었지요. 사람들은 이제 타인의 정당한 노동에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경찰에 신고해도 '950달러 미만'이라는 벽에 가로막히고, 주인들은 그저 무력하게 가게 문을 닫을 뿐이지요."


책임(Accountability)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도시에서 성실함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일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쉽고 빠른 돈만을 쫓는 풍조가 사회 전반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Peregrine이 목격했던 캘리포니아의 민낯이었다.



법은 바뀌었고, 그는 잘 살고 있을까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시민들의 분노는 2024년 말 '프로포지션 36'의 통과를 이끌어냈고, 현재 캘리포니아는 상습 절도범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며 무너진 법치를 다시 세우려 한다. 이제는 950달러 미만이라 하더라도 전과가 있다면 중범죄로 기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법이 바뀌었다고 해서 무너진 사회적 신뢰가 단숨에 회복될 수 있을까. 2023년의 Peregrine이 꿈꿨던 것은 단순히 '강력한 처벌'이 아니라, 길에서 쓰러졌을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동유럽으로 떠난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그곳은 적어도 외출할 때 총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곳, 타인의 불행을 약탈의 기회로 삼지 않는 안전한 곳이기를 바란다.



1. 캘리포니아 법안 47호 (Proposition 47)

2014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통과된 법안으로, 비폭력 범죄 및 마약 소지죄를 중범죄에서 경범죄로 하향 조정하여 교도소 과밀화를 해소하고자 도입되었다. 특히 950달러 이하의 절도죄를 경범죄로 취급하게 되면서, 실제 치안 현장에서는 경찰의 적극적인 수사와 체포가 이루어지지 않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법안은 캘리포니아 내 소매 절도 급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받으며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섰다.


2. 프로포지션 36 (Proposition 36, 2024)

2024년 11월 주민 투표를 통해 압도적으로 통과된 법안으로, 2025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과거 법안 47의 부작용을 보완하기 위해 절도 및 마약 범죄의 처벌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특히 2회 이상 절도 전과가 있는 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를 경우, 금액과 관계없이 중범죄(Felony)로 기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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