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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욕심을 아예 내려놓고 살 수는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욕심'이란 단어의 실체

by 타와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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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야심가와 소시민. 야심가는 큰 야망과 꿈을 품고 포부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다. 조금 힘들지라도 부단히 노력해서 더 많은 것을 이루거나 얻고자 하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소시민은 큰 야망이나 대단한 꿈을 품지 않고, 굳이 포부 같은 것도 갖지 않는 사람이다. 꼭 뭔가를 얻거나 이루고자 하는 마음도 없이 단지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며 소박하게 살아간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는 야심가 형이 주류인 사회였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그땐 학교에서도 항상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교육 받았다. ‘소년이여 야망을 품어라(Boys be ambitious)!’ 요즘엔 사라진 것 같지만 그땐 그 말이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를 배회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회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야심가가 되자는 분위기는 상당히 사라졌고, 이젠 심지어 소시민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잠깐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어느덧 우리 사회의 고성장 흐름이 끝났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까지만 해도 꿈이 있으면 이루기가 그래도 쉬웠지만 지금은 모든 게 무척 어려워진 것이다. 환경 자체가 달라져서 단순히 노력만 한다고 해서 뭔가를 이룰 수 있는 사회는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오히려 요즘은 야망을 품어야 한다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한 예로 수 년 전 TV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에서 그런 장면이 나온 적 있다. 부머 세대로서 사회적 성공을 이룬 코미디언 이경규 씨가 일일 게스트와 함께 일반인의 집을 방문해 밥도 한 끼 얻어먹고 사는 이야기도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날의 게스트는 연기자 김승수 씨였는데, 김승수 씨는 우연히 들어간 집에서 청년에게 ‘꿈이 무엇이냐?’ 물었다. 그때, 패널 이경규 씨가 진지하게 제지하며 말했다. 이전에 다른 청년에게 그걸 물어봤다가 혼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세상이 예전과 달라져서 ‘꿈이 있어야 한다’라는 그 전제조차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어른들의 그런 질문이 청년들을 오히려 부담스럽게 할 수 있다고 이경규 씨는 말했다.


같은 젊은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크게 공감했다. 어차피 해도 가능성이 낮은 시대인데, 오히려 야심을 가져야 한다는 분위기가 삶의 여유를 앗아간다. 물어보는 것조차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아무튼 그 꾸짖음(?)을 했던 학생은 이경규 씨에게, 자신의 꿈은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김승수 씨는 멋지다고 반응했다. 그 장면이 내겐 야심가의 나라가 어느덧 소시민의 나라로 변한 뚜렷한 신호로 느껴졌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변화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니 포기한 쪽에 더 가깝다. 수천 년을 야심가로 살아온 민족성이 그렇게 십수 년 만에 사라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많은 청년들의 마음 한 구석엔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 한 야심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날 만났던 그 사람도 그랬다.




다같이 간단한 명상 맛보기를 한 뒤에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당당함과 포부가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는 현대인에게 이런 명상이나 불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불만을 제기했다. 내 첫인상이 맞았는지 그는 야심가 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기에 불교는 야심가보다는 소시민에게 훨씬 어울려 보인다. 불교는 맨날 ‘모든 건 마음에 달렸다’라며 밖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해결하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진짜로 돈을 벌려고 발악하지 말고, 돈에 대한 욕망을 마음에서 제거하란 것이다. 그 연장선으로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기도 하는데,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도 그 지점이었다.


“근데 사회 생활을 하고 살아가려면 욕심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 않을까요? 저는 사람들이 자기 일에서 더 성장하고 발전적으로 되려면 어느 정도의 욕심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있어야 노력할 수 있고 더 나아질 수 있잖아요. 근데 왜 불교에서는 항상 욕심을 내려놓으라고만 하는 건가요?”


불교에 대한 이미지는 딱 그가 말한 그대로다. 예컨대 얼마 전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은 게시물을 봤는데, 불교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했다. “세상은 원래 고통이고, 욕심내면 더 괴로워짐.” 하지만 좀 까다롭게 본다면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아니, ‘욕심’이라는 단어에 대한 불교와 속세 사람들의 입장이 사실은 많이 다르다.


일단 첫째, 불교에서 욕심을 지양하라는 이유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이기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불교가 ‘욕심’이란 것을 교리로서 ‘나쁜 것’으로 여겨 금기시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애당초 불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럼 왜 지양하느냐, ‘욕심’이란 것이 우리를 필연적으로 괴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괴로움을 감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굳이 욕심을 피할 것도 없다. 다만 괴롭지 않기를 바란다면(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괴롭지 않기를 바란다), 욕심은 내려놔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욕심’이란 것의 더 구체적인 정의다.


사람이 살다 보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거나 일을 더 잘 하고 싶다거나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은 얼마든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그게 ‘욕심’이라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마음 자체는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 자체도 욕심이 아니며, 풀어서 말하자면 그 자체가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게 딱 떨어지는 단어가 없어서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그런 마음은 그냥 평범하고 무해한 ‘원함’이다(불교에서는 이것을 원(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자기 안에 너무 오래 품고 있으면 점차 변질되기 시작한다. 마치 분명 처음엔 멀쩡했던 음식물이 시간이 지나면 썩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상한 음식물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처럼 그 변질된 마음이 비로소 나를 괴롭게 만들때, 그때 그 ‘원함’은 ‘욕심’으로 변한 것이다. 괴로움의 이유는 간단하다. 단순히 처음에 ‘갖고 싶다’ 수준일 때는 그 대상 자체에만 마음을 두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은 그걸 아직도 갖지 못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이상’에 대해서만 생각하나, 이후에는 그걸 이루지 못한 ‘현실’과의 괴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모습이 불만족스러워지므로, 이는 괴로움을 낳는다. 그처럼 ‘오직 바라기만 하여 괴로워지는 마음’을 ‘욕심’이라 부른다. 그래서 욕심은 필연적으로 괴롭다.


그럼 그 ‘원함’이 욕심으로 변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역시 간단하다. 욕심의 괴로움은 원하는 걸 갖고자 하는 이상과 아직 갖지 못한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오니 괴리만 줄이면 괴로움은 줄어든다. 말하자면 단순히 ‘갖고 싶다, 갖고 싶다’라고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욕심도 괜찮은 거지’라고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걸 위해 내가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거다. 생각이 아닌 행동을. 예를 들어 그 문제 제기를 했던 야심가 분은 스스로 디자이너라고 했는데, 그의 바람은 ‘더 나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였다. 그러나 가만히만 있는다고 그게 어디 이뤄지겠는가? 아무 것도 안 한다면 오히려 전술했듯 그 마음이 썩고 고여 고통만 얻을 뿐이다. 반면 자신이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해야 마땅하다. 그 야심가의 경우라면 나를 성장시킬 회사로 이직을 하건, 자기 브랜드를 만들건, 더 의미 있는 일을 찾아서 하건 뭐 기타 등등.


물론 그렇게 노력한다 해도 요즘 사회의 성공에는 ‘운’이라는 변수가 매우 크게 개입하는 이상, 원하는 걸 얻지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나는 그것으로 된 거다. ‘운’ 등의 외적 요소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니 신경 쓴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애당초 관심을 줘선 안 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마음에 두면 삶은 반드시 괴로워진다. 단지 실패한 상황에서도 또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그렇게 매 순간 ‘내 할 일’에 대한 집중을 반복하며 살아갈 뿐이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욕심 부리지 말아라’의 참뜻은 ‘아무 것도 원하지 말아라’가 결코 아니다. 그것보단 ‘정작 해야 할 것은 안 하면서 가지려고만 하는 마음만 품고 있지 말아라’에 가깝다. 할 일만 하다보면 거기에 마음이 집중되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에 대해 관심을 주지 않게 된다. 그로 인한 괴로움이 나를 찾아올 수 없게 된다.


그 야심가는 뭔가를 크게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현대인이 ‘종교’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 까닭은 뭇 종교가 뭔가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거다. 특히 내 꿈이나 야망을 이루는 등의 면에 있어서 종교는 보통 ‘신께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무조건 틀렸다고는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인데, 우리가 세상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때론 종교로부터 세속적인 성공을 얻는 데에 대한 비밀이라던가 지름길 같은 걸 기대하기도 한다. 아무리 정해진 길이 있더라도, 사람은 나약한 존재인 까닭에 때로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 야심가 역시 내가 그런 답을 해주길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내가 한 말은 ‘네 할 일을 하라’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종교의 신비성은 물론 요행 같은 것도 전혀 없는 답이었으니, 그는 놀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리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과 성공의 원리는 무척 간단하다.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얻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생각하고, 그걸 하면 된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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