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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Nov 28. 2020

헨리 레서 원단 H. Lesser & Sons

원단 9

    « Covid-19가 가져온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는 클래식 남성복 시장에도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는 ‘누군가’의 주장이 업계 인물들의 입을 타고 사방에서 들려온다. 한쪽에선 클래식 남성복의 범주에도 비교적 편안한 옷들이 추가돼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반대 편에선 수트를 입을 일이 드물어졌기에 오히려 포멀한 수트가 각광받게 될 것이란 주장이 기세 등등하다. 각자의 옷을 팔아먹고야 말겠다는 상투적인 탐욕이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남성의 워드로브가 그의 생활양식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은 상식일 테다. 그러나 옷을 좋아하는 남성이라면 옷의 주문/구매에 앞서,


“그거 입고 어디 가려고”


라 비아냥대는 내면의 목소리와 때때로 벌이는 실랑이를 피할 수 없다. 하우스 스타일, 마에스트로의 심미안, 바느질의 품질과 착용자의 체형이 이루는 조화가 아무리 완벽하다 하더라도 참석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남성이 멋져 보이는 일은 드물다. 알란 플러서(Alan Flusser)가 주장하듯 화이트 타이/연미복은 모든 남성을 영화배우처럼 만들어 주는, 모든 체형과 피부색을 보완해줄 수 있는 놀라운 옷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미복을 입고서 서울/도쿄/런던의 거리로 출동할 순 없는 것이다.



    10여 년 전 #멘즈웨어의 파도는 세계 곳곳에서 포마드 머리, 더블브레스트 수트, 실크 타이, 실크 포켓 스퀘어, 2인치 턴업의 짧은 바지, 더블 몽크 스트랩 슈즈 차림의 남성들을 출현시켰던 바 있다. 그들은 애호가들의 세계가 유통하는 ‘올바른 착장’의 룰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요란스러운 기름기로 번쩍거리던  그들의 옷차림과, 지나친 자의식을 감추지 못하던 몸짓에는 대중적인 설득력이 결여돼 있었다. 이성을 유혹하는 일은 애당초 과감하게 포기하고(그들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건 그렇지 못했든 간에), 오로지 복식문화의 발전을 위해 살신성인(?)한,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들의 용맹함은 칭찬해 줄만 한 것이었다.


   2020년, 애호가들의 차림은 확실히 유연해진 듯하다. 그러나 이 역시 유행을 선점한 얼리 어댑터들이 뒤늦게 그들의 길에 들어선 대중을 피해 다시 그들만의 상품을 향해 떠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 '아이비/아메카지'에 둥지를 튼 그들은 쉐트랜드 트위드 재킷+ 베이스볼 캡, 스웻 셔츠+발마칸 코트 등의 룩들이 대중화되는 순간, 현재 프랑스 시장이 주도하고 있는 70년대 스타일로 철새처럼 떠나갈 테다. 그 후로는 아르마니식 Slouchy 스타일이 도래할지 모른다.


흔치 않은 재킷+노타이 차림의 지아니의 사진. 젊은 시절 해변 혹은 스키 리조트가 아니라면 그는 항상 수트와 타이 차림이었다. (1962년 재클린 케네디의 이탈리아 방문 당시)

 


    아무튼 복식 문화가 캐주얼해져 가는 것은 사실이다. 수트, 셔츠, 타이의 착장을 완성하는 일이, 색상, 비율, 질감에 대한 미세한 감각을 키우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학습의 장이라면(클래식 남성복의 세계는 cm, mm, 보통 사람들의 육안으로는 분별이 불가능한 미세한 색감의 게임이기에) 그것을 입을 곳이 없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TPO에 있어서 탁월한 민감성을 발휘하는 애호가들이 재킷을 입더라도 수트는 피하고, 수트를 입더라도 타이는 생략하며, 타이를 매더라도 포켓 스퀘어는 빼두는 선택을 점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상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수트 차림을 고수하려 노력하는 나 역시 최근 테일러와의 만남에서 '잘 입어질' 재킷 한 벌을 주문하기 위해 빈티지 원단들을 전부 늘어다 놓고 하나하나 살펴보는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 가장 보수적인 차콜 그레이 색상의 탑코트 외에 추가적인 주문은 하지 못했다. 내 워드로브를 고려했을 때 '필연적으로 다음 단계일 수밖에 없는' 재킷이 되어줄 원단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워드로브를 '잡탕'으로 만드는 일에 대한 반감이 불쑥 솟아오른 것일 테다.


아말피 해안 북부 라벨로의 카페. 재클린은 이날 함께 데려가 달라고 울며 떼를 쓰는 딸 캐롤라인을 남겨두고선 아니엘리의 요트에 올라탔다고.


    댄디의 옷차림이 예술일 수 있다면, 워드로브의 구성 역시 하나의 미적 일관성을 가져야 할 테다. 옷을 향한 사랑의 전제가 "그냥 최대한 즐기자!"라면, 워드로브가 '잡탕'이건, 착장의 테마가 '믹스 앤 매치'건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룰이 존재하는 클래식 남성복의 세계 내에서 애호가들은 '옳은 답'과 '편한 것' 사이에서 흔들리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고대했던 마에스트로와의 만남을 성사시킨 애호가는 그가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내 주길 간절히 바란다. 그는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주말의 대부분을 보내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마에스트로가 '정답'에서 먼 선택에 도달하는 일을 바라지 않을 테다. 그에게서 단 한 벌의 수트를 주문할 수 있을 뿐이라면,  그것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부합하는 수트이건 아니건 간에, 그것을 나침반 마냥 부여잡고 ‘우아함’이라는 전설의 섬으로 서울의 천박한 거리를 항해하고자 하는 것이 마니아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안경 사랑, 시계 사랑, 와인 사랑에 일조하는 것은 물론일 테다)


    애호가들이 즐겨 반복하는 영국 원단을 향한 맹목적 찬사 역시 그들의 ‘아직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적인 무엇'을 향한 사랑에서 기원한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기 전까지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이탈리아 원단과 영국 원단 사이의 차이. 우리는 둘 사이에서 이탈리아 원단이 아닌 ‘옳은 답이라고 교육받은’ 영국 원단을 선택한다. 영국 원단만을 사용해서 수트를 만들기로 유명한 퍼디난도 카라체니(Ferdinando Caraceni)의 딸 니콜레타 카라체니는 그 이유에 대해서


“훌륭한 캘리포니아 레드와인도 구할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린 여전히 보르도 키안티를 사요.  이유가 뭐겠어요? 그냥 그렇게 하게 되는 거예요."(Gentleman's Gazette)  

 

라 답했다고 한다.



더블브레스트 수트, 미국식 Reverse Stripe(오른쪽->왼쪽) 렙 타이 차림의 아보카토 (그는 "난 머리부터 벨트까지 친미 주의자다"라고 말하곤 했다고)


나 역시 원단의 질감을 전혀 감각할 수 없었던 때부터 영국 원단의 찬사를 불렀고, 비스포크 수트는 대부분 레서(H. Lesser) 원단으로 가지고 있다. 주로 13oz, 또는 골든 베일로 주문한다.


좋은 평을 받고 있는 드라퍼스의 Five Stars  번치 북을 뒤적여 보다가도 결국 매번


 “그냥 레서로 하죠”


라 말하고 마는 것이다.



아래는 Film Noir Buff의 H. Lesser 원단에 관한 글을 번역한 내용이다 (가독성을 위해 직역보단 의역의 방식을 택했다). 레서 원단을 향한 그의 열렬한 사랑이 엿보이는 재미있는 글이다.



H. Lesser and Sons


BY FILM NOIR BUFF



H. Lesser and Sons 원단에 대해서 당신이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왜 그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인가?


H. Lesser and Sons (레서)는 직조사들로부터 고급스러움, 내구성, 그리고 과거에 대한 향수 (Nostalgia)를 담은 원단만을 주문하기로 유명한 원단상이다.


그들의 원단은 분명 복고(retro)스럽다.  그것은 1968년의 국회, 케네디 정부를 떠오르게 한다.  섹스어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대영제국의 아우라와 193-60년대 영국과 미국 상류층의 귀족적 기품만을 뿜어낸다.


윈스턴 처칠과 그의 보좌관으로 15년간 그를 보필한 안토니 이든. 처칠의 뒤를 이어 영국 수상 자리에 오른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백작(Earl) 타이틀을 소유했다.


그런 것에 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인가?


만약 당신이 MTM 혹은 비스포크 옷을 주문한다면 - 최근 미국 남성들 사이에서도 맞춤 양복의 인기는 상승세에 있다 – H. Lesser 원단은 한 번 고려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아, 대부분의 미국 남자들은, 심지어 옷을 좋아하는 이들 중에서도, H. Lesser 원단과 마주한 경험이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은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앞으로도 H. Lesser 원단과 마주치지 못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이제부터 시작될 이야기는 당신에게 약간의 즐거움 정도는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H. Lesser 원단은 늘 나를 매료시킨다.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 하지만 여전히 날 흥분시키는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디자이너 상표가 존재하기 전의 세계, 신사적 예절의 세계, 남성의 수트가 되돌릴 수 없이 여성과 성(sexuality)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게 된 1960년대 후반 이전의 세계.


H. Lesser는 남자의 세계 내에서 통용되며, 그 세계를 아우르는 권력을 상징한다. 이 원단은 여성들의 호들갑을 기대하며 디자인된 원단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앞에 두고서 당신이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지성, 부, 스타일,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기 위해 만들어진 원단이다. 당신이 우월하며, 대담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원단인 것이다.  


샤크스킨/픽 앤 픽 우스티드 원단의 쓰리 피스 수트 차림의 안토니 이든 - 재킷은 피크 라펠, 베스트는 더블브레스트 모델이다. (사진: The Rake.com)


비교를 해보자면 H. Lesser 원단은 Harrisons of Edinburgh 원단과는 굉장히 다른 외관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두 원단은 모두 전형적인 영국 원단이라 불리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 둘 사이에는 부드럽고 여유 있는 실루엣으로 유명한 앤더슨 앤 쉐퍼드 수트와 두꺼운 패딩과 몸에 밀착된 실루엣을 자랑하는 헌츠맨과 디즈 앤 스키너 (Dege and Skinner) 수트 간의 간극만큼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해리슨 원단이 편리하고 합리적인 소비의 예시로서, 근대적 고급 상품을 상징한다면, H. Lesser는 근대적인 관점에서의 합리화가 불가능한 복고풍의 사치품을 대표한다. 하지만 두 원단은 모두 역사에 대한 깊은 경외심 속에서 유서 깊은 품질을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레서 원단은 내가 아는 원단 중 가장 드라이/매트한 원단이다. 이것은 레서 원단을 독보적인 존재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원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레서 원단이 가진 색상의 깊이와 탁월한 품질이 제공하는 매혹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보통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네이비 블루나 차콜 그레이 원단에 있어서도 레서 원단은 다른 원단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레서 원단은 분명 과거의 감성을 상기시킨다.


낡아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레서 원단은 옛 시대의 가장 진취적인 이들 - 천둥 번개가 치는 늦은 밤 대저택의 계단 옆 벽을 따라 늘어선, 당신의 촛불이 그 얼굴을 비추는, 초상화 속의 인물들 -  만이 입었을 듯한 수트의 정취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초상화들은 모두 대가들의 작품일 것이며,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 주위를 둘러싼 어둠을 굴복시킬 정도로 위엄이 넘치는 수트를 갖춰 입은 모습일 것이다.

(사진: Merino Brothers)
위 수트 재킷의 원단. H. Lesser 13oz 번치 (사진: Harrisonsofedinburgh.com)

여러 가지 면에서 H. Lesser는 Brughel the Elder가 그린 Triumph of Death와도 같은 원단이다. 소름 돋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화려하며 생기가 도는 그림과도 같은 것이다.  능묘에서 그 끝을 맞이하는 노쇠하고 비굴한 죽음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앞둔 치명적인 공포, 오직 독보적인 자부심을 가진 남성들만이 극복할 수 있는 그러한 공포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기업 침입자의 죽음, 역사가 너무 깊은 나머지 지폐가 말라비틀어져 버린 올드 머니(명문세가)를 상징한다.


레서 원단을 입은 남성은 죽음과 동침하면서도 그 속삭임에 굴복하지 않은, 궁극의 침착함을 갖춘 남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 원단으로 만들어진 수트를 입은 당신은 다시는 현세의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며, 미혼의 여성을 유혹할 수 없게 될 것이다(한스 발둥 그린의 그림 속에서처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나 황소와 곰과 같은 필부들은 시장의 부도덕함으로부터 승리하여 개선하는 당신을 경외심으로 우러러볼 것이다.


안토니 이든. 밑단이 넓은 바지와 단단한 어깨 사이의 조화가 멋지다. (사진: https://www.reeves-nyc.com)



이것이 최근까지 이 원단이 영국인들과 매우 소수의 미국 댄디들에게서만 사랑을 받았던 이유다. 그들만이 레서 원단의 독보적인 품질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이 원단을 주문-제작 하는 일은 마치 초자연과 만나는 일과 같다. 미지의 세계에는 당신을 해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만약 H. Lesser 원단이 개방하게 될 잠재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 보통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피안의 영역에서부터 찾아온 듯한 남성의 위엄과 외향을 감당할 수 없다면-  나는 당신에게 레서 원단을 피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이것이 댄디들이 레서 원단을 선호하는 이유다. 댄디는 다가가기 쉬운 남성이 되고 싶지 않다. 그는 접근이 불가능한 높은 곳에 머물고 싶어 하는 존재다. 그는 대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의 취향이 스타일에서나 품격에서나 모두 월등하다는, 그에겐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는 너무나 높은 곳에서 내려온 존재이기에, 그의 출신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절대 허락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 하는 남자다.

https://www.youtube.com/watch?v=dAM2_SpVglQ 


    모든 존재를 그의 옷과 스타일을 통해 굴복시키는 자가 아니라면 댄디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익살스러운 광대처럼 행동하지만, 사실 무리 중에서 가장 지적이며 철학적인 농담꾼의 경우처럼, 화려한 의복의 가면은 그 아래로 흐르고 있는 날카로운 사유들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오늘 진실로 기뻐할 이유가 생겼다. H. Lesser가 슈퍼 120s 양모와 1% 캐시미어 혼방 번치를 재출시한 것이다. 영국 업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가벼운 원단의 유행은 레서로 하여금 이 번치를 약간의 패턴을 추가한 모습으로 재출시하게 만든 것이다.


    이 원단은 과거와 현재, 세밀함과 묵직함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은 존재다. 1980년대 말에 처음 출시된 이 번치는 다른 원단사들이 슈퍼 120s 원단을 출시하던 시기에 슈퍼 120s 양모와 10% 캐시미어 원단 혼방 구성으로 '업그레이드' 된 바 있다. 그러나 추가된 캐시미어 함량은 가격의 상승을 가져왔을 뿐, 원단을 더 고급스럽게, 또는 그 품질을 더 훌륭하게 만들지는 못했고, 원단의 수명을 짧게 만드는 역효과를 가져왔다는 평까지 받아야 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오리지널 슈퍼 120s 번치가 다시 판매되게 된 일은 희소식인 것이다.  


    11-11.5 아운스 슈퍼파인 번치 역시 멋진 수트용 원단을 제공한다. 이 무게는 미국 남성이 사무용 수트로 고를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종류에 가깝다. 그야말로 ‘전투용’(workhorse) 수트 원단의 대명사인 것이다. 난 이 원단의 내구성을 직접 증언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중앙난방과 지구 온난화, 미국인들의 비대해진 몸은 나로 하여금 이 원단에는 신축성이 전혀 없다는 점을 언급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체온이 높고, 땀을 잘 흘리며, 풍족한 생활, 혹은 웨이트 운동에 의해 몸이 잘 불어나는 남성이라면 이 원단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H. Lesser 원단은 여전히 씨실과 날실이 모두  두 겹으로 구성된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이는 원단을 구성하는 가로와 세로의 실들이 두 겹의 나선형 양모 섬유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테일러들은 이와 같은 구성이 그들의 작업을 손쉽게 만들어 주며, 그 품질에 있어서도 더 믿을만한 원단을 의미한다고 말해줄 것이다. 달리 말해 레서 원단은 타 원단사의 제품들보다 더 단단하며, 밀도가 높고, 더 많은 양의 양모 섬유가 빽빽하게 들어 차 있는 원단인 것이다.


    레서 원단의 표면은 흡사 종이처럼 매트한 질감을 보여주고, 특유의 드라이함은 보는 사람의 눈의 습기를 다 흡수해버릴 정도로 독보적이다. 밀도 높은 직조 구성은 착용 후 원단이 다시 원래의 형태를 매우 신속하게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원단은 지름길을 택하여 빠르게 제작된 원단보다 더 긴 수명을 자랑하기 마련이다. 짧고 뭉툭한 양모 실은 H. Lesser에서 활용하는 섬유-블렌딩 과정에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레서 원단에는 오로지 긴 양모 실만이 사용된다. 이러한 실로 제작된 원단은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더 높은 밀도와 더 뛰어난 내구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품질에 있어서 타협하는 일을 거부한다. 전통적 방식으로 제작된 원단만을 선호하는 것이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H. Lesser는 그들의 기준에 부합해 주었던 옛 세계의 상실을 애도한다. 오늘의 세계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비용을 요구하고 있고, 원단의 품질을 예전과 같이 유지하는 일은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워지고 있다. 그중 하나는 점차적으로 양산화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있는 영국 양모 업계 내에서 H. Lesser 원단이 요구하는 높은 품질의 양모 원사를 구하는 일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레서와 협업하는 작은 규모의 방직 공장들의 입장에서 높은 품질이 요구하는 생산비용은 그것을 생산이 불가능한 원단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사진: Gettyimages)


     H. Lesser의 최대 시장은 여전히 영국이지만, 미국이 이를 뒤쫓고 있다.


    상술한 것처럼 H. Lesser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드라이한/매트한 원단 마무리 처리를 보여준다. 이는 매끈한 원단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드라이/매트한 원단의 처리는 특별히 주문돼야 하며,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정밀한 검사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검사 끝에 한 번 더 마무리 과정을 거치기 위해 원단이 방적 공장으로 다시 환송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H. Lesser가 상징하는 가치들을 생각했을 때, 그들마저 다른 원단사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존재로 전락하는 일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원단 상인이 그저 방적 공장의 물건을 파는 중개 상인이 아닌, 제품에 가치를 더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한다.  레서 원단의 품질에 대한 지식과 영국 전통에 대해 쏟는 관심 없이는 레서가 대표하는 예술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레서의 오너들에게서 그들이 품질에 있어서 쉽게 그들의 고집을 굽히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받게 된다. 현재로서는 H. Lesser는 오늘보다 조금 더 우아했던 시대의 기준을 지켜나갈 것으로 보인다.


(역주: 2010년 이후 H. Lesser는 Harrisons of Edinburgh에 의해 인수됐다 - 많은 이들이 Harrisons사가 유서 깊은 레서 원단의 품질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고백 했으나, 다행히 인수 후에도 레서 원단은 오랜 세월 레서를 사랑했던 애호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안타깝지만 우스티드 스트라이프 수트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플란넬 수트로 대체한다. (사진: Gettyimages)


난 윈스턴 처칠이 국회를 상대로


“국방에는 수백만 파운드를. 하지만 조공에는 단 1 쎈트도 허락될 수 없다”


따위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레서 원단으로 만들어진 차콜 스트라이프 수트의 라펠의 뒷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흐뭇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의 동료 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당당하게 퇴장하는 그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는 머리 위로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는 의원들을 뒤로하며, 바깥의 대리석 계단을 따라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이 시간이야말로 그의 최고의 순간이다. H. Lesser의 아름다움이 그를 감싸고 있다. 그것은 바깥으로 표출된 그의 결의의 상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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