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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Sep 15. 2021

스타일과 코스모폴리타니즘

George Wang and Atelier Brio Pechino

이번 포스트는 Derek Guy의 "Cosmopolitanism and Style"의 번역본이다.


원문 링크:

https://dieworkwear.com/2021/09/07/cosmopolitanism-and-style/

        

번역-포스팅을 흔쾌히 허락해준 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Cosmopolitanism and Style  


by Derek Guy of Die Workwear

POSTED ON SEPTEMBER 7, 2021




    홍콩의 소더비 옥션 하우스. 감색 수트 차림의 남성이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고, 손들이 계속해서 날아오르는 사이, 자오우키의 대표 세폭화, 쥬앙-옥토브흐 1985(Juin-Octobre 1985)의 가격은 끝을 모르고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싱가포르 다운타운의 Raffles City 컴플렉스 프로젝트를 위해 이오 밍 페이가 주문한 이 작품은 자오의 “인피니티"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캔버스 위에선 복숭아, 사프란, 라일락이 소리 없이 춤을 추다 수평선 위에서 터져 나오며 관객들에게 우주를 선사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2005년 Raffles City에서부터 그 자리를 옮겨 대만의 수집가에게 판매됐고,  2018년 10월에 이 항구도시의 경매 하우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밤, 팔들은 계속해서 허공을 휘저었고, 그때마다 가격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마침내 경매인이 망치를 찍어내렸을 때, 그날의 주인공은 HK 4500만 달러 (6500만 US 달러)라는 믿기 어려운 가격에 판매됐다. 홍콩에서 판매된 예술 작품의 최고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         


    자오는 1920년 베이징에서 유복한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은행가였고, 그의 할아버지는 수재(秀才)(과거 시험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음을 암시한다)의 신분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가족들은 그에게 금융업을(아버지를 따라) 권했으나, 어린 자오는 예술가의 꿈을 품고 있던 아이였다. 유럽과 미국의 예술 잡지들을 오려내며 10대를 보낸 그는 가족에게 예술 학교 진학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의 부모는 마지못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다만 고전 중국식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자오는 1935년부터 중국 미술 대학(中国美术学院)에서 6년에 걸쳐 서예식 잉크화를 배우게 된다. 졸업 후 교사로서 같은 학교에서 몇 년을 더 보낸 후, 중국 혁명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47년, 그는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다. 계획은 파리에서 2년간 예술 공부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재앙으로부터 겨우 일어서고 있던 파리였으나, 그 예술 씬은 당시에도 생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이 활기에 크게 기여하고 있던 것은 프랑스 수도에 잔존하던 문화적 다양성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파리는 전 세계의 조각가, 화가, 판화 제작자들이 모이던 곳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파리의 레프트 뱅크로 이주해 온 젊은 유태인 남자들이었다. 당시 파리의 레프트 뱅크는 카페, 살롱, 갤러리마다 예술가, 작가, 철학자들이 모여들던 곳이었고, 이들 중에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세련되고 아름다운 초상화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 화가), 마크 샤갈(모더니즘의 선봉장. 러시아-프랑스인) 샤임 수틴(테일러의 아들이었던 예술가. 한 여성을 그린 그의 인상주의-초상화는 고향인 벨라루스에서 민주 항쟁의 상징이 되었다)이 포함돼 있었다.




    이와 같은 예술가들의 성공은 이민자들이 프랑스 예술의 순수성을 오염시킬 것을 우려한 프랑스 사회 내 특정 계층의 반감을 불러왔다. 1925년 안드레 와노는 Comœdia에서 타지 출신 예술가들을 "에꼴 드 파리"라 부르며 비꼬았고, "포비즘"과 "큐비즘"(본래 경멸적 용어로 사용됐던)의 용어를 탄생시킨 인물로서, 신랄하기로 유명했던 루이 보셀 또한 레프트 뱅크를 수놓던 이민자들을 두고 “프랑스 예술의 대표 행세를 하는 슬라브족들”이라고 조롱했다(그는 분명 냉소를 띠우고 있었을 것이다). 1930년대 프랑스의 비평가들이 표출하고 있던 반감은 분명 반-유대적 정서에서 비롯하고 있었다. 웬디 스미스는 워싱턴 포스트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924년 앙데팡당 살롱(Le Salon des Indépendants)이 예술가들을 출신 국가별로 나누어 프랑스 출신 예술가들과 이민자 출신 예술가들을 구분하기로 한 결정은 불붙어버린 프랑스 내 유태인과 비유태인들 사이의 적대감과 무관하지 않았다.”


    종전 이후로도 프랑스는 외국인 혐오와 반 유대주의와 씨름해야 했지만, 해방 후 파리의 예술계 내에서 민족주의-국가주의는 전반적으로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오는 드골 장군의 샹젤리제 개선 행진으로부터  막 3년이 지난 1947년에 파리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예술계는 이미 성황을 이루고 있었고, 타국 출신의 예술가들 역시 환영받고 있었다. 2년 계획이었던 자오의 프랑스 체류는 무한정 연장됐고, 그는 이전까지는 흑백 잡지로 볼 수 있을 뿐이었던 예술 작품들을 실제로 접할 수 있게 됐음에 기뻐했다. 파리의 코즈모폴리턴 예술계 역시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는 미국의 샘 프란시스, 조안 미첼, 노만 블룸, 포르투갈의 마리아 헬레나 비에이라 다 실바, 캐나다의 장 폴 리오펠, 독일의 한스 할퉁, 프랑스의 피에르 수라즈와 친분을 맺었다. 벨기에계-프랑스인 시인 앙리 미쇼가 자오를 영향력 있는 예술상이었던 피에르 로브에게 소개해 주었고, 1953년, 이 예술가 일동은 로브의 갤러리에 모두 모였다. 드니스 콜롬이 그들의 사진을 찍었고, 이렇게 그들의 우정과 예술사의 길이 남을 순간이 영원히 기록에 남게 됐다.

사진: Sotheb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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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로부터 영향을 받은 자오는 서방 예술계에서 그만의 길을 개척하길 원했다. 그는 “중국 화가”라는 낙인이 찍힌 채로 고정관념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에서 훈련받았던 “노골적으로 중국적”인 풍경화와 잉크화 테크닉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반면 ‘문화적 모방가’가 되는 일 역시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 다운 예술을 추구하길 원했던 자오는 결국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전통(전후 유럽의 모더니즘과 중국의 고전주의)을 결합시킴으로써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자오의 추상주의 작품들은 첫눈에는 혼잡스러워 보일 수 있다. 커다란 색상의 덩어리들이 캔버스 위에 펼쳐지고, 마치 빅뱅처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하지만 모든 조합은 저마다의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자오는 거기에 빛과 그림자를 통해 질서를 부여했다. 그는 매우 강하고 의식적인 붓터치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중국식 붓글씨 훈련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얇고 굴곡진 선들 역시 속도감을 연상시킨다. 마치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내 예술가 친구 중 한 명이 줄리아 그라임스가 UCLA에서 자오우키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줄리아에게 자오의 그림이 “프랑스 예술도, 중국 예술도, 어느 쪽도 대표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줄리아는 “맞아요”라고 답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대표할 뿐이죠. 그거면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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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오의 여정은 우리에게 코스모폴리타니즘의 힘을 상기시켜 준다. 그는 언젠가 말했다.


“모든 사람은 전통에 얽매여 있습니다”.

“전 두 개의 전통에 묶여있죠”.


두 가지의 각기 다른 전통을 결합시킴으로써 자오는 새롭고 아름다운 예술을 탄생시켰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은 더 높은 진리(이 경우에는 ‘미(美)’)를 탐색하기 위해 지역성을 초월하여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고대에 시작된 것으로서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몽테뉴는 보르도 근방 그의 가족 소유 성의 들보 위에 테렌티우스의 구절을 새겨 넣었다.


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

“난 인간이다. 인간에 관한 그 무엇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

 

소크라테스 역시 소속된 국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것이 ‘아테네’라고 답하지 않고, ‘세계’라고 답했다. 1711년 봄에 간행된 Spectator에서 영국의 에세이스트 조셉 애디슨은 어지러울 만큼 여러 인종들이 뒤섞인 런던의 혼돈 앞에서 그가 느낀 기쁨을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의 내국인과 외국인들이 한 데 모여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 은밀한 기쁨을 준다. 동시에 그것은 영국인으로서 내 허영심을 채워준다. 난 때때로 아르메니아 사람들 사이에서 여기저기 떠밀리고, 유태인들 사이에서 길을 잃으며, 네덜란드인 무리 중 하나가 된다. 나는 매 순간 덴마크인, 스웨덴인, 프랑스인이 된다.”


 지난 100년 간 코스모폴리타니즘은 거듭해서 도전을 받아야 했다. 때때로 그것은 서방 부르주아, 나약하고 뿌리가 없는 떠돌이들, 국가적 특색을 주장하길 원치 않는 이들의 이데올로기로 치부되곤 했다. 하지만 자오가 보여주듯, 타자의 사회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의 뿌리와 단절할 필요는 없다. 새롭고 더 아름다운 존재를 탄생시키기 위해 각기 다른 전통이 한데 모이는 일 역시 가능한 것이다. 남성복의 세계에서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종종 멋진 스타일의 소유자들을 배출해 왔다. 자오 역시 굉장히 스타일리시했던 남자였다 (파리의 아방 가르드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이 중국 출신의 모더니스트는 플리츠가 잡힌 코듀로이 바지, 버팔로 플레이드 헌팅 코트를 멋스럽게 입어낼 줄 알았다. 현대 일본에선 유키오 아카미네와 켄지 카가가 그들의 스타일 모델로서 비토리오 데 시카와 프레드 아스테어를 언급하고 있다. 제나로 루비나찌 역시 나폴리에 처음 문을 연 가문의 테일러링 하우스에 런던 하우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그가 가장 경외하던 도시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트래드(trad)들의 트래드인 브루스 보이어 역시 아머리의 모델 3 재킷- 피렌체식 테일러링에서 영감을 받은 일본 수트- 을 입는다


    BRIO의 창립자인 조지 왕은 남성 스타일 커뮤니티 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모폴리탄이다. 그는 최근 새로운 테일러링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렸다. 아틀리에 브리오 페키노가 그것이다. (브리오와 페키노는 각각 화려함과 베이징을 가리키는 이탈리아어다). 가게의 공간은 넓지 않다- 브리오의 옛 면적의 절반 수준-. 하지만 조지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재단 테이블을 마주하게 된다. 브리오 페키노의 테일러들이 건축가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패턴을 그려내는 공간이다. 가게 왼쪽으로는 매력적인 바버샵이 자리하고, 오른쪽으로는 고급 공정을 통해 생산된 기성복들을 보관하는 창고용 공간이 위치한다. 가게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색-금색의 가구들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입해온 제품들이다. 이들은 한때 시모네 리기의 부티크 스토어 프라시(프라시가 문을 닫기 전까지)를 장식하던 가구들이었다. 조지는 이 무거운 가구들을 피렌체에서부터 베이징으로 운반하기 위해서 만 달러 정도를 지출했다. 그는 그것이


“마치 가게 전체를 옮기는 작업과도 같았어요.”


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불편을 무릅쓴 이유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프라시는 세계 최고의 남성복 가게 중 하나였어요. 전 계속해서 이 가구들을 사용할 겁니다. 우리 집에 가져다 두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소규모 기성복 컬렉션 역시 판매되고 있지만, 가게의 주력 서비스는 커스톰 테일러링이다. 브리오 페키노의 유리-나무 문을 통과함과 동시에 고객은 순간이동을 하게 된다. 문의 반대편에서 그는 다국적 장인들과 함께 옷을 제작하게 되는 것이다. 브리오 페키노는 나폴리 특유의 소프트 테일러링- 얇은 패딩이 들어간 어깨와 깔끔한 가슴라인, 곡선을 그리며 열리는 쿼터, 면도칼처럼 샤프한 선의 라펠- 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나폴레탄 테일러링 하우스인 사르토리아 달쿠오레와 함께 협업하고 있다. 나폴리의 반대 축에 해당하는(스타일과 지형에 있어서) 테일러로는 이탈리아 북부를 대표하는 사토리아 크레센트가 있다. 크레센트의 창립자 사토키 카와이는 직각 어깨, 볼륨감 있는 가슴, 닫힌 쿼터, 낮은 고지의 수트- 밀라노 특유의 실루엣- 를 재단한다. 그 외 브리오와 협업하는 사르토로는 사르토 준(Sarto Jun)(서울), W.W. Chan(홍콩), Lutays(프랑스)가 있다.



    브리오 페키노의 핵심 사업은 인-하우스 비스포크 테일러링 서비스다. 조지는 지난 5년 동안 이 프로젝트를 준비해 왔다.  5년 전 그는 저명한 피렌체의 테일러 한 명을 설득하여 이 프로젝트를 위한 블록 패턴을 설계받았고, 그 패턴을 두 명의 베이징 출신 브리오 테일러들에게 전달하여, 몇 벌의 테스트 재킷을 제작했다. 그 후 조지와 그의 테일러들은 수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패턴을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 새 재킷을 만들어서 실루엣을 수정했고,  조지가 해외로 출장을 떠날 때마다 나폴리와 밀라노 테일러들의 피드백을 참고했다-. 지난달, 마침내 아틀리에 브리오 페키노의 문을 열었다. 중국 스타일 테일러링이라 불릴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가 생각하는, 클래식 테일러링 세계 내에 존재하는, 컨템퍼러리(모던) 착장입니다.”


조지는 내게 설명했다.


“전 재킷을 디자인하는 데 있어서 조금 더 추상적인 접근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영국식, 또는 나폴리식 테일러링을 생각할 때, 종종 특정 디테일들을 떠올립니다. 셔츠 숄더(스팔라 카미치아), 밑단까지 내려오는 앞판 다트 같은 것들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디테일들을 조합하는 일이 재킷의 스타일을 탄생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테일러가 받은 훈련의 종류를 반영할 뿐이죠. 하지만 오늘의 고객들은 재킷을 볼 때, 이처럼 표면적인 디테일들을 찾으려 합니다. 더 중요한 요소인 재킷의 실루엣 같은 것들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죠. 저는 중요한 요점으로 다시 관심을 집중시키려 합니다 – 재킷의 곡선, 비율, 선과 같은 것들 말이죠. 저는 사람들이 버튼홀이나 다트의 위치를 통해서 저희 재킷을 알아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재킷의 전체적인 모양새를 통해서 그것이 저희 것임을 알아보길 원합니다. "



 



   이 브리오 페키노의 새로운 스타일에서 우리는 매우 “조지”스러운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조지는 대학 졸업 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탈리안 테일러들에게서 수트와 스포츠 코트를  주문했고, 일본의 잘 알려지지 않은 가게들에서 기성복을 구입해 왔다. 그의 인-하우스 테일러링 서비스는 이러한 경험들의 집합체인 것처럼 보인다. 자오의 작품들처럼, 브리오 페키노의 테일러링은 세계 곳곳 테일러링의 특징을 선별해 모아 그들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제품으로 변모시켰다. 브리오 페키노의 재킷들의 내부에는 아주 조금의 부자재밖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 패딩은 생략됐고, 어깨 위로는 단지 말총 심지(hair cloth)가 있을 뿐이다. 이 구조는 재킷에 가벼움과 편안함을 제공한다. 남부 이탈리아 특유의 테일러링을 경험해본 이들에겐 익숙한 느낌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킷들은 이탈리안 재킷 같아 보이지 않는다. 넓은 어깨선(extended shoulder line)은 사뭇 피렌체 테일러링과 조지 특유의 스타일을 연상시키지만, 리베라노의 짧은 기장과 곡선적 실루엣은 찾아볼 수 없다. 버트닝 포인트(재킷에서 잠그게 되는 버튼의 위치 3 버튼에서는 가운데, 2 버튼 재킷에서는 윗 버튼)는 더 아래로 내려왔고, 이는 라펠을 아래로 더 연장시켰으며, 재킷의 무게중심 역시 더 낮춰졌다. 착용했을 때 이런 재킷은 몸 위에서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재킷의 버트닝 포인트가 낮춰졌기에, 비율의 균형을 위해 재킷의 총 기장 역시 길어졌다. 조지는 오늘날 재킷들이 너무 짧게 제작되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재킷이 짧으면 주머니가 몸 위쪽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러면 주머니를 사용할 때 팔이 심하게 구부러지게 되고, 동시에 어깨는 각이 지게 됩니다. 착용자가 딱딱하고 부 자연스러워 보이게 되죠. 반대로 재킷 총기장이 더 길다면 주머니를 몸 아래쪽에 위치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더 편하고, 여유로워 보일 수 있죠.”



“편안함(relaxed)”이야말로 이와 같은 실루엣의 추구점이다. 재킷을 고정시켜줄 내부 부자재가 거의 모두 생략된 이런 재킷은  착용자의 움직임과 함께 펄럭이고 흔들리기 마련이다. 마치 물 위에서 물결을 일으키는 파도처럼 말이다. 가만히 서 있을 때에도 원단이 가슴 아래로, 팔을 따라 떨어지는 모양새를 연출하고, 이는 움직임을 암시한다. 조지는 이런 요소가 동양 철학의 사고방식(흐름에 순응하고자 하는 욕망)과 중국인들의 테일러링 취향을 반영한다고 믿는다.



“뉴욕시에서 테일러링 하우스를 오픈하는 경우, 특정한 종류의 고객층을 예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예를 들자면 금융업 종사자들을 상상할 수 있겠죠. 이럴 경우 드레스 코드 역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우리에겐 그런 서양의 테일러링 DNA가 없습니다. 수트를 입어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저희 손님들 중 대부분은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루는 스트리트웨어를 입고 다음날은 테일러링을 입을 수도 있는 남성들이죠. 직장에서 어떤 스타일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선입견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희로서는 네이비 수트만으로 워드로브 전체를 채우고 싶어 하는 손님을 만나는 일은 드뭅니다. 보통의 경우 워드로브의 빈자리를 채워주면서도 무언가 특별한 제품을 구하기 위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단지 테일러 된 재킷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맞춤-상품을 판매하는 셈입니다.”




지난 20년간 테일러링의 유행은 짧고 슬림한 핏을 선호했다. 브리오 페키노의 재킷들은 스타일적 관점에서 그 반대 축을 대표하고 있다. 우리는 여유분의 볼륨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 어깨 위, 가슴 주변, 등 -. 반면 라펠은 마치 꽃을 피우듯이, 재킷의 최하단 버튼에서부터 버트닝 포인트를 거쳐 고지(라펠과 칼라가 만나는 지점)까지 펼쳐진다(대부분의 경우 라펠 [롤]은 버트닝 포인트, 또는 그보다 조금 위에서 멈추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재킷들은 혼잡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의도를 가지고 조합된 것처럼 보인다. 원단 또한 재킷에 강한 실루엣을 부여하기 위해서 특정한 방법으로 조형됐다.


“우리는 워크웨어에서부터  여러 가지 패턴 제작 방식을 전용해 왔습니다. 특히 어깨 구성이나 소매를 다는 방식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였죠.”


조지는 말한다.


“우리는 정말로 몸과 함께 움직이는 옷을 만들어내고자 했습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난 브리오 페키노의 테일러링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맞춤'(personalization) 서비스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는 나를 놀라게 했다. 일반적으로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은 세 가지다: 옷의 종류(슈트 또는 스포츠 코트, 싱글 또는 더블브레스트), 원단(고객의 라이프스타일과 요구사항을 고려해서 조지가 고객의 선택을 돕게 된다), 결제 수단이 그것이다. 벤트, 플리츠, 포켓 형태, 버튼의 수와 같은 디테일들은 전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한 디테일이다.


    이와 같은 방침은 비스포크 하우스들 뿐이 아니라 의류 업계 전체의 경향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갈수록 더 많은 업체들이 더 많은 수의 디테일을 고객이 스스로에게 맞는 것으로 직접 선택하게 하고 있는 상항에서(하이-테크 인터페이스를 통해 그들이 선택한 사양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도 종종 제공된다),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에 제한을 두는 비스포크 테일러링 서비스를 보는 일은 매우 의아한 일이다. 하지만 조지는 그의 하우스 스타일에 있어서 타협하는 일을 원치 않는다. 또한 그는 이러한 ‘맞춤’을 향한 집착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자동차 업계에서 일어난 현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한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차들은 이런저런 사양들을 전부 갖추고 있습니다. 그들이 ‘있어야만 하는’ 것들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들 중 차의 성능과 관련된 것은 없습니다. 옷에 있어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죠. 스타일에 있어서 모노그램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스타일리시함을 추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조지는 가까운 시일 내에 건축계의 대가 I.M. Pei, 저명한 모더니스트 산유와 같이 서양식 옷을 입었던 스타일리시한 중국 남성들을 소개하는 캠페인을 소개할 계획이다.  


“과거의 중국 남자들을 보면, 특히 유럽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이들의 경우, 서양식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이탈리아나 영국 남자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중국인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죠. 그들이 옷을 입는 방식에는 어떤 부드러움이 있었습니다. 제가 저희 하우스 스타일을 통해서 구현했으면 하는 느낌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양식 테일러링에 그 기반을 두고 있지만, 동양식 해석이 가미된 것이죠. 그것은 전통적으로 매우 남성적인 스타일의 의복에서부터 날카로움을 조금 덜어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조지는 가게가 스스로를 나타내는 방식 역시 중요하다고 믿는다. 매장에서 영업을 하는(오프라인) 가게로서, 손님들의 주를 이루는 것은 베이징의 중국인들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아한 중국 남성들은 그들의 옷이 아닌, 그들의 성격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스타일리시해 보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가게를 방문하는 손님들이 우리가 그들을 리노 이에루찌, 루카 루비나찌, 또는 그 외의 스타일 아이콘들처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그들이 스타일에 있어서 조금 다른 모델을 가졌으면 합니다. 만약 그 모델이 동양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우선 ‘얼굴’은 잊어두고, 어떻게, 그리고 왜,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에 집중하는 일이 쉬워질 수 있습니다. 반면 루카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얼굴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계속해서 ‘무엇’에 집중하게 되죠. 그가 ‘무엇’을 입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도 저걸 살 수 있지?"의 질문에 집중하게 됩니다. 다른 종류의 모델들을 소개하는 일이 사람들로 하여금 왜 그들이 그런 옷을 선택했고, 어떻게 그것을 조합했는지를 생각하게 만들기를 바라봅니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옷을 그들에게 ‘맞출’ 수 있고, 그들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죠.”



아틀리에 브리오 페키노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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