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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May 06. 2024

0.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여행은 시작된다.

프롤로그

인도 서부의 우다이푸르.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별 특별할 것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동네 크기가 작았으므로 드문 드문 한국인 여행자들을 마주쳤다. 그러다 한 번은 믿기 힘든 일이 있었는데, 거리에서 우연히 대학 선배를 마주친 것이었다. 같이 교양 수업을 듣던 학부 선배였다. 평소 오고 싶었던 인도를 어렵게 휴가내어 지인과 함께 온 것이라 했다. 학교 다닐 때 친한 선배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만나니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마침 나도 특별한 일정은 없었던지라 그들과 일행이 되었다. 인도가 처음인 선배는 계획을 아주 알차게 짜왔다. 그런 선배를 따라다니며 덕분에 무료하던 여행의 나날이 다채로워졌다. 같이 다니는 게 아쁘지 않았으므로, 우다이푸르 이후의 일정도 함께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문제는 우다이푸르를 떠나던 순간 생겨났다. 아니, 어쩌면 떠나기 전날부터 예정된 문제였다. 우리의 행선지는 우다이푸르에서 버스로 대략 5~6시간 정도 떨어진 옆도시 ‘조드푸르’였다. 선배 일행은 버스를 타기 하루 전에 미리 시내의 여행사에서 티켓을 구매했다. 선배는 인도가 처음이지만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여행한 상태였다. 인도 여행에 잔뼈가 굵었고, 선배가 티켓 사는 걸 옆에서 도왔다. 하지만 정작 나는 버스표를 사지 않았다. 같이 갈 게 분명한데도 그랬다. 선배는 내게 두 차례나 거듭 물었다. 


“너는 안 사? 어차피 같이 갈 거 아니야? 안 샀다가 자리 없으면 어쩌게?”

"미리 안 사도 자리 하나 정도는 있겠죠 뭐."


무슨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말한 까닭은 전적으로 내 성격 문제였다. 언젠가부터 나는 여행에 대해 작은 것 하나라도 계획한다는 것이 끔찍이 싫었다. 이유는 여럿이었다. 그중 한 가지는, 무릇 여행과 일상 사이의 차이는 ‘자유’에 있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일상은 자유보다는 의무로 가득 차 있는데, 그로부터 벗어나는 게 ‘여행’일 거라고 말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엄밀히 정해지고 그걸 늘 따라야만 한다면, 내게 그건 ‘여행’이 아니라 ‘일상’ 또는 ‘일’처럼 느껴졌다. 여행이라면, 무엇도 정해놓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처럼 아무런 계획 없이 여행다니는 게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여행지는 보통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잘 안 통하는데, 그런 곳에서 아무 계획 없이 움직였다간 불상사를 당할 수도 있다. 가령 그때 우다이푸르의 경우, 예매 없이 새벽에 버스를 타러 갔더니 정말 자리가 없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계획 없는 나라고 완전히 대책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도 그건 다 생각했다. 지금껏 여러 차례 여행해본 결과, 인도라는 나라의 특징은 안 될 것 같은 것도 어떻게든 된다는 것이었다. 인도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른바 ‘노 프러블럼 정신.’ 인도는 어떤 것이 규격과 기준을 벗어나더라도 끝내 길을 만들고야 만다. 아마 버스도 그렇게 풀어가면 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생각보다 험난한 법이다. 


이튿날 새벽 네 시, 선배 일행과 숙소 앞에서 만났다. 미리 예약한 택시가 와 있었고, 혹여나 늦을 새라 곧장 버스 회사로 향했다. 버스 회사는 시내에서 택시로 약 20~30분 벗어난 교외에 있었다. 선배 일행은 어제 예매한 버스표를 꺼내보였고, 나는 사무실 직원에게 현장 구매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설마가 나를 잡았다. 분명 자리 하나 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날은 완전히 만차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버스 회사는 내가 지금껏 알던 ‘인도’와는 전혀 달랐다. 웃돈을 더 주겠다고 해도 없는 자리가 생길 수는 없었고, 버스 천장에 앉아서 가도 좋다고 해도 안 통했으며, 사무실 한쪽의 작은 라탄 스툴을 운전석 옆에 놓고 가면 안 되겠냐 물어도 거절의 답만 돌아왔다. 그 버스 회사 직원은 너무나도 단호해서, 인도 총리가 와도 자리는 안 생길 것만 같았다. 결국, 선배 일행과 함께 다음 여행지까지 가기로 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늘 함께 다니던 내가 곤란한 처지가 되어버렸지만 선배에겐 또 그만의 일정이 있었다. 이 사단이 난 건 선배의 잘못이라곤 먼지만큼도 없고, 다 내 업보인 것이다. 버스가 시동을 걸었으므로 선배는 버스에 올랐다. 나는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채로 이 낯선 땅에서 다시 혈혈단신이 되어야만 했다. 거리는 여전히 어둠으로 가득했다. 시내에서 한참 벗어난 교외라 어디 문을 연 식당도, 갈 곳도 없었다. 버스를 어떻게든 타게 될 거라고만 생각했기에 내겐 플랜 B마저 없었다. 도저히 뭘 해야 할 줄을 몰랐다. 상황이 총체적으로 절망적이었다. 


보통, 이러한 변수가 얼마든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여행자는 필연적으로 일거수일투족을 계획하며 여행을 이어간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뭘 해야 할 줄을 모르는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인 것이다. 심지어 어렵게 시간 내서 온 휴가를 허송세월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니, 아무 것도 안 한 채 흘러가버리는 그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모른다. 결국 그런 일련의 일을 막으려면 계획을 철저하고 또 철저하게 짜야 한다. 하지만 그게 또 다는 아니다. 가령 우다이푸르의 그 새벽, 분명 절망적이어야 하던 그 순간 내게 도래한 감정은 절망도 아니었고 앞으로에 대한 걱정도 아니었으며, 어제 버스표를 예매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도 아니었다. 되레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선배는 버스 창문 너머로 여전히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마도 선배는 내가 애써 웃음을 지은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때 나는 순수하게 기쁘기만 했다. 심지어 그 기쁨과 웃음은 역설도 아니었다. 


————————


돌이켜 보면, 내 여행의 방식이 처음부터 그처럼 ‘무계획’으로 일관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위와 같은 상황이 두렵고 무서웠으므로 나도 체계적인 계획을 짜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여행은 꼭 계획대로 되리란 보장이 있지는 않다. 도리어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계획을 짜면 꼭 한두 번쯤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맞닥뜨리게 된다. 열심히 짜놓은 계획이 다 깨져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상황은 생각보다 빈번해서, 때론 여행 계획이란 것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진리로 느껴질 때도 있다. 다만 그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깨닫게 되는 한 가지 또 다른 진리도 있다. 모든 계획이 수틀러진다고 해서 여행이 무조건 망해버리는 건 아니라는 것.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여행은 어떻게든 굴러가게 된다는 것. 


모든 계획이 사라졌을 때 여행자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 하던 곳으로 가게 된다. 알지 못 하는 것들은 나를 불안하고 낯설게 만든다. 하지만 새로운 것들은 늘 한편으론 나를 설레게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결국은 ‘알지 못 하던 것들’을 만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일상이 ‘아는 것들로 이루어진 삶’이라면, 반면 여행은 ‘모르는 것들에 둘러싸인 삶’이다. 말이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이 없고, 반복되는 의무가 없고, 음식마저 낯선 곳. 낯설기 때문에 더 설렐 수 있는 것. 


아마 우다이푸르의 버스 회사 앞에서 느낌 기쁨의 원인도 그 때문이었지 않았을까. 지금껏 이런 저런 계획을 따라 다닐 땐 이것이 ‘여행’이 아니라 일종의 ‘일’이라거나 일상의 연장처럼 느껴졌는데, 모든 계획이 사라진 순간 나는 ‘알지 못 하는 것들’에 둘러 싸였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비로소 진정한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절망적이어야 할 순간에 피어난 역설적인 기쁨은 이제 내가 모르던 것들을 만나게 될 거라는 설렘을 안겼다. 오히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여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선배가 탄 버스는 나를 홀로 남겨둔 채 출발했다. 뭘 해야 할 줄도 모른 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나는 어둠 속을 배회하며 여러 버스 회사를 기웃거렸다. 다행히 한 회사에 조드푸르행 버스가 있었고, 딱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선배가 앉았어야 할 옆자리엔 우다이푸르로 출장을 왔다가 조드푸르 고등법원으로 복귀하는, 코가 피노키오처럼 컸던 판사 아저씨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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