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교가 성욕을 극복하는 신박한 방법

#1. 불교에 가까운 무교

by 타와의 철학

2000년대 초반, 몇 권의 책이 전국 청소년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 일이 있었다. 당시 어른들은 잘 몰랐을테지만 하여간 학생들에겐 그랬다. 그 일련의 책들은 만화책이었고, 제목은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다만 내용이 뭇 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림이 원인이었다. 당시 도서의 그림을 담단한 건 만화가 홍은영 선생이었는데, 그 그림체가 정말 어마어마했다. 남성 캐릭터든 여성 캐릭터든, 만화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이 가장 이상적인 외모와 육체로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들은 어린 학생들에겐 ‘매력’이란 단어의 현현이었다.


물론 요즘 10대는 어린 나이로 여겨진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따진다면 마냥 어리게만 볼 건 아니다. 생체 시계로 치자면 나도 모르게 성적 호르몬과 호기심이 들끓을 때다. 당시 우리는 나도 모르게 그 그림들에 끌렸었고, 어린 마음에 몇몇 페이지에 대해서는 몰래 친구들과 돌려 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해도 애당초 어린이를 대상으로 출간된 만화책이었으니, 그 외설적 수준이 무슨 포르노그래피처럼 심각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단지 아직 세상에 눈이 어두운 어린이들의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비단 삽화의 형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용도 다분히 에로틱한 것들이 중심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신화 속에서는 신이고 인간이고 할 것 없이 모든 등장인물이 에로스의 상황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쓰는 것이다. 특히 신중의 신으로 여겨지는 ‘제우스 신’은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데, 그도 매일같이 하는 일이 그저 마음에 드는 여인을 발견하면 어떻게 해서든 성욕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내용을 보여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다.


33.jpg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3권의 홍은영 작가의 그림.


하물며 그런 색욕 또는 성욕으로 인해 일을 크게 그르치게 되는 일화도 보여준다. 이 만화책 시리즈는 총 20권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전반부 열 권은 파편적인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반면 후반 10권은 하나의 대서사시다. 주제는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던 ‘트로이 전쟁’이다. 아름다웠던 문명국인 트로이를 지도에서 지워버린 그 무시무시했던 전쟁. 그런데 그런 트로이 전쟁을 촉발시킨 것도 결국 한 남자의 성적 욕망이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친선의 목적으로 그리스 스파르타에 방문했을 때였다. 젊고 혈기왕성하던 그는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에게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래도 유부녀고 남의 나라 왕비인데 참을 건 참아야지,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 그는 왕비를 왕 몰래 자기네 나라로 데려가버렸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스파르타의 왕은 당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고, 그 길로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와 연합해 트로이를 공격했다. 그게 트로이 전쟁의 서막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트로이 사람들은 애고 어른이고 할것 없이 다 죽어나갔다. 실로 그 죄없고 선량한 이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는 게 이 대서사시를 읽는 것의 가장 힘든 점 중 하나다.


당연히 원망은 파리스를 향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놈 하나 때문에 아름다웠던 트로이가 멸망해버린 셈이다. 얼마나 한심하면 여자 하나 때문에 이 모든 사단을 냈을까. 그런데 어쩌면 이 신화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은 오히려, 그 이른바 ‘성욕’이란 것은 파리스는 물론 신도 참거나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일 지도 모른다.




수 년 전의 일이다. 한 무리의 남미 출신 유학생들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대화 주제는 ‘불교’였다. 주로 내가 설명하는 입장이었다. 정확히는 불교적인 태도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자면 뭐 그런 거였다. 집착을 내려놓고, 고독하게,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로서 살아가는 것. 물론 현대인이 듣기에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기실 속세에서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에든 많이 집착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형태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하지 말라고 하니. 하지만 왜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납득하지 못할 사람은 또 없는 게 불교의 매력이다. 아무튼 그 학생들도 얼추 이해하는 듯했다. 특히 호세라는 남학생은 이 모든 내용에 대해 특히 진지해보였다.

설명이 끝난 뒤에도 호세를 비롯해 특히 관심 많은 세 학생은 나를 거듭 따라다니며 이것 저것을 더 물었다. 그러다 이번에는 자기 인생에서 정말 큰 문제라며,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왔다.


“그럼 성(sex)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애인도 갖지 않는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나요? 갑자기 성욕이 막 겉잡을 수 없이 들끓거나 누군가에게 폭풍같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잖습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를 읽을 나는 분명 파리스를 원망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만약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떘을까? 설정상 파리스가 한 눈에 반한 헬레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헬레네도 마찬가지로 파리스에게 반한 상황이었다. 또 당시는 인권이나 불륜 등에 대한 각종 감수성이 지금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수천 년 전이었다. 무엇보다 아프로디테라는 미(美)의 여신이 파리스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판을 짠 거였고, 심지어 사랑의 신인 그의 아들 ‘에로스 신’까지 동원해 큐피드의 화살까지 날렸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내가 파리스였다면, 과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호세도 분명 그처럼 사랑 앞에 어쩌지 못 하는 상황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이리라. 하긴 신 중의 신인 제우스도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우리같은 인간이 별 수가 있을까? 당장 내 삶을 돌이켜보아도 그렇다. 이십 대 중반 무렵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나는 완전히 고장이 나버렸었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본다면 인간으로하여금 가장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건 분명 ‘사랑’ 또는 ‘성욕’이었다. 그게 그렇게 통제가 쉬운 거라면 애당초 ‘주색잡기’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다행히 불교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도 있다. 어찌 보면 참 흥미롭다. 불교는 이 ‘색욕’이란 것과는 가장 동떨어져 보이는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한 답도 있다니. 그러나 반대로 보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불교는 결국 인간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철학인데, 가장 큰 괴로움은 ‘에로스’에 있으니, 당연히 그것도 다루는 게 인지상정이다. 아무튼 호세가 그렇게 물었을 때, 곧장 수년 전 접한 부처의 사례가 떠올랐다. 붓다도 아직 깨달음을 얻기 직전 거의 마지막 즈음에 맞닥뜨린 문제가 이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경전에는 마왕이 싯다르타(붓다, 아직은 깨닫기 전이었으므로 싯다르타라 썼다)에게 자신의 딸들을 보내 유혹하려 했다고 적혀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비일 뿐이다. 현실적으로는 붓다의 마음 속에 강력한 성적 욕구와 충동이 발생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런 상황에서 보통 우리는 그 욕구에 껌뻑 넘어가고 만다. 오죽하면 붓다가 6년간 해온 오랜 수행의 ‘마지막 대장’으로 등장했겠는가.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부처가 끝끝내 깨달음을 얻고 ‘부처’로 일종의 진화를 했다는 건, 그런 성욕마저도 결국은 극복했다는 것이다. 그때 그가 어떻게 극복했는 줄은 ‘잡아함경’이라는 경전에 적혀있다. 자신을 성적으로 유혹하려는 이들에게, 혹은 그 유혹들에게 부처는 말했다. 나는 그 말을 호세에게 그대로 전해줬다.


“불교의 철학은 결국 세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거야. 그래서 붓다도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한 거지. 사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사람들이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진 않거든. 붓다는 말했어. ‘이 똥 찌거기와 오줌, 고름, 피로 가득찬 가죽 주머니에 불과한 이들아.’”


호세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웃음까지 터뜨렸다. 지금껏 그의 입장에서 꽤 진지할 수 있던 얘기를 하다가 이런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을 들었으니 당연했다. 또 불교와 붓다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한없이 자비롭고 자애로운 것인데, 그런 사람이 이렇게 엄청난 말을 했다니. 어찌 보면 이건 나를 유혹하려는 상대에 대한 아주 참신한 ‘욕’이다. 비어를 쓰진 않았지만 본래 더 ‘욕’으로서의 더 수준이 높은 건 비속어 없이 하는 욕인 것이다. 전혀 붓다가 했을 말 같지는 않다. 그런데 사실이다. 부처가 저런 말을 한 것도 사실이고, 인간이 저렇게 생겨먹은 존재라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 철학이 우리에게 내적 평화를 주는 건 그런 식이다. 소위 ‘반야’라고 한다.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닌데도 단순히 위로만을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대상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불교의 방식이다. 기실 사랑에 빠지거나 성욕에 시달릴 때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 한다. 소위 말하는 ‘콩깍지’가 씌어 상대의 매력적인 모습만 보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진실이 아닌 허상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반면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본다면, 누구든 찐 고구마나 삶은 계란, 유제품까지 먹고 화장실에 가면 실로 어마어마한 것들을 쏟아낸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라도 뱃속에는 더러운 것들이 잔뜩 들어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사랑에 취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아가고픈 마음에 그걸 외면할 뿐, 더러운 게 사실이다. 누구나 그렇다. 붓다도 그렇다.


44.png 먹방 유튜버로 유명한 BJ 쯔양과 그가 구독자로부터 받은 질문




사실 이건 불교에서 이미 꽤나 정형화된 수행의 내용이다. 한국엔 잘 없지만 티벳 등 불교의 전통적인 문화가 깊게 자리잡은 곳엔 ‘부정관’이란 수행이 있다. 볼 관(觀) 자를 써서 ‘부정한 것을 본다’는 의미의 이 수행은, 시체를 찾아가 그 옆에서 몇날 며칠이고 시체와 함께 보내는 것이다. 시체가 부패해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소상히 관찰하는 게 수행의 모습이다. 사실 더럽다고 하는 객관적 실체를 마주해 육신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무상함을 깨닫는 게 목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방법을 일상의 곳곳에서 활용한다. 나도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고 여전히 호르몬과 혈기가 왕성한 나이이기 때문에, 가끔 갑작스런 에로스의 충동과 욕구가 솟구칠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 따라도 큰 문제 없는 감정이라면 그대로 두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욕정은 파리스의, 초서의 미인계에 당한 삼국지 동탁의 상황처럼 나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는 섣부른 감정이다. 그때, 나는 머릿속에서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무엇무엇으로 가득 찬 가죽 주머니.’


그걸 생각하면 속된말로 정말 확 ‘깬다.’ 불같던 에로스의 감정은 언제 거기 있었냐는듯 한 순간에 달아나버리고 만다. 뭐 대단한 걸 한 게 아니다. 단지 실체만 보았을 뿐이다. 욕정을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국인이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