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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어 모지민 Apr 22. 2023

각자 각각

뿌옇게 멍든 산자락을 맞이하는 장흥의 아침

날은 이 날에서 저 날로 어기는 일이 없이 갈아 치운다

하늘에선 봄비가 내렸고 집안에선 모모가 끼순이 집순이 주인년의 기상을 한없이 기다렸다지

그 누구의 마음도 아닌 오늘 나의 이 마음은 온전히 나에게서 비롯되었고 온전히 나만의 것인데

매일이 새로이 맞닥뜨리는 감정은 매번 생경맞고 어딘지 모르게 여적 살아 있는 감정을 바라보는 자신이 안쓰럽다. 매일의 나의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한사코 정직하기만 하다

지난주 월요일부터 시작된 감기가 끝날 듯 말 듯 여전히 몸뚱이가 별로다

내키지 않는 컨디션으로  어제는 네팔을 다녀온 이지송 오라버님과 모처럼 일영리에 있는 바람산에 다녀왔다

춥다 덥다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 유난히 따뜻하고 유난스러운 미세먼지도 없는 하루였다

그렇게나 칙칙했던 산도 푸르뎅뎅 녹색으로 색을 갈아입고 나무마다 내뿜는 피톤치드의 맛이 처음처럼 새로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해서 그런 것일까. 시간을 아껴가며 한걸은 한걸음 그 시간을 꾹꾹 밟았다     

자연은 봄이 되서나 비로소 나무가 되고 잎이 되고 하늘은 파랗게 질려 머나먼 완연한 봄의 하늘로 가버린다

기나긴 겨울

수수만년의 세월 속에서 그러했듯  나무들은 산기슭 듬쑥한 흙속에 뿌리를 뻗치고

깊고 추운 시간 내내 흙을 악물고 버팅긴 이유가 있었어

나무들아 그동안 얼마나 추웠니

자연도 나의 감정도 실컷 움츠러들었다가 봄이 되고서야 포근한 미소를 짓는구나

계절은 왔다 가는 손님이니까 그 변덕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반갑다가도 지랄 맞은 날씨에는 정나미가 떨어지기도 한다

새싹이 저만치 파릇파릇 돋아나고 꽃잎이 이색에서 저색으로 활짝!

자연은 깊고 푸르고 나의 나직한 사랑도 자연처럼 그렇게 자연스레 피어나고 있다

숨을 헉헉 거리며 제법 잘 다져진 다리 근육으로 얌전한 바람산 정상을 오라버님 보다 10분 먼저 올랐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에 불어오는 적당한 바람. 가지마다 달린 잎들이 가지런히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었다


지송 : 다람쥐랑 같이 다닐려니 힘이 드는구나

지민 : 괜찮으세요? 오라버님 땀까지 흘리시네요

지송 : 그럼 땀이 나지 안 나니.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휴~

지민 : 그러게요 거짓말처럼 봄도 아닌 것이 이젠 여름 날씨네요


저 연세에 참말로 놀라운 체력이시다. 역시 건강은 타고나야 하는 법!!!

비실비실 비실과는 태어나면서부터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 비실비실이다

이지송 오라버님은 루이치 사카모토를 들으며 운동기구에서 몸을 풀고 나는 봄처럼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를 들으며 벤치에 몸을 뉘어 요가를 한다

각자의 시간은 각각 알아서 잘 쓴다


지민 : 물 다 드셨어요?

지송 : 여기 있다. 받아라!!!


한 모금 마시고 남은 한 모금을 건넸다

이전에 보안 여관 공연 때 갓 공연을 마치고 거친 숨을 몰아 쉬는 내 입에 사탕을 넣어준 게 생각났다

정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뭐든 응급 수혈이 긴박한 상태였다

관객들 대부분은 물조차도 줄 생각을 못하고 내 주위를 어슬렁 거리다 퇴장하고 마는데 아니 알더라도 미처 그렇게 하진 못하겠지만서도 여하튼 인생에 그렇게나 반가운 사탕은 처음이었다


지민 : 그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지송 : 그게 다 연륜이란다


그래서일까 그의 주머니에는 언제나 사탕이나 초콜릿이 들어있다

잊을만하면 주머니에서 당을 충전해 줄 그 이쁜 것들을 손에 쥐어 주신다

아직 내 목구멍에서 녹고 있는 그 사탕의 달콤한 맛을 거듭하며 물병에 남겨진 한 모금을 소중하게 아주 소중하게 들이켰다


지송 : 다했냐

지민 : 네


하산을 하면서도 지송 오라버님의 휴대폰에서는 내내 사카모토의 음악이 흘렀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초기 영화 음악의 선율은 저릿저릿하면서도 뭔지 모르게 쓸쓸하다


지송 : 이 사람 죽은 건 알지?

지민 : 그럼요. 오라버님 네팔에 계시는 동안 가수 현미도 갑자기 갔잖아요

지송 : 그래

지민 : 사람이 많이 죽는 계절인가요. 며칠 전에 저희 형수님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자연은 이렇게 돌아오는데 사람들은 떠나네요

지송 : 원래 그런 거야. 시간이 되면 다들 그렇게 가는 거야

지민 : 오라버님도 그럼 그렇게 가시나요

지송 : 그럼. 각자 살다 각자 가는 거야


구태의연스레 건강하게 오래 살아 달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인간은 하늘이 명한 제 몫을 살만큼 살고 가는 것이니까

나의 에미 아비도 그렇고 너도 나도 각자 각각 자연처럼 왔다 갔다 그렇게 저렇게 한 세상 살다 갈 테니까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한 세상이라 참 다행이다 싶었다. 두 세상 서너 세상이라면 백만장자의 자식새끼로 태어나게 해 준다 해도 나는 싫다

저녁은 지송 오라버님이 하루종일 우려낸 사골 육수에 밥을 말아먹으며 동네 미술 작가들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장흥 일영리 마을의 깊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얼마 전 뽑은 인생 첫차 "모라"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항상 자전거로만 다니던 길을 오라버님의 특훈으로 시작된 운전 과외가 면허 취득으로 이어 차를 사게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운전대 앞에서는 아직 세상에 갓 걸음마를 뗀 유아나 마찬가지

내 시작은 미약하나 내 끝은 끝없는 질주이다

이제 가까스로 뚜벅이의 삶은 졸업하였고 제법 격상된 삶의 질이 훤하게 기다렸단듯이 기다리고 있다

그 앞날이 윤기 좔좔 흐르는 집 앞 석현천 계곡물처럼 기특하게 흐른다

그저 그 물속에 돌멩이는 각자 각각 알아서 반짝거린다

이지송은 46년생이고 나는 46살이다

그의 주변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감독님이라 칭하고 나만 혼자 덩그러니 오라버님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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