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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Jan 19. 2021

#6. 낭만을 품고 갔다간 실망하는 여행

인도는 사실 신비롭지 않다. 그러나,



'인도 여행'은 대개 신비롭다고 알려져 있다. 인도 여행을 보름이라도 하고 온 사람이면 인도의 신비로움을 칭송하는 책을 쓰기도 하고, 미디어에도 다루는 인도의 이미지도 워낙 그렇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긴 하다. 인류의 5대 종교 중 무려 세 종교가 인도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그만큼 뿌리 깊은 철학의 본 고장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인도에서 가장 많이 겪은 건 사실 사기였다. 오직 돈을 목적으로 한 그 뻔뻔한 거짓말들. 


물론 백 보 천 보 양보 해서, 장사꾼들이 그러는 건 그나마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순 있다. 그 사람들은 애초에 돈을 버는 게 목적이니. 게다가 아무리 철학과 수행의 고장이라 해도 인도도 사람 사는 곳이긴 매한가지이니. 하지만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은 ‘수행자’였다. 인생 말년에 접어들어 속세에 대한 집착을 이제는 끊고, 진리만을 추구하며 산다는 사람들. 


종교의 나라 답게 인도에는 '수행자'가 많다. 전통적으로 인도인은 대개 중장년이 되면 속세와 집을 떠나 숲에 기거하며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고, 노년에는 모든 것에 집착을 끊고 여기 저기 유랑하며 중장년에 찾은 진리의 수행에 매진한다. 복장도 특이해서 그들은 겉모습만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머리카락에 대한 관리의 집착도 버린 건지 소똥이 잔뜩 묻은 거친 머리는 길게 늘어뜨렸고, 의복에 대한 집착도 버렸는지 몸에는 주황색 천 쪼가리만 대충 걸치고 다닌다. '지혜의 눈'이라며 이마엔 흰색이나 노랑, 빨간 색 등으로 늘 물감이 발라져 있다. 그 모든 외적 특징은 그들이 '진리를 위해 사는 수행자'라는 증거였다. 그러니 명목으로만 따지면 그들은 속세의 시시콜콜하고 자잘한 문제로부터 초월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 역시 땡전 한 푼을 위해 어리숙한 이방인 여행자를 속여먹기를 서슴지 않았다. 


실로 인도에 대한 환상은 쉽게 깨졌다. 오기 전에는 무슨 영적으로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문이 많더니 실제로는 그런 건 거의 없더라. 외려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사기 치려는 사람만 수두룩했다. 여행자들은 각종 책이나 영화에 감명 받아 '인생의 진리'를 찾기 위해 인도로 오지만, 현실적 여행에서 인생의 진리는 없었다. 오히려 끈적끈적한 자본주의의 잔해가 거의 전부였다. 어쩌면 ‘돈 벌려면 남을 속이기도 해야 하는 거구나’라는 게 인도의 수행자들에게 배운 현대 사회 인생의 진리라면 진리일지도. 그런 '자본주의 진리'는 서울과 뉴욕보다 인도 최고 성지인 바라나시에 더 분명하게 있다! 




평소 다니던 거리에서 꽤 먼 곳으로 산책하러 갔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늘상 가던 관광지와는 먼 한적한 주택가였다. 현지 애들 셋이 크리켓을 하고 있었고, 그 옆 한 쪽에는 남루한 누더기를 뒤집어 쓴 한 노인이 계셨다. 거의 반쯤 눕다시피 해서 벽에 기댄 모습이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수행자로는 안 보였다. 머리가 산발을 하기는 했지만 소똥은 안 묻은 것 같았고, 무엇보다 얼굴에 물감칠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 유니폼 격인 주황 천쪼가리도 없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사기칠 일 없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나는 내심 반가웠다. 사실 평범한 인도 할아버지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무척 재미 있다. 인도 할아버지들에겐 저마다의 삶의 철학이 있는데,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별의 별 얘기가 다 나온다. 물론 그 할아버지는 내가 지금껏 만났던 다른 할아버지들과는 좀 달라 보였다. 누더기를 걸친 모습에선 그 이상의 것이 기대되진 않았다. 노인은 그렇다고 내게 구걸을 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연세를 잡수셨다기 보다는 당신도 모르게 세월을 정통으로 맞아버린, 가난하고 무기력한 노인으로만 보였다. 나로선 그냥 괜한 호기심이 들어 조용히 옆으로 가 일단 앉아봤다. 마침 걷다가 쉴 때도 됐다. 노인에게 용무가 있던 건 아니므로 먼저 말을 걸진 않았다. 나란히 앉아 크리켓 하는 아이들만 구경했다. 그런데 노인이 먼저 나를 보며 뭐라고 중얼대기 시작했다.


이전에 ‘짝퉁’ 수행자들이 읊어주던 이른바 ‘축복의 주문’과는 달랐다. 다만 영어가 아닌 힌디였어므로 알아먹을 수 없었다. 알아듣지 못 하겠다는 시늉을 수어로 해보였다. 그런 나와 노인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아이들은 크리켓을 멈추고 킥킥대며 다가왔다. 그 중 한 아이가 노인의 말을 통역해줬다. 


“형한테 불안과 걱정이 가득해 보인대요. 할아버지가 그 불안을 다 없앨 방법을 알고 있대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잖아도 당시 나는 한창 고민과 걱정이 많을 때였다. 인생의 방향에 대해서도 그렇고 여행에 대해서도 그렇고. 워낙 쉽지 않은 고민을 할 때라 잠도 쉬이 못 잘 정도였다. 그런 날더러 불안이 가득해 보인다니. 정곡을 제대로 찔린 기분이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섣불리 믿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랬다간 솜씨 좋은 사기꾼에게 당하기 십상이다. 이 노인이 아무리 겉으로는 남루해 보여도 왕년에 사람 꽤나 속여먹은 실력자일 수도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꾸밈 없는 누더기를 걸친 그의 모습은 이 노인이야말로 속세를 초월한 진정한 수행자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무릇 진짜 속세를 초월했다면 '복장'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킥킥 대는지는 도무지 모를 따름이었지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그 방법이 뭐냐고 물어봐 달라고 했다. 그런데 잠시 후 노인의 대답이 나오자, 아이들은 다시 한 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불안의 원인은 네가 목에 메고 있는 카메라와 네 주머니 속에 든 돈을 잃어버릴까 하는 걱정에서 나와. 그것들을 모두 나한테 줘. 그럼 그것들로부터 생기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어.”


구체적인 통역에 아이들은 기이한 소리까지 내며 다시 한 번 배꼽을 잡았다. 노인은 굴하지 않고 주문을 외듯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그 말을 반복해 중얼대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을 꾀는 유혹의 마법 주문이라도 외는 것처럼 말이다. 허나 내심 잔뜩 기대했던 나로선 그 저의를 단박에 이해하지 못 했다. 아이들이 왜 웃어대는지는 모를 노릇이었고, 나 혼자만 머릿속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한 몇 초 정도 생각하니 이해됐다.


쓴웃음이 나왔다. 결국 그 노인도 다른 수행자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돈 달라는 말을 참 거창하게도 표현하셨다. 그런 식의 표현은 인도인들이 돈을 목적으로 사기 치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좀 더 앉아서 농담을 주고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일어났다. 기가 차는 것도 그거지만, 보기 좋게 속을 뻔했다는 데에 꽤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껏 나는 한 번도 인도에서 사기 당한 적이 없는데, 이 할아버지에게 당할 뻔 했으니. 무엇보다 실제 그때 내가 하던 걱정과 불안은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 없었다. 이제 인도 여행도 꽤 익숙해졌고 인도라는 사회가 별로 도난 문제는 없어서, 그런 건 걱정 축에도 못 꼈다. 


아무튼 그 노인에 대해선 얼른 잊었다. 사기 피해의 직전까지 갔던 그런 껄끄러운 경험은 얼른 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결국 인도 여행을 어렵게 만드는 건 겉으론 쉽게 구분되지도 않는데도 이렇게 뻔뻔하게 돈을 '갈취하는' 사람들이 주된 원인이었다. 나야 다행히 직접적으로 돈을 뜯기고 사기 당한 경험이 없었지만, 실제로 큰 돈을 사기당한 사람도 많았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인도에 대해 학을 떼어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야 그 노인이 다시 떠오른 건, 수개월이 지난 뒤 아프리카에서였다.




인도를 떠난 이후 나는 아프리카를 종단 여행했다. 육로로 이집트에서 남아공까지. 총 6개월이 걸린 여정이었다. 아프리카 여행은 쉽지만은 않았다. 인프라가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문제였다. 아프리카는 어느 나라를 가건 도둑과 절도 문제가 보편적이었다. 현지인도 대놓고 걱정하고 경고할 정도였다. 실제로 두어 번 핸드폰도 소매치기 당했고, 케냐에 있을 땐 오토바이족 청년들에게 아끼는 모자를 소매치기 당했으며, 말라위에선 내 목에 걸린 카메라를 훔쳐가려던 강도에게 죽빵까지 맞았다. 


사실 크게 두렵진 않았다. 내 옷을 다 벗겨가면 한 천원 주고 중고 매장에서 새로 사면 그만이었고, 선글라스를 가져가면 까짓것 맨눈으로 다니지 뭐. 죽빵을 한 대 더 때리면 까짓거 우리 피부에는 회복력이 있으니 상관 없었다. 여행자 보험도 잘 들어놨고. 사람을 죽이거나 크게 다치게 만들면 지들도 곤란하니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 하지만 카메라라면 얘기가 달랐다. 비싸서는 아니었다. 어차피 여행 직전에 급히 중고로 산 싸구려다. 다만 그 안에 저장된 지난 10개월 간의 여행 사진은 무엇으로도 대체가 안 됐다. 그건 내 추억과 과거를 빼앗기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카메라를 도둑맞는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심장이 덜덜 떨렸다. 


숙소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에티오피아에 묵을 때 숙소 매니저는 청소 직원들이 종종 훔쳐가는 경우가 있고, 자기들도 그걸 막을 순 없으니, 귀중품은 늘 몸에 지니라 했다. 하지만 늘 갖고 다니는 것도 능사는 아닌 게, 길거리에서 도둑을 만나면 빼앗기기 십상이다. 내 카메라는 고작 10만원 정도밖에 안 하는 싸구려지만, 아프리카 도둑이 그걸 알리는 만무하다. 그래도 내겐 그게 최선이었다. 숙소에 놓고와 전전긍긍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들도 다니는 게 나았다. 어찌 되었든 어떻게 해도 내겐 '완전히' 안전한 길은 없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에 있던 6개월은 내내 도둑 걱정을 안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밥을 먹을 때나, 산책을 할 때나, 심지어 잠을 잘 때마저 도둑과 강도를 걱정해야 했다. 하루 24시간 6개월을 그렇게 살아본 사람이 계실 줄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긴장과 걱정이 극에 달하다 보니, 문득 나도 모르게 인도에서 만났던 그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가 단지 내게 돈을 뜯기 위한 수법으로 그렇게 말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제 이런 상황에 놓여보니, 제법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나를 두렵고 불안하게 만든 건 그의 말대로 가진 것을 잃을까 하는 그 마음이 원인이었다. 만약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이 사라진다면 애당초 불안도 생기지 않을 수 있었다. 

상황은 불안하지만 쓴웃음이 나왔다. 인도에 있을 땐 5초 정도 만에 그의 말을 이해한 줄 알았지만, 정말 깊이 이해하는 데에는 8개월도 더 걸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나는 쉽사리 가진 것들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미 가진 것을 버리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더라. 문득 그때 그 노인에게 정말로 내 카메라를 줬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들었다. 여행 사진은 찍지 못 했겠지만, 잃어버릴 사진들도 없으니 여기서 이렇게 불안해할 일도 없었겠지. 나중을 생각하면 아쉬울 지 몰라도, 도난에 대한 신경증을 달고 살던 당장은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역시 노인이 내 앞에 없기에 할 수 있는 신세 좋은 생각이란 걸 나는 알았다.




그렇게 어느덧 종단의 종착점까지 왔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아프리카 다른 나라와 다른 도시에 비하면 안전한 곳이라 했다. 실제로 한 며칠 지내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게다가 꼭 그게 아니라도, 이제 며칠 뒤엔 1년에 걸친 이 여행도 끝내고 그만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래저래 나도 모르게 긴장이 꽤 풀렸다.


하루는 근처 바닷가에 산책을 갔다. 해변을 거닐다 골목에 예쁜 카페가 있길래 들어갔다. 커피 한 잔 시켜두고 평소와 다르지 않게 잠깐 화장실도 다녀왔다. 화장실은 창고를 개조한 것 같았는데, 컴컴한 분위기가 지금도 기억난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커피가 나와있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커피는 특별하니 사진을 찍으려는데, 카메라가 없었다. 


화장실에 두고 온 건가 싶었다. 그러나 화장실에도 없었다. 카페 직원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모른다고만 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여행하던 지난 1년간 단 하루도 몸에서 사진기를 뗀 적이 없다. 의도적으로 사진기를 챙기지 않아도, 1년 동안 배인 습관으로 사진기는 내 무의식이 반드시 챙겼다. 그 습관이 어디 갔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사진기가 없었다.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등골을 스쳤다. 부리나케 카페 밖으로 나가 여기 저기 구석구석 다 뒤져봤다. 쓰레기통도 열어봤다가 골목골목 다 훑고 저 앞에 바닷가까지 다시 나가봤다. 그러나 역시 아무데도 없었다. 그걸 갖고 달아나는 사람마저 안 보였다. 카메라는 마치 그것이 애당초 없던 물건인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승점 바로 앞 구간이 사고가 가장 잦은 구간이라던가. 여행의 마무리를 코앞에 두고 크게 방심한 것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니 격앙됐던 마음은 금방 안정 됐다. 일단 하는 수 없으니 카페로 돌아왔다. 커피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 낯선 마을에서 사진기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한국에 돌아갈 날도 나흘밖에 안 남았는데 경찰에 신고하고 어쩌고 하느니,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사진기를 잃어버린지 채 삼십 분도 안 돼서 현실을 받아들였다.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1년의 매 순간을 함께 한 카메라는 그렇게, 여행의 막바지에서 좀도둑에게 황당하게 도둑 맞았다고. 혹은 그렇게 영영 사라졌다고. 말라위에서 주먹에 얻어맞으면서까지 지켜낸 카메라가. 탄자니아에선 벽에 부딪혀 박살나 가까스로 다시 조립했던 그 사진기가.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쁘고 홀가분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지난 1년 간 나는 모든 순간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살아왔다. 물론 사진을 찍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매번 사진 찍는 게 번거롭기도 했고. 그러나 당장 손에 카메라가 쥐어져 있으니 그러기가 쉽지 않더라. ‘견물생심’이란 말은 진리였다. 인도에서 노인에게 카메라를 주지 않고 내가 갖고 있는 한, 말라위 강도의 완력에 빼앗기지 않았던 한, 나는 그로부터 자의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고마운 도둑 님이 카메라를 훔쳐가 준 덕분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강박으로부터 최초로 독립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나로서는 더 할 나위 없이 기뻤다.


물론 여행은 아직 나흘 남았다. 그러나 그 기간은 정말 사진을 찍지 않아도 괜찮았다. 찍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아쉽지도 않았다. 가진 게 없으니 이제 더는 도둑맞을 걱정도 안 해도 됐다. 지난 1년 간의 여행, 6개월 간의 아프리카 종단 동안 한 번도 누린 적 없는 마음의 자유였다. 그렇게나 걱정하던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그때 나는 감히 법정스님이 설파하신 ‘무소유’가 이런 건가, 싶은 생각도 진지하게 들 정도였다. 





다시 인도에서의 노인 생각이 아니 날 수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진정한 수행자였던 것이다. 진작 그의 말대로 했었더라면 나는 좀 더 빨리 이 무소유의 황홀함을 알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또 모른다. 그가 진정한 수행자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에 맞아 떨어진 사기꾼인지. 그 여부는 나로선 알 수 없다. 결국 그건 그의 '의도'를 알아야 하는 문제인데, 모든 '의도'란 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타인으로선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노인이 덜컥 내 앞에 나타나 ‘이게 진실이야!’라고 말해도, 내가 불신으로 일관한다면 내게 그것은 진실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본래 보편적 진실이 아닌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결국 우리는 어떤 것의 '실체'를 영영 알 수 없다. 오히려 모든 건 자신이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믿느냐에 달린 문제다. 그 노인을 '사기꾼'이라고 계속 생각한다면 내 인도 여행은 '사기 당할 뻔한 여행'이 될 것이고, 실제 그의 의도와 관계 없이 '진정한 수행자'라고 믿는다면 나는 배운 게 많았던 여행을 한 게 되는 셈이다. 실제 인도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다.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분명 그 노인은 내 사고방식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변화와 가르침을 줬다. 가진 것이 많으면 걱정이 많아지고 불안해 진다는 것을. 삶에 부담 가는 수준이 아니라면, 적게 가질 수록 더 삶은 쉽고 가벼워진다는 것을. 어쩌면 우연히 그런 노인을 만날 수 있던 것도 내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축복을 주던 낯선 수행자들 덕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언젠가 다시 인도에 간다면 그때 나는 주머니에 얼마를 넣고 다녀야 할까. 언젠가 그 노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과연 나는 수업료로 카메라는 물론이고 주머니에 든 돈을 다 줄 수 있을까? 과연 그때는 그럴 용기가 있을까. 어떻게 되든 좋다. 그저 언젠가 다시 바라나시를 찾았을 때, 그 노인을, 아니 그 ‘수행자’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좋겠다.


* 이후 나는 여러 차례 바라나시를 다시 갔고, 노인을 만났던 곳을 몇 번이나 다시 방문했지만, 그를 만나지 못 했다. 노인이 누워있던 벽은 늘 비어 있었고, 크리켓을 하던 아이들도 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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