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J씨 직장을 얻다.
"지균씨는 연구자 보단 대변인 같은 직업이 더 어울리겠어요"
두 달을 기다린 대학원 최종 결과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은 지균씨는, 불현듯 면접관의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학원이 내 길이 아니었나..'
사실 딱히 지균씨는 대학원 진학에 청운의 꿈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부터 지균씨를 괴롭혔던 것은 끈기 부족.
달리기를 해도 단거리 달리기는 잘했던 반면, 오래 달리기는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곤 했다.
지균씨의 부모님은 고시를 해 지균씨가 출세하길 바라곤 했다. 오죽하면 지균씨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한국대 법대에 진학하여 판사가 된다는 말을 해줄 때까지 점집을 옮겨 다니곤 했다.
제대 후 행정고시를 할까 고민했던 지균씨는, 고민만 오래한 채 공무원의 삶은 재미없다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려버리곤 곧 중도포기, 다른 시험도 준비하다가 중도포기.
그럴 때마다 지균씨를 달래준 건 롤뿐이었다. 피시방에서 밤을 새 부은 얼굴을 볼 때마다 지균씨는 엉뚱하게 밤새 게임을 한 행동이 아니고, 현실은 시궁창인데 꿈은 높다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탓하곤 했다.
그렇게 살던 지균씨가 대학원을 생각했던 것은, 이미 대학원에 진학한 동생이 권유해서였다.
지균씨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연구자의 삶에 매료되었다기 보단 인생의 책임을 조금 더 뒤로 미루고 죄책감 없이 학생의 신분으로 더 지낼 수 있단 생각에서였다.
운 좋게 서류를 통과한 지균씨는 대학원 면접에서 예상치 못한 전공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을 얼버무리며, 파이팅 있는 투지로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사실 그가 지원을 한 학과는 평소에 관심이 있었다기 보단, 입학설명회에서 가장 끌렸을 뿐이다. 그러니 교수들 눈에는 당연히 임기응변에 능한 인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원 최종면접에서 낙방한지도 두어 달. 어김없이 친구들과 새벽에 피시방에서 나와 어묵 한 개와 김밥 한 줄로 허기를 면한 지균씨는, 담배 한 대를 피우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좀 더 지내다간 진짜 아무 일도 못하겠다'
다행히 단기 집중력은 좋았던 지균씨는, 그럭저럭 시험 때마다 밤을 새 가며 어느 정도 학점은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취업을 해야 했다.
'뭐부터 준비해야 되나..'
다른 친구들이 공모전이니, 대회활동이니, 자격증이니 하며 하나하나씩 준비를 해나가도 지균씨는 그럴 때마다 저런 거 다 필요 없다며 밴드에서 드럼 치고, 여행을 다니고, 게임을 하며 어느덧 졸업반이 되었다.
그나마 글 쓰는 재주는 조금 있었던 그는 그래도 어디 하난 걸리겠지란 심정으로 일필휘지로 열두 군대의 대기업에 자소서를 제출하였으나, 보기 좋게 모두 낙방하고 만다.
집에서는 식충이, 그렇게 좋아하던 게임도 눈치 보여서 모바일 게임으로 전향한 지 오래. 부모님의 불호령이 두려워 자는 척 이불을 뒤집어쓰고 게임을 하다가도 북받쳐 오르는 설움에 애꿎은 베개만 쾅쾅 두들길 따름이었다.
그래도 배우는 것이 있었을까, 현실의 냉엄함을 깨우친 지균씨는 먼저 취업한 선배들, 친구들 직장 앞에 가서 저녁 먹으며 코칭을 받기 시작했다. 자기소개서를 잘 쓰는 친구의 합격 자소서를 답지 삼아 논리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신촌으로 영어학원도 등록하여 하나하나 필요한 자격을 갖춰나갔다.
채 방안의 한기가 가시지 않아, 아침에 눈을 뜨기가 아직 어려웠던 이른 봄날, 드디어 지균씨의 두 번째 취업시즌이 시작되었다.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 삼아 지균 씨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소서를 작성하고 고치기를 여러 번, 25개의 기업에 원서를 접수하여 20여 개의 기업에서 서류합격 통보를 받는다.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고,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몇 개월이 흐른 뒤 지균씨는 3개의 기업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하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T사, 또 한 곳은 여의도의 대형 증권사 K사, 마지막 한 곳은 은행 준비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았던 U은행.
지균씨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연봉과, 근무 안정성, 복지, 잡 플래닛에서 현직자들의 직장 만족도들을 냉정하게 비교하길 며칠. 엉뚱하게도 지균씨는 지원자들에게 가장 친절했단 이유 하나만으로, 그래 회사 사람들도 다들 착하겠지라며 U은행을 선택했다.
인생의 큰 결정이란 때로는 대게 그런 사소한 이유로 내려지곤 했다.
U은행은 합격자의 부모님에게 한 명 한 명 모두 전화를 하며, 훌륭한 인재를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며 눈물샘을 자극했다. 합격 전화를 받던 그날, 지균씨도 지균씨의 어머니도 눈물을 훔쳤다.
"그래 이제 진짜 인생 2막 시작이다"
연수원행 버스에 올라탄 지균씨가 주위를 둘러보니, 동기생들 모두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 것인가. 그들은 그때 그런 것들에 대해 걱정하기엔 너무나 마음이 부풀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