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우리에겐 종교의 새로운 문법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건, 죽음과 세금이다.”
미화 100달러의 주인공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워낙 촌철살인으로 유명하여 이후 여러 예술가들이 이 말을 인용했다. 그런데 나로선 볼 때마다 어딘가 약간은 아쉬운 문장이다. 아무래도 하나만 더 추가하고 싶다. 피할 수 없기는 죽음이나 세금과 매한가지지만, 우리를 따라다니는 정도로치면 되레 그보다 더 지긋지긋한 것은 따로 있다.
‘번뇌’가 그렇다. 혹은 각종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나 떨어지지 않는지 정말 넌더리가 날 정도고, 아무리 피할래야 피해지지가 않는다.
산다는 건 끊임없는 고민과 번뇌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늘 이런 저런 문제를 던지고, 문제는 우리를 번뇌케 하며, 그 번뇌의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하나의 번뇌가 해결되었다고해서 완전한 평화가 도래하는 건 아니다. 번뇌가 끝난 상황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건 또 다른 번뇌다. 그 번뇌가 해소되면 또 또 다른 번뇌가 이어지고, 그 반복으로 살아간다.
가령 직장에 다니는 사람에겐 주로 회사내 인간 관계가 번뇌다. 그 번뇌는 퇴사로 해결 가능하지만, 대신 이젠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번뇌가 시작된다. 그 번뇌는 대출받아 자영업을 시작하면 해결되는데, 대신 사장으로서의 번뇌가 새로 등장한다. 사업을 잘 꾸려나가 경제적 자유를 얻어 그 고민도 해결하면, 이번엔 ‘남는 시간엔 뭐 하고 놀지?’라는 무료함의 번뇌 차례다. 노는 것도 어느덧 질리면 그 번뇌도 해결되는데, 그땐 또 ‘사는 건 무슨 의미인가?’하는 존재론적 번뇌가 시작된다.
결국, 인간은 아무리 번뇌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해도 그로부터 ‘영영’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갖은 노력으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해도 단지 번뇌와 고민의 ‘형태’만 달라질 뿐, ‘고민을 한다’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말의 교훈이, 당장의 번뇌를 벗어나봐야 소용 없으니까 그냥 자포자기하고 살란 것은 결코 아니다. 더 아름다운 삶의 태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언젠가 어차피 죽음을 맞는다 해도, 살아있는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삶인 것처럼 말이다. 또 아무리 세금을 피할 수 없어도 절세의 노력은 필요한 것처럼.
반면 이 말의 진짜 교훈은, 하나 하나의 번뇌에 일일이 허덕이는 건 그다지 현명한 처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어떤 고민과 번뇌가 찾아와도 두루 보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종의 마스터키를 갖는 게 더 슬기로운 삶의 처세라는 것이다. 딱히 비현실적인 말도 아니다. 요즘에야 세상은 갈수록 되레 더 복잡해지는 것 같지만, 우리 조상님들에겐 그런 지혜가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번뇌의 마스터키는 ‘종교’였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번뇌는 크게 둘로 구분 가능하다. 사람이 부단히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 손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 문제가 되는 건 당연히 후자다. 인류의 선조들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라는 걸 발명해냈다. ‘종교’란 한 마디로 ‘신을 믿는 것’인데, 설정상 ‘신’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를 일컫는다. 즉, 사람 힘으로 해결 못 하는 것들을 신에게 맡겨버리는 것이다. ‘신이시여, 제발 병에서 낫게 해주소서.’ ‘신이시여, 이번 시험에 꼭 붙게 해주소서.’ 이때, 누군가는 ‘신이 어디 있냐?’라거나 ‘그런 기도가 진짜 실질적으로 통하냐?’라고 딴지를 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의심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 진위 여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신과 종교는 애당초 ‘진실’의 영역이 아니라서 그렇다. 반면 ‘믿음’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기도를 할 때 진짜 소원을 이뤄달라는 것은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고, 진정한 효과는 ‘버팀’에 있다.
이를테면, ‘비가 올 때까지’ 제사를 지내기에 성공률이 100%에 달하는 인디언의 기우제처럼, 착실하게만 살다보면 언젠가 우연의 일치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날은 온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좌절하지 않고 그 날이 올 때까지 꾸준히 버티고만 있는 것이다. 왜, 현대 사회에서 성공의 가장 큰 비결도 ‘꾸준함’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 꾸준이라는 게 말처럼 쉽진 않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연약해서, 무언가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기만 하다보면 마음은 금세 절망감에 지배된다. ‘이번에도 안 될 거야’라는 좌절이 싹트기 시작하면 사람은 삽시간에 주저앉아버린다. 반면 신이 있건 없건, 기도가 통하건 안 통하건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고 하여간 무조건 믿는다면, 그러니까 인디언의 기우제처럼 ‘될 때까지’ 제사를 지낸다면, 그날이 올 때까지 버팀을 끌고 갈 수는 있게 된다. 동서양를 막론하고 우리 선조들은 그런 지혜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은 해가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2004년까지만 해도 아무런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43%에 불과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무려 과반을 훌쩍 넘는 63%로 늘었다. 즉,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신이나 종교에 기대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예전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신만이 아신다’라고 눙쳤는데 과학은 그게 아님을, 단지 과학적 원리에 의한 것임을 밝혀냈다. 예컨대 아프면 신이 아니라 의사가 치료해주고, 시험을 잘 보게 해주는 것도 100일 기도가 아니라 공부의 질과 양이라고 말이다. 바야흐로 니체가 선언한 대로 ‘신은 죽었다.’ 종교는 유명무실해졌고, 이제 세상 거의 모든 문제와 번뇌는 과학이 해결한다. 말하자면 번뇌의 두 종류 중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이 현저히 줄어들고,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 된 셈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이를 두고 세상이 예전보다 훨씬 더 발전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러나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모든 것엔 장단이 있다.
과학의 발달을 다른 말로 하자면 세상의 온갖 문제를 푸는 데에 더 합리적이고 정확한 열쇠들을 갖게 된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종교’가 가졌던 권위는 추락했으니, 이는 곧 그로부터 나왔던 ‘마스터키’라는 권위도 추락시켰다. 즉, 세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긴 했지만 더 이상 마스터키는 쓰지 못 하는 대가를 치루게 된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현대 과학이 탁월하다해도 세상 모든 비밀까지 다 밝힌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풀지 못한 문제들도 세상엔 여전히 많고, 심지어 일상 속에도 있다. 대표적으론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병에 걸렸다거나 일찍 하늘나라로 간 경우가 그렇다. 만약 고대의 종교인이라면 그런 것들도 별 문제가 안 되었을 거다. 일상 속 사소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냥 전지전능한 신에게 맡겨버리고 기도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그 ‘신’이라는 마스터키를 상실했으니, 그런 문제를 풀지 못 하게 되었다. 즉, 고대인에게 별 거 아니었던 문제 앞에 현대인은 되레 속수무책이다. 결국 인생의 몇몇 큰 문제들만 놓고보면 현대인이 고대인보다 더 현명하게 잘 살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오히려 고대인이 더 잘 살았던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이다.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 증거는 지금도 매일같이 타전되고 있다. 학자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를 일명 ‘우울 사회’ 또는 ‘불안 사회’라고 하던데, 공황장애와 우울증, 번아웃 등 각종 심리 질환이 해가 거듭할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번뇌가 창궐하다 못해 만성적인 상태가 되었다. 자살율도 날로 치솟는다. 실로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번뇌를 어쩌지 못 하는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나는 그 중 하나는 우리가 번뇌의 마스터키를 상실한 것, 그러니까 ‘종교’로부터 멀어진 것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이러한 진단이 마냥 절망적인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각한 문제의 실체와 그 원인을 직면한 점에선 절망적이지만, 원인을 알게 되었으니 비로소 처방이 가능하다는 면에선 매우 희망적이다. 말하자면 결국 종교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반대로 옛날처럼 종교를 가져버리는 되는 것이다. 일단 아무 신이라도 무조건 믿고 내 생의 모든 번뇌를 맡겨버리는 것.
이론대로라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이 엄청난 우울의 시대에 대한 극복은 비로소 가능할 거다. 그러나, 실제 우리 현대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가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분들도 그럴 거다. 만약 본인이 종교가 없는 사람이고, 인생의 각종 번뇌로 꽤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어도, 종교를 갖는다는 아이디어는 요원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그렇다. 어려서부터 꽤나 예민했던 성격 탓에 항상 우울 등의 심리 질환을 달고 살았으나, 종교에 대해서는 늘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거부감까지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종교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주리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아예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사실 ‘종교’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워낙 그렇다. 지금껏 우리가 알던 종교의 이미지는 아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단 어떤 교리 같은 것들에 대한 의무 쪽에 가깝다. 말하자면 누군가 종교가 있다고 말하면 ‘너 마음은 참 편하겠다’라는 생각은 대개 들지 않고, 되레 ‘지킬 게 많아 힘들겠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현대인은 사는 게 힘들어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종교를 갖지 않는다. 안 그래도 복잡한 현대사회, 어찌 거기다 작은 의무라도 하나 더하랴. 하물며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도 아니다. 그 외엔 뭇 종교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도 있다. 대개 종교는 기적 등의 비현실적인 요소가 잔뜩 결합되어 있는데, 현대인은 어려서부터 과학 등 합리적인 교육을 받아온 까닭에 그런 것들을 수용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조상 님께 제사를 잘 지내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건 사회에서 도덕의 모범을 보여야 할 종교가 그러기는커녕 부도덕한 짓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도 있다.
결국 현대인으로선 진퇴양난이다. 생활이 편해지려면 종교 하나 갖는 게 쉬운 해결법인데, 여러모로 납득되지 않으니 현실적으론 어렵다. 마치 기름과 물처럼 섞일 수 없는, 서로 모순 같은 관계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종교라는 것을 ‘전체로서’ 받아들이는 경우에 한한다. 반면 종교를 그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만, 그러니까 납득할 수 없거나 부담스러운 것들은 제하고 딱 합리적으로 이해되고 내게 필요한 부분만 사용한다면, 그럼 괜찮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는 실제로 그런 일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분명 종교가 없는 현대인이, 조금씩이나마 자기 삶에 종교를 들여놓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전부가 아니라 물가에서 발목까지만 담그는 것처럼 일부분만. 특히 불교에 대해 그렇다. 예를 들어 분명 자신의 종교는 없지만 유명한 스님이 쓴 책이나 유튜브 방송은 찾아서 본다던가, 지방에 놀러가거나 등산을 가면 그 근처의 절을 둘러본다던가, 마음에 답답한 고민거리에 있을 때 집 근처 절을 찾아가면 마음이 편해지거나 하는 경우들. 그렇다고 그들이 불자가 된 건 아니다. 종교가 없는데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무종교임에도 그렇게까지 한다는 건 번뇌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고자 하는 조용한 발버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그런 사람들에게 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냐고 물으면 대개 ‘강요를 하지 않아서요’라고 답한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종교가 없는 사람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애당초 ‘불교’라는 건, 우리가 아는 ‘종교’와는 많이 다르다.
개인적으로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나도 분명히 종교가 없지만, 인생의 각종 번뇌는 불교의 방식으로 해결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당연히 아니다. 이십대 중반 우연히 시작하게 된 불교에 대한 오랜 공부의 결과 그렇게 되었다. 내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사실 불교는 ‘종교’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많다. 불교는 인생의 번뇌를 신에 대한 믿음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다. 단지 모든 번뇌가 ‘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닦아 나가는 것이다. 되레 신이 아닌 그렇게 노력하는 ‘나 자신’을 믿는 것. 한 마디로 불교의 마스터키는 ‘믿음’이 아닌 ‘내 마음’에 있는 셈이다. 그게 불교의 본래 모습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불교가 아님에도 불교를 이용한다.
하지만 원칙을 중시하는 기존의 불교 신자에겐 이런 모습은 이상하게 보일 지도 모른다. 아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무슨 종교를 그렇게 반쪽으로만 하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럴 거면 그냥 본격적으로 불교가 되면 되잖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아무리 불교의 원래 모습이 저렇다고 해도, 현대 사회의 불교에는 기적이라거나 신앙, 기복 등의 요소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아마 불교에 호감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런 부분들이 아닌,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싶기에, 굳이 불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 것이리라. 최소한 나는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렇게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편안해졌는데, 왜 굳이 옛날 방식으로 ‘종교’라는 걸 가져야 하는 가 싶다.
어쩌면 오히려 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왜 그런데도 불교가 되진 않느냐’가 아니라, 이렇게 반쪽으로만 이용하는 것도 현대 사회에 맞는 새로운 종교로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시대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니만큼 우리에겐 종교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새로운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무교는 무교인데, 다만 ‘불교에 가까운 무교.’ 완전히 귀의하고 헌신하는 것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세속적인 삶과 함께 하는, 부담스러운 군더더기는 쫙 빼고 행복을 위한 알맹이만 남긴, 무종교인을 위한 마음의 종교. 혹은 그냥 처세술.
우리에겐 종교에 대한 새로운 문법이 필요하다. 무종교인이 종교를 써먹는 방법. 여기선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