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생 복순 씨는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로 시계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규칙적인 삶을 산다.
그녀 주변의 물건들은 늘 각이 맞춰져 있으며 향기롭다.
그녀는 인공 향을 좋아하지 않아 어쩌다 향수를 선물 받아도 다 남을 줘 버렸지만 늘 향기를 유지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다.
자기와 워낙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남편과 평생을 살아온 탓인지 그녀는 어지간한 일에 화를 내지 않으며
각을 흩트린다고 짜증을 내지도 않는다.
다시 맞추면 되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랴 하는 식이다.
그녀는 남편이 아무리 속을 썩여도 - 술주정, 폭언, 사기당하고 돌아옴, 얼어 죽을 뻔함, 험한 산에서 낙상하여 죽을 뻔함 등등- 삼시 세끼 밥은 해주는 착한 여자다. 딸만 줄줄이 낳아서 시부모의 구박을 받았어도 딸들에게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키웠으며 당당하게 살라고 가르친 결기 있는 여자다.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그녀는 해방 직후 38도선이 생긴 이후 아버지를 따라 임진강을 도강하여 온 가족이 남하한 실향민이다. 전쟁 중 할머니와 아버지를 여의었고, 셋째 동생을 폭격으로 잃었고, 큰 오빠는 국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했다.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수녀가 되고자 했으나 수녀원에 낼 돈도 구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포기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고, 수를 놓는 일을 하던 그녀가 일감을 받아오던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41년생 김영민 씨와 만나게 하였다.
당시로서는 여자 나이 서른이면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였으니 시댁에서 반가워할 리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 하기는 친정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남자는 연하의 나이였으며 장남이었고, 전쟁 중 호적 신고가 잘못되어 '광산' 김 씨가 '김해' 김 씨로 잘못 신고되었던 복순 씨와 원래 '김해' 김씨 영민 씨는 동성동본이라는 서류를 가지게 되어 혼인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포기할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그녀의 여동생이자 평생 그녀의 친구와 같았던 명순 씨가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명순 씨는 영민 씨를 찾아갔고 영민 씨는 그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고. 명순 씨의 매서운 한마디가 그를 일깨웠다고.
"사내가 돼서 그만한 어려움도 극복을 못 하냐고. 언니 저렇게 집에서 앓아눕게 할 거냐?" 고.
결국 두 사람이 혼인을 결정했으니 둘의 사랑은 참으로 낭만적이다.
결국 둘은 우여곡절 끝에 부부의 연을 맺었고, 영민이 표현을 빌자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은 복순 씨는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고생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복순 씨의 인생에 일탈은 없었다.
큰 모험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랬기에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으며, 세 아이를 키우는 수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늘 정갈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고 그리하여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복순 씨는 자신이 너무 오래 살아 험한 일을 많이 겪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믿고 의지하며 친구 같던 명순 씨가 췌장암으로 몇 년을 투병하다 세상을 등졌을 때 그 어떤 이별보다 상실이 컸다는 그녀는 그만 당뇨를 앓던 큰딸을 또 먼저 보냈고, 얼마 전에는 자식처럼 의지하던 둘째 사위가 갑자기 쓰러져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는 아픔을 겪었다.
"같이 사는 게 이게 아주 다르네. 큰애 보냈을 때보다도 이건 더 큰 일이네. 이건 진짜 뭐라고 해야 할지. 내가 지금은 죽을 수도 없이 됐어 정말."
자기 복이 없어 자식들도 험한 인생 사는가 보다며 통탄을 하기도 하지만 하루아침에 아무 준비 없이 남편을 잃은 둘째 딸과 다정하던 아빠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불쌍해 지금은 내가 죽을 수도 없다며 더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1938년생 복순 씨는 작년 겨울에도 김치를 담갔고, 올봄에는 된장을 담갔으며, 시시때때로 김치를 종류대로 만들어 딸에게 나눠준다. 명절이면 갈비며, 잡채며 며칠을 두고 준비해 둘째 딸네와 함께 먹는다. 미국에 사는 막내딸과 손자 손녀를 매일 카톡 사진과 영상으로 보고, 천국에 간 큰 딸과 사위를 추억하며 그녀는 오늘도 주어진 날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