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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Jan 11. 2022

#3 숙소 예약도 없이 여행을 떠나면 생기는 일

결국 망하라는 법은 없다

여행은 낯선 곳으로 가는 일이다.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때론 길을 잘 모르는 곳, 어디가 맛집인지 모르는 곳, 때론 말도 통하지 않고, 도대체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두렵다. 뭐가 나올지 모르고, 뭐가 어떻게 될 지 전혀 알 수 없기에. 하지만 인생이란 결국 어떻게든 흘러가게 마련이니, 여행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이제 삼 주 정도 되었다. 보름 정도 머문 라오스를 떠나는 날이었다.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여행지는 남부의 시판돈이었다. 출국 루트는 간단했다. 행선지는 태국이었고, 멀지 않은 곳에 육로 국경이 있었다. 라오스 쪽 여행사에 돈을 주면 그들이 알아서 다 해결해준다고 했다. 시판돈 읍내에서 국경까지 라오스 버스로 데려다주고, 가이드가 국경까지 같이 건너주며, 태국 쪽으로 넘어와선 인근 도시까지 가는 태국 버스까지 태워주는 경로. 현지에서 만나 같은 루트로 이동하는 유러피언 여행자들도 있었으니, 문제가 생기면 그들과 함께 하면 되었다. 물론 그들이 날 지켜주리란 보장은 없는 거지만. 


여권과 현금도 가방 안쪽에 잘 있었고, 버스 티켓도 얼마 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라오스 국경은 잘 벗어났다. 나가는 사람에겐 아쉬울 것이 없다. 그런데 국경을 넘어 태국 쪽에 입국할 때 문제가 생겼다. 모든 문제는 내가 해외 여행이란 것을 난생 처음 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다. 나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모르는 놈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아무래도 숙소다. 일단 잘 곳이 분명해야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여행까지 가서 노숙을 할 순 없으니, 잘 곳이 분명하지 않으면 일단 마음이 두렵다. 만약 내가 오늘 경주로 여행을 가는데, 경주에 아무 숙소도 없으면 어쩌나? 하지만 나는 난생 태어나서 처음 여행을 해보는 것이었으므로, 그 간단한 사실조차 몰랐다. 출입국 사무소를 지날 때도 여권과 비자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입국장을 지날 때 작성해야 하는 서류에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적혀 있었다.


"오늘 태국에 들어오면 어디서 지낼 겁니까?"


글쎄. 나로선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물음이었다. 하지만 왜 그걸 묻는지 모르는 건 나 뿐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느 나라를 여행하건 '숙소가 어디냐?'라는 건 출입국 사무소에서 거의 항상 듣는 질문이다. 이런 것도 확인하지 않고 아무나 들여보내면 그가 현지에서 노숙자나 부랑자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딴에는 그런 걸 미리 준비 안 한 이유도 나름 있었다. 지난 3주간 베트남과 라오스를 여행해 보니, 도시 간 이동할 때 예약을 하지 않았어도 숙소는 어떻게든 구하게 되더라. 세상 어느 도시건 특정 날짜에 그 도시에 있는 모든 숙소가 다 꽉 차는 일이란 없는 것이고, 억만 분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웃돈을 주고 거실 같은 데서 대충이라도 재워달라면 누군가 한 명은 재워줄 것이다. 또 숙소를 미리 찾아 예약하고 가는 것보다는 현지에서 발품 팔아 구하는 게 더 여행답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굳이 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묻는다니. 


빈칸으로 뒀다. 만약 출입국 직원이 왜 빈칸으로 뒀냐고 물어오면 '태국 들어가면 동네 구경하면서 천천히 구할 건데요? 어디든 잘 곳은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상황이 닥치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왜 숙소 칸은 채우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어 오는 태국 출입국 직원의 표정에서, 나는 그가 대단히 깐깐한 사람일 거라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말 실수를 하거나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한다면 입국을 단호히 거절할 것 같았다. 재도전할 기회도 없이 나를 블랙리스트에 넣어 버릴 것 같았다. 단순 출입국 직원에게 그럴 권한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뭐라도 말을 지어내야 했다. 있어 보이는 말. 하지만 당황해서 머리가 하얘졌다. 뭐라고 말은 했을 테지만,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당황한 내 마음에서 아무 거나 튀어나온 거였다. 나도 내가 뭔 말을 하는 줄을 몰랐고, 출입국 직원도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뒤에 다른 여행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는 날더러 머물 숙소를 똑바로 적은 뒤에 다시 줄을 서라 했다. 다행이다 생각했다. 


내겐 보루가 있었다. 지금은 21세기고, 21세기의 특징은 정보의 활용이 매우 자유롭다는 점이 아니던가. 데이터 유심칩은 없지만 이 정도 현대화된 국경이면 분명 와이파이가 터질 거였다. 아무리 인터넷이 느려도 구글에 대충 도시 이름을 넣으면 아무 숙소라도 하나 나오겠지. 대합실 좌석에 앉아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초장부터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아찔하게 스쳤다.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도 핸드폰이 없었다. 옆주머니 뒷주머니 다 뒤져도 없었다. 핸드폰은 늘 거기만 넣어서 그건 무조건 거기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에 달고 있던 색까지 다 뒤졌다. 그런데도 없었다. 두툼한 범퍼 케이스를 씌워놔서 꽤 묵직하고 커서 눈에 안 띌 리가 없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배낭에 넣은 적은 결고 없는데도 배낭까지 뒤집었다. 배낭에서 수건이며 옷가지며 속옷 같은 것들이 나오니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런데도 없었다. 그제서야 불길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버스!


라오스 마지막 도시에서 여기 국경까지 올 때 봉고차처럼 생긴 버스. 창밖 풍경이 좋아 나는 조수석에 타고 왔다. 창문을 열고 핸드폰으로 바깥 사진도 막 찍어댔고, 또 급하게 찍어야 할 풍경이 나올지 모르니 핸드폰을 조수석 문짝 포켓에 넣어놨다. 그런데 라오스 쪽 출국 도장을 받으려 내릴 때 그걸 거기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생각나는 건 그거 밖에 없었다. 거기 놓고 온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버스가 떠나기 전에 가져와야 했다. 쏟아놨던 짐들을 대충 배낭 안에 욱여넣었다. 배낭을 대충 한쪽 팔에 걸쳐 메고 이미 출국 도장을 찍고 나온 라오스 방향 국경 철책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당시 경황이 없어 내 모습을 보지 못 했지만, 그건 가히 당황스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마치 재난을 피하기라도 하듯 배낭을 대충 짊어지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동아시안 얼굴의 낯선 남자.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내가 달려오던 쪽에서 성난 호랑이라도 좇아오는 줄 알았을 것이다. 철책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은 벌떡 일어나 나를 막아세웠다. 사정을 설명하니 얼른 갔다 오라며 들여보내줬다. 국경은 넓었다. 거대한 면세점도 있었고, 주차장까지 꽉차 다른 차들은 노지 곳곳에까지 산개 되어 있었다. 그 많은 차들은 가히 이천 대는 되어 보였다. 아무리 찾아도 내가 타고 온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옛날 윌리를 찾아라처럼 모든 차들이 똑같이 생겨먹어서 뭐가 우리 찬지 구분되지도 않았다. 희망은 티끌만큼도 안 보였다. 


보통 우리는, 누군가 이런 상황에 처하면 패닉에 빠질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극도로 이성적인 인간이 되었다. 아마도 생존 본능,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 지 머리가 더 현실적으로 약삭빠르게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이성적 판단은 오직 하나의 결론만 내고 있었다. 그 결론은 의심의 여지 없는 진실이었다. 


'이 넓은 곳에서 그 버스와 핸드폰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긴 시간을 들인다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시간도 문제였다. 좀 전에 철책 군인에겐 분명 '금방 다녀온다'고 말했는데 금방 안 돌아가면 나를 불법 입국한 부랑자로 의심할 것 같았다. 또 라오스에서부터 함께 온 이들이 태국 국경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핸드폰도 잃어버린 마당에 그들마저 나를 놓고가면 나는 정말이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거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랬다. 아무런 대책은 없지만 일단 다시 태국 입국 사무소로 달려갔다. 


무섭게 생긴 직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찾지 못 했으므로 우본 랏챠타니라는 저 국경 도시에 어떤 숙소가 있는 줄을 여전히 모르고, 여전히 빈 칸을 채울 수 없었다. 다만 기지를 발휘했다.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아주 쉽고 간단한 영어 단어로 이루어진 아무 호텔 이름을 적어냈다. 그래도 오기 전에 지도로 봤을 땐 이 우본이란 그래도 꽤나 큰 편이라, 이 출입국 사무소 직원 한 사람이 우본에 있는 모든 숙박 시설 이름을 다 알리란 없어 보였다. 솔직히 그걸 다 안다는 게 말도 안 되잖은가. 인천 공항 출입국 직원이 어떻게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숙소 이름을 죄다 알겠는가. 대충 말하면 대충 보내주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직원은 우본 랏차타니라는 도시의 토박이도 보통 토박이가 아니었다. 


"우본에 그런 숙소는 없는데?" 


그는 딱잘라 말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몇 없다. 단호한 말을 하고 싶어질 때면 누구나 '과연 내가 아는 것이 정말 전부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그 생각이 입을 막아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을 단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말 제대로 아는 사람' 뿐이다.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 앞에서 입이 다물어지는 까닭은 그 단호함 때문이 아니라, 단호함 뒤에 숨겨진 그의 의심 없는 확신 때문인 것이다. 


절망스러웠다. 이렇게 내 태국 입국은 좌절되는 건가. 다시 라오스로 돌아가야 하나. 라오스에 가서 왜 다시 돌아왔냐고 하면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라오스에서도 내가 수상한 놈처럼 보여 입국을 안 받아주면 어쩌지. 그럼 나는 이렇게...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핸드폰도 없이 국제 미아가 되는 건가... 이렇게 1년 하려고 준비한 내 여행은 3주만에 끝나고 마는 건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직원의 다음 말이 나를 구워했다. 


"그럼, 내가 하나 알려줄 테니까 오늘은 거기 가서 묵어. 도쿄 호텔이야."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날 나는 도쿄 호텔에 가지 않았다. 이름만 들어도 비쌀 것이 뻔해보여서 그냥 길가에서 발견한 평범한 여인숙에 묵었다. 우본에는 큰 볼 일이 없었다. 단지 국경이고 도착한 것이 저녁이니 머물렀을 뿐이다. 그래도 날이 밝자마자 떠나자니 아쉬웠다. 하루 정도 둘러볼 수는 있을 것 같아서 기차표는 다음 날 저녁에 출발하는 것으로 끊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도시 구경이나 하다 갈 작정이었다. 다만 문제는 정보를 찾아볼 수 없으니 어딜 가야 하는 줄을 몰랐고, 그걸 찾기도 전에 뭐가 있는 줄도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하물며 아침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핸드폰이 없으니 나는 모든 정보로부터 제한됐다. 말이 통하는 사람도 없었고, 어디가 맛집인지 찾을 수도 없었다. 나는 전적으로 현지에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다. 다행히 아침에 숙소 앞에서 만난 현지인 아주머니에게 손짓 몸짓을 해보이니 식당 하나를 알려줬다. 그런데 이번엔 그 식당이 문제였다. 참고로, 우본이란 도시는 태국 안에서도 관광 도시로 꼽히는 곳은 전혀 아니다. 관광객을 보기란 거의 어렵고, 그만큼 여행 인프라도 갖춰져 있지 않다. 내가 그 날 아침에 찾은 그 식당도 지극히, 지극히 지극히 로컬이었다. 그래도 태국에는 팟타이나 쏨땀 등 우리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이 많다고 알려졌지만, 그 식당은 그 중에서도 로컬이었다. 


우리로 치면 한식 뷔페같은 집이었다. 메뉴는 간단했다. 매대에 뷔페처럼 현지 야채 반찬이 죽 늘어져 있고, 그 중에서 3개를 골라 먹는 식이었다. 매대에 아크릴 관이 씌워져 있어서 냄새는 맡지 못 했다. 그래도 야채란 것이 거기서 거기겠지, 하는 마음으로 세 개를 골랐다. 이내 하나의 큰 접시에 쌀밥과 세 반찬이 함께 나왔다. 나도 나름 얕본 게 이제 동남아 여행도 어느덧 삼주차에 접어들었겠다, 내 입맛이 동남아에 맞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껏 나는 그냥 '관광지'만 다녔을 뿐이더라. 내가 직접 고른 그 야채 반찬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도저히 이건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란 걸 분명히 알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고른 그 반찬들은 죄다 향이 강한 야채였다. 어떻게든 먹어보려 했다. 하지만 이걸 다 먹는 건 아무래도 비현실적이었다. 한 세네 번 시도 했는데 정말 고역이었다. 하지만 일찌감치 포기할 건 없었다. 내게는 최후의 보루가 있었다. 라오스 남부에 도착하던 첫 날, 우연히 버스에서 한국인 여행자를 만났었다. 그는 이제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며, 혹시 몰라 가져왔던 튜브형 고추장을 내게 줬다. 그도 그걸 한 번도 쓴 적 없도 나도 받긴 받지만 절대 쓸 일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나 내게나 동남아 음식은 입에 잘 맞았으니까. 나는 고추장을 비비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고추장 향이 워낙 강한 편이니 우리도 애매할 땐 일단 고추장에 뭐든 다 비비고 보지 않던가. 하지만 아니었다. 태국 야채의 향신료는 소고기까지 볶은 태양초 고추장로도 이길 수 없었다. 


사면초가, 사면태향에 빠진 기분이었다. 온 사방에서 태국 야채의 괴상한 향내가 풍겨왔다. 그렇다고 이 야채를 아예 안 먹는 건 현지 음식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럴 수는 또 없었다. 벌써 입을 댓는데 메뉴를 바꾼다는 건 말도 안 됐으며, 새 메뉴를 시키자니 가난한 배낭여행자인 내겐 그럴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오늘 아침 배는 무조건 이걸로 채워야 했다. 그때 다시 내 이성은 발동됐고, 번뜩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한국에서도 자취할 때 즐겨 쓰던 방식이다. 어떤 음식이든 아무리 못 먹겠어도 기름에 튀기거나, 볶거나, 하여튼 고온에 조리하면 먹을만 해진다. 대부분의 식재료는 가열되면 마이야르 반응으로 맛이 좋아진다. 그래서 처음 내게 주문을 받고 이 메뉴도 갖다 직원에게 부탁했다. 이것 좀 볶아줄 수 있냐고.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내가 태국어를 할 줄 모르니 부득이 암묵적 세계 공용어로 쓰이는 영어로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태국어를 미리 공부하고 오는 게 맞는 거긴 하다. 하지만 짧은 여행에선 대개 그냥 핸드폰 통역 어플을 쓰고 나도 그러려고 했었다. 하지만 어제 국경에서의 일로 인해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직원은 영어를 쓰지 못 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나름 식당에서 일하고 요리를 좀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꼭 말이 통하지 않아도 대충 제스쳐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막 밑에서 불이 나오고 위에서 기름을 두르고 웍질을 하는 손짓을 했다. 그 정도면 누가 봐도 볶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직원'이라기 보다는 부모님 가게를 잠깐 대신 봐주고 있는 듯했던 그 여중생 같은 직원은 아무래도 못 알아먹었다. 요리가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뭐라고 하든 그 아이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결국 이른 아침부터 태국의 소도시 현지 식당에서 진풍경이 펼쳐졌다. 도저히 현지 음식을 먹을 순 없지만 말도 통하지 않아 고추장 범벅한 요리를 볶아 달라고 바디 랭귀지로 어떻게든 표현하려는 나와, 뭐라고 하는지 도통 이해 못 하겠다는 현지 학생 직원. 나는 어떻게든 이 학생에게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손짓 발짓하던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열렬히 손짓 하는 나를 외면하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어머니나 아버지나 진짜 사장님이 들어오신 건 아니었다. 현지의 평범한 중년의 아주머니 손님이었다. 어떤 영문인지 몰랐던 나는 갑자기 이 직원이 나를 놓고 저리 달려가니 얼떨떨했다. 둘은 태국 말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이내 그 손님은 마치 그 직원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한 태도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는 영어를 잘 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이 직원의 정체는 내 예상대로 인근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부모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서빙만 하면 되는 메뉴만 팔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아주머니는 그 학생이의 담임이자, 그 학교의 영어 선생님이었다. 학생 입장에선 외국인이 영어로 뭐라 뭐라 말을 거는데 알아먹을 수가 없어 난처한 찰나에 학교 영어 선생님이 등장하셔서 대번 도움을 청하러 간 거였다. 아무튼 그 덕분에 문제는 잘 해결됐다. 하지만 학생이 요리를 할 줄 모르기에 볶지는 못 했고, 외국인도 먹을 수 있는 국물을 내어줬다. 


우여곡절 있었지만 덕분에 아침 식사는 잘 마쳤다. 식당을 나서기 전에 그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갔는데, 외려 그가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 태국의 작은 도시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외국인과 진짜로 만나 영어로 대화해본 적은 처음입니다. 내가 배우고 아는 만큼 영어를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과연 내가 회화에 정말 맞는 영어를 하는 건지 이 나이가 되도록 늘 의문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런 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은데, 혹시 괜찮다면 오늘 내가 이 도시를 관광 시켜줘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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