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으로 미국에서 살아남는 법
일 년 내내 화창한 날씨를 떠올리게 하는 샌프란시스코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지내는 기간 내내 비 소식이 있었다. 아내는 Davis에서 했던 캠퍼스 투어가 재밌었던 모양이다. 샌프란시스코 근처에도 Stanford와 Cal(UC Berkeley)가 있어, 이 두 곳 모두 투어를 하기로 일정을 짰다.
우리가 묵고 있는 동생 여자친구의 집은 Berlingame역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여서, Cal Train이라는 기차를 타고 인근으로 이동하기 용이했다. 아기자기한 벌링게임 시내를 잠깐 둘러보고, 간단한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곧장 스탠포드로 향했다.
팔로알토라는 역에서 내려서 Stanford Visitor’s Center까지 20분여를 걸었다. 일단 부지가 넓으니 학교 입구까지 걸어가는 길은 온통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여기가 길이 맞나 싶었지만, 구글맵을 믿고 발걸음을 이어갔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아시아인들이 정말 많았다. 비중은 한국인가족과 중국인가족이 반반씩 되어 보였다. 대부분 부모들이 어린 자녀를 데리고 학교구경에 나선 것 같았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특히 중국이랑 한국이 학구열이 엄청나다고 하더니 여기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앞선 글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동생의 여자친구는 캘리포니아의 변호사다. 그녀는 내가 미국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볼 때마다, 미국의 법과 연결시켜 이해를 도와주었다. 미국 헌법에서는 다민족사회에 걸맞게 ‘차별’에 대한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다고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기준이 ’인종‘에 대한 차별이다. 그다음이 성별, 성 정체성 등이 순서대로 중요도를 갖는 식이다.
실제로 미국사회의 기득권은 백인들이 가지고 있다. 모든 중요한 자리는 백인들이 다수이고, 그들이 많은 기회와 권한을 가지고 태어나고, 유지하기 때문에 다른 인종에 대해 쿼터제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학계에서도 흑인에 여성이면 논문실적이 거의 없어도 쉽게 교수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백인 다음으로 아시아인들이 미국 사회에 힘 있고 부유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인은 ‘인종쿼터’에서 제외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보편적으론 동양인 특히, 동양인 남자는 가장 만만한 대상으로 인식된다고 했다. 그래서 동양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실력도 키우고, 성격도 활발해야 하고, 몸도 좋아야 미국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때, 도피성 미국유학이 성행했던 시기가 있다. 부모가 재정적인 여건은 되나, 자식이 한국에서 대입경쟁에서 생존하기 어려울 때 미국을 보내곤 했다. 20대에는 그게 부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대학을 보내고 나면, 해외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로 둔갑하여 취업할 때 매우 유리한 포지션을 잡을 수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니, 물론 한국에 남아있는 것 보다야 유리했겠지만, 미국으로 간다고 꼭 정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내 주위에는 중, 고등학교 때 미국을 나갔다가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지인들이 제법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살까? 굳이 내가 글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성실히 살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미국유학길에 오른다고 사람이 바뀔 리 만무하다. 미국은 한국보다도 훨씬 더 실력 위주의 냉정한 사회라서, 애매한 학벌에 애매한 언어능력 거기에 동양인 남자라면 괜찮은 직업을 가질 기회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한국에 들어오면 이제는 10대와 20대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가치관이 한국사회와 맞지 않아 적응하기 힘들다. 어느 쪽에도 소속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이다.
반면 성공한 유학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 첫째로 당연히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리도 좋아야 하고, 공부도 당연히 잘해야 하며, 미국은 운동 잘하는 것 까지도 중요한 능력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그리고 태도가 뒤따라야 되는 것 같다. 본인의 삶에 대한 태도. 반드시 시련을 겪게 되는 유학 생활에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끈기. 무엇을 위한 타지생활인지 스스로 명확하게 인지하고,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달려갈 수 있는 근성. 열린 마음으로 다인종 사회에 스며들어 건강한 관계들을 맺을 수 있는 사교성, 친절함, 배려심 등.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결국 환경보다도 ’될만한 사람은 된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부슬비가 스탠포드 교내에 내리고 있었으나 아무도 우산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교내 이리에서 저리로 자전거나 전동킥보드를 타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인도인으로 추정되는 학생들이 정말 많이 보였다. 실제로 실리콘밸리 테크기업에서 인도인의 비중이 제법 높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아내는 스탠포드에서 예쁜 옷이 있으면 여러 개를 사겠다며 호기롭게 가게 문을 열었으나, 시뻘건 스탠포드 스타일의 옷들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래도 어찌어찌 예쁜 니트를 건져서 다시 벌링게임으로 돌아왔다.
그날따라 맥주가 먹고 싶어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역 근처 맥주 파는 상점이나 작은 마켓등을 찾아보았으나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비를 뚫고 걸어서 10분 거리에 Safeway에 가서 맥주 6캔을 집어 들었다.
맥주를 가방에 욱여넣고는 스타벅스에 가서 아내가 마실 맛차라떼를 한 잔 샀다. 그리고는 맞은편 포케집에서 포케를 하나 포장하고, 돌아오는 길에 드디어 타코트럭에서 타코와 퀘사디아를 사서 집에 돌아왔다. 고민 끝에 맥주를 포기하지 못하고, 비 맞으며 무거운 맥주를 둘러메고 걸었건만, 포케집에서도 맥주를 팔았고, 구글에 나오지 않는 작은 슈퍼마켓에서도 맥주를 팔았다. 그리고 냉장고에도 맥주가 충분히 있었다. 심지어 아까 나오기 전에 보고 나와놓고는 까먹었던 것이다.
멕시칸이 말아주는 퀘사디아는 제법 맛있었으나, 값싼 도우의 맛이 꽤나 거슬렸다. 그래도 한 번 먹어본 것으로 만족했다. 더 군다가 새크라멘토에서 인생 멕시칸을 먹어 봤으니 이제 더 이상 ‘진짜 멕시칸 푸드’에 대한 갈증은 충분히 해소 한 셈이었다.
동생과 동생 여자친구는 Davis의 동생집 짐 정리를 마치고 방을 비우고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귀가했다. 시침과 분침은 12라는 숫자를 향해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동생 여자친구는 꽤나 피곤했을 텐데 ‘내일이 주말이라 괜찮다‘며 이야기 꽃을 함께 피웠다. Bay(샌프란, 산호세 등을 포괄하는 통칭)에서의 첫날이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