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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두려운가?

내 안을 잠식하고 있는 두려움, 극복할 수 있는가?

by 모블랙
두려움은 생각보다 몸집이 작다.


부평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온 난 (참고 : https://brunch.co.kr/@more-black/79 ), 곧 첫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인천은 이전부터 여러 곳에서 온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동네에서 출발해, 자연스럽게 규모가 커지며 도시가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걸어서 10분 거리의 학교에 입학했다. 등하교를 위해선 큰 사거리를 건너야 했다. 다리를 꼬고 귀가하던 어느 날, 사거리의 보행 신호를 기다리다 못 참고 바지에 오줌을 쌌다. 복잡한 도시에서의 10분 거리는, 7살 난 아이에겐 혼자 다니기엔 조금 먼 거리였다.


동네에 새로운 아파트가 계속 생겼다. 인구가 급격하게 팽창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걸어서 5분 거리인, 아파트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생겼다. 나는 3학년 때 첫 번째 전학을 했다.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라고 공식 명칭이 바뀐 것도 그때였다. 졸업을 앞둔 6학년 때는 초등학교가 가까운 데에 하나 더 생겼다. 엄마가 베란다에서 내가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위치였다. 나는 한 번 더 전학했다. 돌아가기 귀찮던 나는, 담을 족제비처럼 넘어가며 학교를 등하교했다.


이 이야기를 도대체 왜 하냐고? 우리 동네가 발전했고, 그에 따라 비슷한 중산층들이 모여 살았단 이야기다. 그래서 초등학교 친구들의 배경이 별로 차이가 안 났다. 남자는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집에서 자식을 헌신적으로 키웠다. 그게 정답이던 시대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의 충분한 보호를 받으면서 자랐다.


그런데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꽤 먼 동네에서까지 우리 학교를 오기 시작했다. 중학교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것도 귀찮았던 나는 부모님에게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다. 자전거를 타고 차도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페달을 열심히 밟다 보면 5분 만에 학교에 도착하기도 했다.


입학식 때부터 불량한 친구들이 보였다. 당시에 우리는 싸움을 제일 잘하는 친구를 '짱'이라고 불렀다. 우리 중학교에도 각 초등학교에서 온 '짱'과 그 무리들이 입학했다. 13살의 남자아이들은 그야말로 초장부터 피가 터지게 싸웠다. 서열이 그 안에서 매겨졌다. '짱' 중에 '짱'이 생겼다. 우리는 이런 친구들을 '통'이라고 했다. '통' 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아파트 통장이 생각나는 웃긴 별명이지만, 그 나이 때 남자아이들에게는 '대기업 회장'만큼 대단한 힘을 가진 지위라고 받아들여졌다.


규율이 생겼다. '통'이 '대통령'이 되어 위계를 잡았다. 상납의 영역에서 체계적인 회사 시스템이 도입됐다. 각 반마다 일진들이 분포했다. 일진들은 대게 '통'에게 서열을 정리당한 각 초등학교에 '짱'과 그 무리였다. 일진들은 아이들을 돌아가며 삥을 뜯고 괴롭혔다. 그리고 갈취한 돈의 일부를 '통'에게 갖다 바쳤다.




엄마는 늘 맛있는 도시락을 싸주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반의 다른 친구들이, 오늘 나의 도시락 반찬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것이 아침인사가 될 정도였다. 엄마의 정성스러운 음식을 나눠 먹는 시간은, 소년들의 소중한 우정이 되었다.


우리 반에도 일진이 한 명 있었다. 편의상 'A'라고 부르겠다. A는 점심시간에 아무것도 싸 오지 않고는, 수라상을 받아먹듯 돌아가며 친구들의 밥과 반찬을 상납받았다. 나는 그 장면이 매우 거북했다.


어느 날 나에게도 A가 다가와서, 나에게 묻지도 않고 계란말이를 하나 툭 집어 갔다. 나는 그 모습에 "너 왜 내 계란말이 마음대로 가져가!"라며 소리쳤다. 그는 나를 보며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한입 베어 문 계란말이를 그대로 내 얼굴에 던졌다. 그리고 내 따귀를 때렸다. "X발럼이 뭐라고 했어? 뒤질래?"


폭언과 폭행을 당하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놀다가 싸운 적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방적인 '언어와 물리적인 힘이 결합된 폭행'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는 그의 기세에 눌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도시락에 고개를 다시 쳐 박았다.


그 뒤로 A의 폭력이 시작됐다. 괴롭힘은 조롱에 가까웠다. 어느 날은 새로 산 가방을 학교에 메고 갔다. 체육시간에 운동장을 다녀오니, 내 가방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하고 흰 것이 묻어있었다. A는 “모블랙!”하고 나를 부르더니 자위를 하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맞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그의 조롱은 차마 글로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상상 초월이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악'에 가까웠다. 그는 점점 내 안에서 커져갔다.


괴로운 기억은 뇌가 어떻게든 지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괴롭힘의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떠올리지 못한다. 적어도 하루, 일주일 이런 단위보다는 훨씬 긴 기간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에 잠식당했다. 잘 때도 그에게 얻어맞는 꿈을 꾸었다.


그 당시 연예계에선 유재석 씨가 '메뚜기'란 별명으로 막 국민 MC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TV 속 유재석 씨는 '연약한' 이미지로서 소비되고 있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힘이 약한 어른'. 그것이 당시 나에겐 유재석이었다.


나는 자기 전 매일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누구든 좋았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제발 저에게 힘을 나눠주시옵소서. 저 '유재석' 아저씨의 연약한 힘이라도 빌려주시옵소서. '어른'의 힘이 내 안에 깃들어 내가 그에게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처음에는 '중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게 힘들어서 표정이 어두운가?'라고 걱정하던 어머니가, 하루는 나를 앉혀놓고 '블랙야 요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어? 친구들이 못살게 해?'라고 물어봤다.


나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라는 말이 입에 안 떨어져서 꽤나 긴 호흡을 우물쭈물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건 어머니가 상상하던 얘기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날 밤, 아버지가 만사를 제쳐놓고 집에 일찍 귀가했다. 어머니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은 아버지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네 힘을 얕보지 마라! 너는 어려서부터 합기도도 배워서 충분히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기세에서 눌리면 코부터 주먹으로 힘차게 때려라! 그리고 상대가 급작스러운 공격에 코를 부여잡으면, 그때 엎어치기로 넘어뜨려라. 그리고는 위에 올라타고 쉴 새 없이 가격해라! 네 뒤엔 아빠가 있다! 아무리 네가 그 친구를 심하게 때려눕혀도 얼마든지 책임지고 합의금 물어줄 수 있다! 도망치지 마라! 고개를 당당히 들고 맞서 싸워라!"




얼마 뒤, A는 어머니에 대한 성적 모욕을 했다. 우리 엄마가 미인이라고 친구들 사이에 소문이 돌자, 그가 그 소문을 듣고 내 엄마를 농락한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도망치지 마라! 맞서 싸워라!"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나는 구겨 신고 있던 실내화를 똑바로 고쳐 신었다. 그리고 의자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삐-'


의식이 끊어졌다. '블랙아웃'. 나는 그렇게 기억이 통째로 휘발되는 일을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었다. 순간적으로 몸의 모든 세포의 에너지가 내면 깊숙이서 끓어올랐다. 억눌린 분노와, 공포감, 자책감이 뒤섞여 화산처럼 폭발했다.


"헉.. 헉.."


끊어졌던 의식이 돌아왔다. 내 눈앞은 기절했다 깨어난 것처럼 천천히 밝아졌다. 가쁜 숨을 내쉬며 나는 시야를 더 확보하기 위해 눈을 세차게 비볐다. A는 내 아래 깔려 있었다. 나는 그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내 두 손에는 그의 피인지, 내 피인지 모를 시뻘건 핏덩이들이 잔뜩 묻어있었다.


"어서 떨어지지 못해? 다들 교실로 들어가! 당장!"

복도 끝에서 허둥지둥 달려온 선생님 한 분이 상황을 정리했다. 아이들로 둘러싸인 복도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일진이 일방적으로 피떡이 될 때까지 두들겨 맞는 일은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너희 둘 교무실로 따라와! 어서!"

아이들을 물린 선생님은 우리 둘을 끌고 갔다. 나는 일어서며 어깨를 폈다. 고개를 당당히 들고 정면을 바라보며 걸었다. 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당시에는 그 눈물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깨닫지 못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어"

누구랄 것도 없이 A와 나는 서로를 지목했다. 평소 같으면 A의 욕설이 나에게 바로 날아들었을 텐데, A는 별안간 위축된 목소리로 "블랙이가 갑자기 먼저 저한테 달려와서 날아차기를 했어요.. 저는 그냥 장난친 건데.."라고 변명을 했다.


"너 진짜야?"

선생님은 화난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봤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대답 안 해?"

난 고개를 젓지도,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선생님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결국 그가 눈을 먼저 피했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는 거지"

그는 자리에 가서 펜과 A4용지 몇 장을 가져왔다.

"너희 둘 다 어떻게 될 일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여기에 써. 제대로 쓸 때까지 오늘 집에 못 갈 줄 알아"


A는 글을 쓰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끙끙거린 끝에 그가 내놓은 문장은 '장난으로 놀렸는데, 블랙이 나를 두들겨 팼다.' 단 한 줄이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종이를 더 달라고 했다. 선생님이 계속 종이를 한 장씩 주자 쓸 공간이 모자랐다. 그냥 통째로 A4용지 한 박스를 달라고 했다. 선생님은 황당해했다. 나는 당시에 아주 작은 괴롭힘까지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 생생해서 잠자리에 들려고 누우면 상처를 다시 날카로운 것으로 후비는 것같이 아팠기 때문이다.


10장이 넘는 '싸움 경위서'를 제출하자 나의 회상이 끝났다. 내 경위서와 A의 경위서를 차례로 번갈아 본 선생님은 옆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선생님은 나와 A에게 다시 반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내가 반에 돌아오자 환호성이 들렸다. 나는 ‘손이라도 들어서 화답해야 하나’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담임 선생님이 “모블랙이랑 A는 지금 집에 돌아가라”라고 해서 가방을 싸 들고 집으로 향했다.


자전거 페달이 그날따라 가벼웠다, 지금 이대로 달나라를 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A의 처분을 두고 학교에서는 엄마에게 전화했다. 담임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전화였다. 엄마는 "네. 아니요. 네. 괜찮습니다. 선처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네. 앞으로 잘 신경 써주세요. " 따위의 대답만을 한 채 통화를 종료했다.


학교에선 A의 괴롭힘의 정도가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지금 같으면 사회적 물의가 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는 엄마에게 A의 처분을 두고 처음에는 "A를 전학 보내려고 하는 데 동의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말해준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A를 전학 보내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A는 편모가정에서 자랐다. A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시장통에서 작은 장사를 하는 A의 어머니는 도시락은커녕 가족이 먹을 쌀도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걸 듣고는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이었다.


학교는 "그럼 A를 단속하고, 교화할 수 있도록 운동부에 입부시키려고 하는데 그건 괜찮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네 그러시죠. 제가 선처하겠습니다. 대신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학교에서 철저히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화답했다.


다음 날, 등교하는데 정문에서 A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블랙아' 하고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또 움찔했다. 어제 내가 그를 때려눕혔으나, 여전히 그가 괴롭힌 상처는 내 안에서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해. 그리고 여기, 내가 빌려 간 돈 중에 일부야. 나머지는 나중에 내가 꼭 값을게.' 라며 1200원을 건넸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금전을 갈취해 갔다. 나는 삥을 뜯길 때마다, 전 재산을 뺏긴 사람처럼 분하게 느꼈다. 그래서 경위서에 매 차례 A가 얼마를 갈취해 갔는지, 총합계금액은 얼마인지 하는 것들을 회계장부를 정리하듯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러나, 경위서에 적힌 금액은 고작 4천원을 조금 넘을 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받고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A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비쳤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떨구고 어기적거리며 학교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상당히 초라했다. 실제로 그는 몸집이 작았다. 당시를 회상해 보면 타고난 체격도, 근력도 A보다 내가 뛰어났다. 심지어 나를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합기도까지 수련했었다. 그러나 경험해 보지 못한 무자비한 폭력 속에 그는 내 안에서 무한히 커졌고, 나는 한 없이 작아졌다.


두려움은 생각보다 몸집이 작았다. 그리고 나는 두려움을 용서했다.


'두려움'은 그림자 속에서 위세를 뻗친다. '실체'는 작고 못난 고양이일 뿐이다.



두려움은 관리할 수 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생에 첫 번지점프를 했다.

잠비아와 짐바브웨 국경 양쪽에 걸쳐있는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 'Victoria Falls'의 다리 위에서 폭포를 향해 몸을 던졌다.


나는 원래 '고소공포증'이 없었다. 그런데 번지점프를 한 뒤에는 '고소공포증'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높은 폭포에서 자유낙하를 할 때 나는 죽는 줄 알았다. 떨어져 죽는 사람이 땅에 몸이 닿기 전에 심장마비로 대부분 죽는다는 말 있지 않는가? 그거, 사실이다. 자유낙하에서 느끼는 감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응축된 공포'다.


이전에는 높은 데서 떨어지는 것을 상상만 했기 때문에 '고소공포증'이 없었다. 그러나, 떨어져 죽는 느낌을 '경험'으로 알게 된 뒤부터는, '고소공포증'은 자유낙하의 상황을 다시 겪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내 몸의 보호장치가 되었다.


그래서 불편하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그저 조금 높은 데를 덜 가면 되는 거고, 땅에 발붙이고 사는 거에 조금 더 감사하게 되었을 뿐이다.



(마무리)


내 안을 잠식하고 있는 두려움, 극복할 수 있는가?


나는 이 글을 통해 '두려움에 당당히 고개를 들고 맞서 싸우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공포에 맞서 싸울 때, 우리는 내면을 지배하고 있던 두려움이 생각보다 몸집이 작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두려움은, '미지의 영역'에 있을 때 내 안에서 자란다.


나는 부모로부터 '두려움에 맞서는 법'과 '두려움을 용서하는 법'을 배웠다. 모블랙! 너는 잘 이겨내서 다행이다만, 나는 두려움에 맞서다 쓰러질까 두렵다고? 그러면 그냥 한 번 데이면 되는 거다. 번지점프를 하고 난 뒤 생긴 '고소공포증'처럼, '도전의 후유증'은 불장난을 하다 생긴 '작은 화상' 같은 것이다. 오히려 그 두려움이 남긴 작은 상처는, 내가 두려움의 크기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그대, 두려운가? 고개를 들어라.

무엇이 당신을 두렵게 하는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두려움의 실체를 바라보라. 그 순간, 당신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두려움은, 그래봐야 나를 가끔 할퀴는 정도일 뿐인 작은 고양이로 전락할 것이다.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말고, 두려움을 관리하고 통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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