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권태
오랜 기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여행이 지겹다 라는 감정을.
2012년 겨울,
가장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한 달 넘게 유럽을 여행했다.
유럽 일주까진 아닌데,
그래도 포르투갈-> 스페인-> 스위스-> 체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를 기차로 이동해가며 돌아다녔다.
물론 중간중간 재미난 해프닝이 많아 지루할 틈은 없었지만,
2주쯤 지나니 여행은 우리 일상이 되었다.
대충 숙소에서 아침 먹고 나가서 구경하고, 점심은 가까운 패스트푸드로 때우고, 유적지 보고 성당 보고
유명하다는데서 사진 찍고, 저녁은 맛집 찾아다니며 먹고, 바에 가고.
2주쯤 지났을 때 끊임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여행을 하고 있지?'
그 순간 여행의 권태는 시작된다.
지금이야 그런 선택을 하긴 쉽지 않지만,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나는 머리가 아픈 일이 있으면
가끔 혼자 떠나곤 했다.
일종의 도피 심리에서 기인했는데,
나가기 싫은 알바, 하기 싫은 수업, 치기 싫은 시험 등등..
무언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피해기 위해 도망치곤 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도망간 곳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한 것도 아니다.
강변에 가서 버스표를 끊고,
어디론가 무작정 떠난다.
도착해서는 피시방부터 가서,
그 동네 숙소를 찾아보고, 맛집을 검색하고, 게임을 한다.
그리고는 여행이라고 하기도 조악할 정도로,
아주 잠깐 돌아다니다가는 숙소에서(대게는 게스트하우스가 많았지만)
사람들이랑 노닥거리거나, 혼자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것이었다.
2013년 겨울(2014년 인 것 같기도 하다).
혼자 찾은 망상 해수욕장은 텅 빈 해변이 을씨년스러웠다.
울릉도는 나를 또 받아주지 않았다.
날씨 때문에 배가 안 떠서 못 들어간 게 세 번째였다.
대부분의 가게도 닫아서, 아침식사나 할 요량으로
[아침식사됩니다. 북엇국]이라고 써인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어떤 남자를 만났다.
그 형도 나처럼 여행을 좋아했는데, 일 년 가까이 세계여행을 해본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딱히 할 것도, 갈 곳도 없던 나는 그 형과 근처 카페에서 몇 시간 동안 잡담을 나누었는데,
기억나는 이야기는 '여행에서의 권태로움'이었다.
".... 어느 순간 어딜 가더라도 별로 기대가 되질 않는 거야. 떠날 때야 호기롭고 좋지,
주위에서는 부럽다는 사람도 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관심의 대상이 되잖아.
은근히 그걸 즐겨서 가기 전에 송별회 한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허세 부린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막상 한 달쯤 지나면, 여행이라는 게 별다를 게 없다 말이야.
어쩌자고 이 불편한데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나가면 덥지, 더럽지, 호객꾼들에 지치지, 관광지는 매번 별다를 것도 없지, 외롭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게스트하우스에서 잘 안나가게 되더라고,
길게 배낭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데,
대부분 그렇게 게스트하우스에서 쓸데없는 소리나 하면서 낮엔 놀고, 숙소 일 도와주면서 푼돈이나 벌고,
밤에는 맥주 사다가 술 마시고 놀고 그렇게 시간 보내는 거야..
일 년째 됐을 때, 더 이상 의미가 없겠다 싶어서 한국행 티켓을 끊고 돌아왔지. 케이프타운에서..
떠나기 전엔 막상 엄청난 걸 기대했는데, 돌아올 때가 되니 달라진 건 하나도 없더라고.. 오히려 남들에 비해
일 년을 뒤쳐진 게 아닌가 하는 불편한 기분만 남아있고..
어쨌든, 그게 제일 힘들었어. 여행에서의 권태로움을 극복하는 거."
배낭을 메고 세계여행을 하며 가장 힘든 게 뭐였냐는 질문에,
의외로 그 형은 이런 대답을 했다.
이 대화가 나는 아주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서,
여전히 훌쩍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수 있겠냐는 나 스스로의 질문에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부모님과의 유럽은 처음이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은(이라 쓰고 엄마는)
우리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은 추억과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동유럽을 시작으로, 북유럽을 거쳐 에스토니아-> 러시아까지
유럽이라면 이제 신물이 날 정도로 가족들과 다녔다.
어쩌다 보니 다시 유럽에 오게 됐는데,
하이랜드를 떠날 때가 되니
문자 그대로 '지겨워졌다'
하이랜드를 떠나서 에든버러로 또 하루 종일 버스를 탔다.
중간중간 괴물 네시가 나 혼다는 네스호도 둘러보고, 그 근처의 마을에서 점심도 먹었다.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고성중 하나인 도난 성에도 구경했다.
다음날은 일찍 일어나서 나와
에든버러 성을 둘러보고, 위스키 박물관 투어를 했다.(투어는 정말 훌륭했다)
점심에는 스코틀랜드 전통음식인 해기스를 먹고(가게를 잘못 들어가 take-out점을 들어가 버렸다)
국립 미술관, 길거리 상점들, 프린지 페스티벌 등등.. 을 돌아다니다가
해가 지기 전 숙소로 들어왔다.
2박 3일 동안 머물던 숙소는
스코틀랜드 현지 언론에도 몇 번 소개된 고풍스러운 집으로,
에어비앤비 플러스(에어비앤비에서 특별히 검증하고 보증하는 하이퀄리티의 숙소)였고,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거실에는 4인용 식탁 옆으로 큰 창이 나있었고,
창 밖으로는 작은 공원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풍경이 있었다.
나름 멋지게 한 상 가득 차려내어,
주인이 선물해준 와인과 함께 저녁을 먹고는
밤이 가는 줄 모르고 가족들과 떠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떠올렸다.
지난날 권태로움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그것은 대화였다.
진솔한 대화.
비단 여행지일 필요는 없지만,
여행을 왔기 때문에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
핸드폰 시계는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어버렸고,
스코틀랜드 일정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