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가방을 제발좀 돌려주세요..
아일랜드,
오로라로 유명한 아이슬란드와 종종 혼돈되곤 하지만,
기네스로 유명한 나라.
영화 once의 배경이 된 그래프턴 스트릿, 버스커들의 천국.
JTBC의 프로그램 '비긴 어게인'에서 처음으로 버스킹을 시도한 장소.
낭만의 나라,
열정적인 사람들,
아름다운 더블린과, 더블린 강가.
그런 것을 기대한 여행이었다.
길을 걷다 마음에 들어오는 버스커가 있으면,
하염없이 구경하며, 잘 들었다며 인사하고
피곤하면 야외 카페에서 아이리쉬 커피를,
텐션이 좋으면 기네스를,
펍에서는 로이킨과 로버트슨을, 그리고 U2의 보노를 얘기하며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기대보다 못한 여행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미 3~40 국가를 여행하며 실망한 경험은 있었지만(특히 중국은 정말..)
아일랜드는 실패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 정말로, 실패할 이유가 없잖아..
그러나 그 기대는 입국하는 순간부터 무참히 짓밟혔다.
가방 행방불명 1일 차
이미그레이션을 통과 한 뒤, 컨베이어 벨트에서 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쪽 라인 옆에는 우리가 타고 온 항공사 "에어링구스"의 카운터가 있었는데,
옆에는 가방이 정말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아쉽게도 경황이 없어 사진은 찍지 못했으나, 정말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많이 쌓여있었다.)
불안했다.
부모님의 캐리어는 금방 나왔다.
그리고 10분, 20분..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다. 짐이 다 나온 것이었다.
그 순간 스무 명 넘는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두 멘붕에 빠졌다.
앞다투어 카운터에 줄을 섰다.
심지어 카운터 옆에는 짐을 잃어버릴 경우, 신고와 수령절차를 무인으로 접수하고 안내해주는 키오스크도 카운터 옆에 있었다.(이 새끼들 안 잃어버릴 생각은 안 하고, 하도 귀찮으니까 키오스크를 만들어놨다- 병맛 1)
30분을 기다려 내 차례가 왔고, 물어봤다.
내 짐 어딨냐 -> 모른다
언제쯤 찾을 수 있냐 -> 모른다니까
어떻게 하면 되냐 -> 양식을 작성하고 안내장을 줄 테니, 우리 항공사 홈페이지에 가서 실시간 상태를 확인해라.
아주 불쾌했다. 정말로 사무적인 태도였고,
특히나 내 앞에 서양인을 대할 때와, 나를 대할 때의 태도는 누가 봐도 달랐다.
우리나라 같으면 불편을 드려 죄송하단 이야기부터 나올 텐데
아니 ㅅㅂ 내가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그래? 이런 태도에 맥이 빠졌다.
종종 짐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게 내 일이 되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여권과 돈정도 빼놓고는 당연히 따로 휴대용 배낭에 빼놓은 것은 없었다.
허탈해져서 공항에서 나와서
공항에 있는 식당에서 피자를 시키고, 기네스를 시켰다.
아 짜증 나,,
속은 타는데 맥주는 왜 이렇게 심각하게 맛있는지..
웃음만 나왔다.
숙소를 시내에서 좀 멀리 잡았다.
엄마의 로망 중 하나가,
해외여행을 할 때 전원적인 오두막에서
커피 마시면서 밥해먹고 쉬고 싶다는 그런 강력한 주문이 있었기 때문에,
한 시간 반 가량 떨어진 곳에 집을 잡았다.
도착한 첫날은, 일찍이 들어가 짐을 풀고 그 동네 근교를 좀 돌아다닐 생각이었으나,
그 기대는 숙소에서부터 와장창 깨져버렸다.
실제로는 응달에 어두침침하고,
관리도 전혀 안되어있으며
에어비앤비는 숙박료 이외의 청소비로 큰 비용을 청구하는데,
청소가 전혀 안 돼있어서 정말 화가 났다.
돈 얘기를 하고 싶진 않은데
여기, 1박에 40만 원 냈다.
심지어 2층은 와이파이도 터지지도 않았다.
목가적인 시골집은 개뿔, 교통만 더럽게 불편하고
그냥 돈 벌라고 헛간으로 쓰던 곳 대충 개조해 놓은 곳이었다.
크게 실망하고, 대충 20분 정도 걸어 식당 몇 개 모여있는 동네에 가서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하루를 넘겼다.
새벽에 깨서는 다시 인터넷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다.
여전히 나와 내 동생 짐은 추적 중이었다.
그리고는 좀 밑으로 내려보니..
아뿔싸, 그 싹수없던 카운터 직원이 정말 무성의하게도
내 이름, 내 전화번호, 내 주소를
전부다 조금씩 틀리게 홈페이지이에 기입해 논 것이었다.
이를테면, 010-1234-5678을 101-2134-5678로..
화가 나서 24시간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내 ref no. 를 알려주고
내 짐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짐이 스코틀랜드에서 실어지지 않아서,
이제 다음 비행기 편에 도착할 예정이고 오늘 밤에 올 것이니,
배달해 주겠다고 한다.
왜 홈페이지에는 상태를 업데이트 해 놓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 잘 모르겠단다.
짜증 나서, 거기에 있는 주소랑 전화번호 같은 거 다 잘못되어 있다고 했더니,
수정해 주겠다고 부르란다. 다시 부르고 더블체크까지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몇 시간 뒤 일어나, 다시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아직도 내 짐의 상태는 still tracking.. 내 정보도 단 한 글자도 수정되지 않고 틀린 채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느낌이 왔다.
아 여기서 이거 그냥 기다리다간 짐 절대 못 찾겠다.
직접 발로 뛰어야겠다..
가방 행방불명 2일 차
두 번째날은, 더블린 시내로 나갔다.
공항을 가볼까 했으나, 크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내 짐 못 찾을 텐데 뭐,
여기저기 쏘다니며(이 글에서는 짐 얘기만 하기로 작정했다.)
틈틈이 실시간 lost luggage finding service를 확인했다.
여전히 내 짐은 행방불명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나는 내 짐이 오늘 밤 비행기로 스코틀랜드에서 넘어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허탈한 웃음만 났다.
한식당에서 저녁은 먹으며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빌려
다시 24시간 콜센터에 전화를 해서 내 짐의 상태를 물었다.
그랬더니, 오늘 저녁 9시 비행기로 짐이 넘어올 예정이고,
순서대로 배달해 주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런데, 나는 첫날 카운터 옆에 쓰레기처럼 쌓여있는 짐들을 봤고,
뻔히 내 짐도 그렇게 대충 널브러져 있다가 못 찾을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러지 말고, 내가 직접 내일 찾으러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심지어 배달해 줄 수도 없다. 왜냐면 주소를 본인들이 다 틀리게 입력했고, 수정해달라고 해도 안 하기 때문에
그 번호로 전화 걸면 없는 번호라고 뜰 것이기 때문..)
혹시 바뀔 게 있나 싶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계속 웹페이지를 확인했다.
가방은 여전히 행방불명, 내 정보 엉망으로 기입.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가방 행방불명 3일 차
셋째 날에는 더블린 시내로 숙소를 옮겼다.
진작에 옮기고 싶었으나, 하필이면 취소도 안됐다.
연박 이상부터 예약이 가능하다 그랬을 때 알아봤어야 되는데,
진짜 한 바탕 주인이랑 싸우고 싶었으나, 참고 그냥 나왔다.
부모님과 동생은 더블린 시내로 가고,
나는 혼자 공항으로 갔다. 반드시 짐을 찾아 나올 생각이었다.
출국장 2층에는 전화기가 짐을 잃어버린 사람 전용 전화기가 한대 있다.
그 수화기를 걸면 자동으로 그 문제의 카운터로 연결이 되어,
카운터에 일하는 직원이 나와서 짐 찾는 걸 도와준단다.
전화기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느낌이 싸했다.
이유인즉슨, 뉴욕에서 아일랜드를 경유하여 다른 목적지로 가는 항공편을 탄 사람들인데,
아일랜드행 비행기가 연착이 되는 바람에 환승을 못하고 다 놓쳐버린 것이었다.
그러니 일단 출국해서 나왔고, 그 사람들도 짐이 내가 타야 할 비행기에 실렸는지,
공항 어디에 짱 박혀 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전화기만 붙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전화가 한 시간 넘게 응답이 없었다.
아차 싶어서 1층 수속 카운터로 찾아갔다.
다짜고짜 나 짐 잃어버렸는데, 하니까
'ㅇㅇ 알고 2층에 전화기 있으니까 그거 써'
라고 말하길래
나 다 안다!! (이쯤부터 언성이 높아졌다) 근데 전화를 안 받는데 어쩌냐,
더 높은 사람 나오라 해라. 아니면 나 우리 대사관에 전화해서 문제 생겼다고 하겠다라며 열변을 토했다.
그러니 매니저쯤 되는 사람이 나와서는,
내가 사람 나오라고 할 테니 좀만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가서, 여전히 전화기만 붙잡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도의 한숨과 박수가 나왔고,
그리고도 20분 넘게 지나서야 첫날 만났던 뚱뚱하고 싹수없는 직원이 나와서
어디론가 우리를 데려갔다.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아하니,
직원용 별도 입국장을 거쳐, 소지품 검사를 하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첫날 내가 보았던 짐 무더기 속에서
자기 짐을 찾아가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 사실을 알기까지 그로부터도 또 한 시간이나 걸렸다.
이유인즉슨, 뉴욕에서 온 한 무더기의 사람들을 처리해주고
나도 있다는 것은 까맣게 잃어버린 채 그 여자가 또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또 전화는 30분 넘게 안 받아, 내가 입국장에 가서 또 따지고, 공항 시큐리티가 불안한 눈빛으로
날 제압해 말아, 하는 시선을 주고받아서야 그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폭발할 것 같았으나,
일단 짐을 찾는 게 먼저다 생각하여 꾹꾹 참고 드디어 직원용 보안검색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 검색대를 통과하면서도,
내가 영어를 전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지네들끼리 나를 두고 조롱하는 언어로 낄낄거렸는데
너무 기분이 나빠 서술하진 못하겠다.
그러고 나서 결국
짐 두 개를 들고 출국장으로 빠져나오기 전에 차분한 어투로 그 여자에게 물어봤다.
1. 왜 내 정보 잘못 기입했음?
답 : ㅇㅇ? 잘못됐음? 난 네가 써준 대로 기입했음
2. 나 그거 분명히 수정해달라고 고객센터에 요청했는데 아직도 안 바뀌어 있더라?
답 : 어쩔?
3. 왜 짐이 여기 와있는데, 나한테 아무 연락 안 했음?
답 : 아 니 짐 온 줄 몰랐어 나도
4. 나 어제 고객센터 전화해서 내가 짐 직접 공항으로 찾으러 갈테니 배달해주지 말라고 얘기 했는데,
내 짐이 온줄 몰랐다고? 전달 받은거 없어?
답 : 뭔 개소리?
5. 왜 한 시간 반 넘게 전화 안 받았음?
답 : 바빠서, 또 다른 비행기에서 짐 통째로 다른 나라에 두고 와서 그 손님들 처리해 주면 가끔 전화 못 받아~
(그러나 힐끗 본 카운터에는 노닥거리는 직원들밖에 없었다)
6. 손님들한테 미안하지 않음?
답 : 내가 그래야 돼? 나도 내 일 하는 건데, 왜 내가 그런 소리 들어야 되는지 잘 모르겠네? 짐 찾았으면 얼른 나가. 여기 원래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야.
공항을 나왔다.
금방 찾을 줄 알았던 짐은 3시간이 걸려서 정말 겨우겨우 내 손으로 다시 들어왔다.
꼬박 이틀이 걸려서야, 내 발로 뛰고, 몇 통의 전화를 건 끝에 손에 넣은 것이었다.
여행을 망쳤다.
허탈한 마음에 에어링구스 홈페이지를 다시 들어가
실시간 짐 정보조회를 눌렀다.
어깨에는 내 큰 배낭이,
왼손에는 동생 캐리어가 쥐어져 있었고,
오른손에 든 스마트폰 화면엔, 그 짐 두 개는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글이 늦어진 이유는, 수화물 지연보상을 청구하여, 보상금을 받는 대로, 그 경위까지 소상히 기술해볼 생각이었으나, 두 달이 넘게 분명 송금은 다 처리되었다고 하는데 돈을 못 받고 있는 중에 체념해서 써봅니다.
나 은행에서 일해서 해외송금 아무리 늦어도 삼일이면 전문 다 들어오는 거 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