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맛.

by 모래쌤


남편과의 추억이 담겨있는 것은 무엇이든 더 이상 향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남편과 살았던 동네에서 살고 있고, 함께 갔던 음식점에도 간다. 그렇게 그냥 늘 함께 살아가는 것이 남은 자의 운명인 것 같다. 며칠 전 정말 맛있는 귤을 만났다. 남편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라 울면서 맛있게 먹었다.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게 사실이다.






나는 무슨 '향'이라고 이름 붙은 귤은 싫어한다. 그냥 아무 이름이 붙지 않은 귤이 맛있다. 어릴 때부터 귤을 너무 좋아해서 겨울이면 손이 노래지도록 귤을 까먹었다. 결혼 후에도 겨울이면 귤은 떨어뜨리지 않고 대놓고 먹다시피 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귤의 맛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뜬 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마흔이 넘어서 말이다. 제주도 귤을 제주도에서 먹은 것이 눈을 뜨게 한 사건이었다. 원산지에서 잘 익은 귤을 먹어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귤 맛이라고?







제주도는 결혼 전 친구들과 여름휴가 때 여행한 적이 있었고, 신혼여행으로도 갔었는데 그때는 3월이라 귤을 먹어보진 못했다. 결혼하고 십수 년이 지난 어느 2월에 제주도에서 열리는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조그맣게 좌판을 편 노점상에서 몇 바구니에 귤을 담아 놓고 팔고 있었다. 모양도 그냥 그렇고, 값도 너무 싸서 어떨까 싶었지만 워낙 좋아하는 게 귤이라 샀는데, 껍질을 까고, 귤을 반으로 가르고 그걸 또 반으로 갈라 입안에 넣는 순간,


'아, 내가 여태 먹었던 건 귤이 아니었구나.'


귤 몇 개를 한꺼번에 농축해 놓은 것처럼 진한 향을 느낄 수 있었고, 겉껍질도 귤 알맹이를 감싼 속껍질도 얄팍했다. 내가 알던 그런 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맛난 귤은 그 이후 직배송을 해서 먹어봐도 거의 맛볼 수 없었다. 그런 맛있는 귤은 제주도에 직접 가야만 먹을 수 있나 보다 했다.







2023년에 가족 넷이 제주도 여행을 했다. 11월 말이었다. 그때가 귤이 나오기 시작할 때라고 했다. 올레길을 시작하는 지점에 커다란 사과 궤짝 같은 상자 안에 못난이 귤이 잔뜩 들어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상자 앞에 '가져가서 걸으며 드세요.'라고 손으로 써 놓은 삐뚤빼뚤한 문구가 보였다. '진짜 가져가도 되나' 하다가 전화번호가 있길래 전화를 해 봤더니 팔 수는 없는 것들이라 버리려던 것이라며 가져가란다. 맘껏!


맘껏?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한두 개씩 들었다. 남편은 몇 개 가져갈까 했지만 내 눈총에 그렇게는 못 했는데 아마도 세 개는 가져왔지 싶다.


“이 사람아~ 이런 건 가져가도 되는 거야. 맛있으면 농장에 전화해서 한 박스 사면 더 좋은 것이고!”


“그래도. 다른 사람들도 가져가게 둬요. 좀.”


귤껍질을 까는데 향이 다르다.


“음. 음... 흐음...... 그래 이 맛이지.”


그 여행에서도 귤을 얼마나 사 먹었나 모른다. 제주도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공짜 귤 몇 개에 우리는 참 행복했다. 남편의 활짝 웃는 기분 좋은 모습이 우스워 공짜가 그렇게 좋냐고 놀렸다. 공짜 좋아하다가 안 그래도 없는 머리숱 다 없어진다고 놀렸는데 남편은 뭐가 그리 웃겼는지 깔깔거렸다.







어제 오랜만에 귤을 샀다. 그런데 귤이 정말 맛있는 것이다. 하나 까서 입안에 넣는 순간 그만 바로 23년 11월의 기억을 소환했다. 그리고 그때 그 올레길에서 귤을 먹으며 웃었던 남편과의 기억.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라지던 풍경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 바닷가 옆을 걸어가며 황홀했던 기억. 넷이 함께 걸으며 왁자하게 웃고 떠들었던 기억. 온 제주를 다 걸을 것처럼 난리를 피우던 내가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갑자기 기운이 똑떨어져 ‘인제 그만!’ 해버리는 바람에 남자들 셋이 어이없어하던 표정까지 하나하나 줄줄이 사탕이 되어 떠올랐다.







성격 급한 나는 뒤에서 세 남자가 자꾸 불러도 느릿느릿 걷는 것이 답답하여 앞서 성큼성큼 갔고, 연신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빨리 좀 와~"


그러면서 막 가다가는 뒤돌아보고 빙글빙글 웃는 세 남자를 보며 답답해하고 그랬다. 그때 그럴게 아니라 남편이랑 걸음을 맞춰서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조금 더 했어야 했다.






세 번째 입시까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불운한 큰 애를 위로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네 가족만 며칠을 여행하기는 처음이었고, 제주도 여행은 아무래도 비용이 많이 드는 여행이라 엄두를 잘 못 냈었는데 아들의 스산한 얼굴을 보다가 '그냥 갔다 오자!' 했던 것이다.






남편은 돈을 아낀다고 비싼 음식점엔 가지도 못하게 했고, 그 바람에 제주도에서 유명하다는 맛집들은 구경도 못 해 봤다. 숙소도 급히 알아본 데다 가성비를 따지느라 좁다란 골목 안쪽에 있는 주차도 어려운 곳을 예약했었다. 다음엔 더 좋은 곳에서 머물고, 더 맛난 것도 먹고, 올레길도 다 돌아보자고 하며 아쉬운 여행을 했었다. 렌트카 비용도 하루치는 줄였는데, 바퀴가 거의 찢어지게 생긴 차를 타고 있다는 걸 여러 오름을 오르락내리락한 후에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하루치를 보상해 주었다. 차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서비스센터 직원은 큰일 날 뻔했다고 했고, 우리는 그동안 그 차로 다녔던 언덕길들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우리 네 식구 같이 죽을 뻔했다며.






그게 우리 가족 여행의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여행을 다녀오고 한 달 후 남편은 갑자기 고인이 되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좋은 곳에서 자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랬을 텐데. 아니다. 그렇게라도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다녀왔으니 추억이라도 남은 것 아닐까. 이렇게 했든 저렇게 했든 뭐가 더 나은 것 같진 않다. 다행인 것도 없다. 그저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나고, 슬플 뿐이다. 그 여행을 떠올리고, 그 올레길에서의 귤을 떠올리고 그 귤을 들고 웃던 남편을 떠올리며 울다가, 귤이 맛있다고 느끼는 내가 남들에겐 어떻게 보일까.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이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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