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대로 산다는 것

by 모래쌤

우리 아버지는 딸들 이름을 기가 막히게 지으셨다. 첫째는 바다, 둘째는 모래, 셋째는 소라. 둘째인 나의 이름은 모래다. 세 딸 중에 가장 많이 놀림 받았던 이름이다. 엄마는 딸만 내리 낳는 바람에 시어른들게 눈총 꽤나 받았다고 이야기 하셨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런 문제로 서운하게 한 적이 없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딸을 셋이나 키우며 여성 차별적 언사는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여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오히려 나무라셨기에 힘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려운 형편에도 하도 졸라대니 어쩔 수 없이 가르쳤던 피아노를 너무 좋아하는 딸이 콩쿠르에 나가게 되니 엄마는 동대문 시장까지 가서 드레스를 사오셨다. 그걸 입고 아버지께 선보였는데 아버지는 슬쩍 보시더니 인상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엄마, 아빠가 양복 입으라는데.”

“뭐?”

엄마가 아빠가 작업하시는 방으로 가셨다. 그러고는 큰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피아노 콩쿠르 나가는 애한테 무슨 양복을 입으라고. 얘가 남자야?”

“여자라고 양복 못입어? 여자는 왜 꼭 그런 드레스를 입어야 하나?”

엄마는 ‘내가 벽에 대고 말하는 게 낫지 어휴’ 투덜대며 돌아오셨고, 나는 ‘내가 입은 모습이 예쁘지가 않은가? 드레스 입는 여자는 한심한 건가’ 하는 생각을 얼핏 했던 기억이 난다.








또 한번은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내 접혀있던 바짓단에서 지렁이가 기어 나오는 사건이 있었다.

저녁 밥상을 앞에 놓고 우리 세 자매는 “아~~~~악!” 소리를 질렀고, 나는 울었다.

“뭘 지렁이 따위에 그렇게 소리를 질러, 뚝 못 그쳐? 사람구실 못할 것 같으니라구.”

울면서도 나는 억울했다. ‘아니, 내가 일부러 놀라는 척 약해 보이는 척하는 게 아닌데 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뉴스를 보시며 어떤 사안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물으셨고,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물으셨다. 나는 아버지 때문에 거울도 제대로 못 보고 살았다. 화장은커녕 헤어드라이어 소리만 나도 쫓아와 나무라셨다.

“기껏 대학이라고 보내놨더니 머리에 똥만 들어차는 거냐? 왜 그렇게 모양을 내냐.”

나는 억울했다. 나는 꾸미는 아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청바지에 티셔츠나 입고, 화장기도 없이 다녔는데 그런 이야길 들으니 화가 치밀었다.

“아니 그럼 머리를 삐치게 하고 다니라는 거예요?”







또 아버지는 너의 길을 열심히 가다 보면 그 모습에 미치는 놈이 나타나는 거라고(아버지 표현대로), 억지로 꾸미고 다니면서 남자랑 연애나 하고 그럴 생각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남녀평등 의식은 딸만 나은 이 나라의 남자가 느끼는 자격지심을 감추는 도구는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여자라고 무시당하지 않게 더욱 씩씩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여자 티가 안 나는 씩씩한 내가 못 되고 ’천상 여자‘라는 소리를 종종 들었던 나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아버지를 피하고만 싶었다. 지나고 보니 좋은 점도 하나 있긴 했는데,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서른셋의 나이에 결혼할 때까지도 '빨리 결혼해야지.' 라는 식의 잔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남편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꾸밈 없는 내 모습을 좋아해 주었고, 벌레를 무서워 하는 약한 모습을 보여도 허허 웃으며 처리해 주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던 남편을 만나고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내 복은 짧게 끝났다.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여자 티 내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야 하는 혼자가 된 것이다.







다시 이름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면 우리 아버지는 딸들을 줄줄이 세상에 내놓으려 작정하신 것처럼 언니 이름을 지을 때 이미 그 밑에 모래가 자라고 그 밑에 소라가 자란다는 서사를 만드셨다. 아버지의 서사대로 우리는 바다 밑에 모래, 모래 밑에 소라로 세 자매가 되었다. 문제는 그때가 70년대 초였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런 이름이 개성 있는 한글 이름이 아니라 이상하고 튀는 이름일 뿐이었다. 모래라는 이름을 실명으로 쓰는 사람은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지만, 바다, 소라 같은 이름은 특별하지 않은 무난한 한글 이름이 되었으니 우리 아버지는 확실히 감각이 앞선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엄마는 아빠가 지은 이름이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놀림당할 이름이고 커서 사회 생활을 할 때도 무시당할 이름이라고 생각하셨고, 엄마의 의지로 언니와 나는 튀지 않는 평범한 이름으로 개명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동생은 나와 3년 터울인데도 벌써 많이 인식이 바뀌어 그냥 소라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다. 68년생 언니의 '바다'라는 이름은 그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엔 힘들었던지 집에서도 더이상 바다라는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 경우는 일가 친척들은 모두 나를 ‘모래’라고 불렀다. 호적에 올라가 있는 개명한 이름은 외부인들에게 불렸다.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가족들은 나를 ‘모래’라고 부른다.







짓궂었던 우리 이모부가 “금모래, 금모래. 느이 아버지가 이름을 자갈이나 바위로 지었더라면 더 컸을 텐데 그치?” 하면서 자주 놀렸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이 내 이름을 알고 “야. 쟤 이름이 모래래. 흙 있잖아. 그 모래. 자갈, 바윗돌 깨뜨려 모래알~~~” 하는 놀림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서 밖에서는 절대로 ‘모래’라는 이름이 노출되지 않게 조심했다. 왜 사람 이름을 발에 밟히는 흙으로 지어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냐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동생은 소라라고 그나마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나만 왜 이런 이름을 지어줬냐고 따지기도 했다.







한글 이름이 점점 더 많이 쓰이고, 다른 사람과 같아지기보다는 나만의 어떤 것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세대가 되다 보니 내 이름도 뭐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내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다들 흥미로워하고 아버지의 예술가 아버지의 탁월함을 칭찬하기도 하여 으쓱해지기도 한다. ‘모래’를 예명처럼 사용하는 요즘은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름의 의미를 새기다 보니 삶이 이름대로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도 하다. 바닥에 깔려 끝없이 밟히기도 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게 모래이니 말이다. 하지만 모래는 단순히 발에 밟히는 존재가 아니라 작고 연약한 바다생물들의 삶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에는 누군가를 살리는 터전이 되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남편이 없이 아침에 눈을 뜬 지 746일째다. 남편과 함께 살았던 인생 1막이 끝났다. 인생 2막은 무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다시금 불안정한 혼자가 되었지만 이름의 의미를 새기며 내가 품어야 할 이들을 품고 이름에 걸맞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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