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먹방 철학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실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야 말로,
들여다볼수록 우리의 근원을 탐구할 수 있다.
옷이 없어도 살고, 집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은 먹지 못하면 죽는다.
그것은 자명하다.
인류가 발전시키고 계승시켜온 예술이라는 것이
실은 아주 원초적이고 단순한 일상의 행위에 기인한다.
과거 수렵시대의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며 동물의 피로 동굴에 벽화를 그렸다.
그들은 그것 자체로 영혼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이생에서의 사냥의 성공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 삶의 곳곳에 영혼과 주술이 깃들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언어가 태동하기 이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목소리로 음계의 차이를 만들고, 그것을 조합하여 일정한 반복을 만들고, 무엇인가를 두드리며 리듬을 만들었다.
음악. 그들은 그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소리의 합에 놀랐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목소리의 합은 그들에게 생명을 잉태하게 했다. 음악은 그 자체로 생명의 기원이자, 인류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바라고, 그것을 인간만의 방식으로 구현한다. 그것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또 어디로 향하는가”
현대인의 삶은 매우 복잡하고, 다난하며, 끝없는 정답과 오답을 만들고, 강요하고 다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고 있다. 다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어려서부터 교육받고, 보상을 주고(엄밀하게는 보상이라 착각하게끔 만든다), 그것을 명제처럼 주입시킨다. 누가? 우리가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란 그런 것이니까.
끙끙거리며 산 꼭대기에 바위를 올려놓아도 인생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숨을 잠시 고를지언정, 내게 남은 건 더 높은 산 꼭대기에 이 바위를 올려놓아야 된다는 의무뿐이다.
학창 시절에는 “좋은 대학을 가야 인생이 행복해, 그다음에 실컷 놀아”라며,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 넘게 수험생활을 한다.
대학이라는 인생 최초의 큰 문턱을 넘어 본 사람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인생은 실전이야 ㅈ만아” 그때 깨닫는다. 이게 시작이었구나, 나 제대로 속았구나. 인생은 몰래카메라구나.
달콤한 신입생 시절도 잠시뿐, 곧 너도나도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폐인처럼 인고의 시간을 견딘 고시 합격자, 전문직 자격 취득자들은 사회에서 남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서 첫 발을 내딛는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면 안다. 누구나 승자는 없다는 것을.
회사에 오면 기성세대, 오래된 악습, 비 효율적인 업무방식에 회의감을 느낀다. 그것은 당신이 유별나서도, 특별히 고루한 직장을 다녀서도, 옆에 있는 사람이 미친놈 여서도 아니다. 회사란 원래 그런 곳이다.
그 이후엔 결혼, 그 이후엔 육아, 그 이후엔 자녀들의 학업, 그 이후엔 자녀들의 결혼, 그 이후엔 노후대비.
인생은 끝나지 않는 쳇바퀴처럼, 당신을 의무 속에 가둔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둘 뿐이다.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던지,
내가 왜 쳇바퀴를 돌리는지 이유나 들어보고,
더 돌릴지 말지 스스로 결정하던지.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것은
사실 두 가지의 매우 다르지만, 매우 유사한 질문이다.
어디에서 왔냐는 것은, 내가 왜 쳇바퀴를 돌리는지 이유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끊임없이 내가 나에게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 나를 객관화시키고, 객체로서의 나를 통해 대상으로서의 인간을 고찰한다.
가령 나의 경우에는 블루스를 듣다가 참을 수 없는 흥이 솟구칠 때가 있다. 그러면 자문한다. 1) 블루스는 모두를 흥겹게 하는가? 2)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내 어떤 면에 기인하는가? 3) 환경적인 요인이 아니라면, 태생적인 본능에 가까운가? ->약간의 비약을 거쳐 4) 그렇다면 나의 외모와, 음악 성향에 비추어보아 나의 뿌리는 사실 아프리카에 있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나는 두 가지의 열린 결론에 도달한다. 1) 모든 인류의 기원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시작됐다는 학설이 참일 가능성이 높다. 2) 혹은 내 조상 먼 위에 아프리카 흑인이 있었다.
또한 지적 활동이라는 것도, 내면에 사고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상당히 제한적이고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음식의 맛이 상당 부분 재료의 신선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양질의 지적 활동도 넓고 깊은 배경지식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은
사실 되짚어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인데,
결국에 나는 내가 어떤 것에 의미를 두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엄밀하게는 내가 어떤 것에 큰 의미부여를 하고, 동기부여가 되는지 스스로 이해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엔 정답이 없고, 행복은 주관적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며, 내가 나 스스로 나의 행동과 일상에 의미를 부여할 때 오롯이 주관적인 자아를 가진 성인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 있다.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를 하고, 금전적인 부분에서 상대적인 행복을 찾는데 익숙하지만
사실은 인생의 의미와 행복은 절대 누군가가 결정해주지도, 물질이 대신해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네이버에서 맛집을 검색하고 가서 음식 사진을 찍고 “나 이것도 먹어봤다, 행복해”라며 인스타에 올리는 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내 기호와 습관을 통해, 내 지금까지의 30년을 반추하고 나아가서는 내 뿌리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이다.
음식을 때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행위”라고 스스로 가치부여를 하게 되면,
미식에 대해 탐구하고, 각 문화권의 음식의 특징과 전통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게 된다.
곧 그것은 역사에 대한 흥미로 이어지게 되고, 한 편으론 스스로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정말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요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반드시 한다.
각기 요리를 시작하게 된 과정은 다를지언정, 그들이 느끼는 것은 비슷하다고 나는 믿는다.
행복은 정말 가까이에 있는 게, 우리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지고 끝이 난다.
“예술은 우리의 일상에 있다. 행복은 우리가 탐구하는 가운데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