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일기
쓸 말이 없다. 여름에는 사뿐히 건너뛰자
여름 아침
am 7시 운동하기에 가장 적합한 온도와 습도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땡볕에 타 죽는다
여름 낮잠
하염없이 늘어진다
간신히 붙어있는 살코기. 다행히 녹아 늘어질 살덩이가 많지 않은 몸이다
여름 수박
냉장고에서 꺼낸 수박을 쪼갠다
시뻘건 속살이 새빨간 입술에 닿자 아! 이 맛이야.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여름 선풍기
미풍은 아쉽고 약풍은 적당한데 강풍은 시끌벅적이고 시끄럽기만 하다
선풍기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다
잠시 에어컨을 틀어 보자
여름 에어컨
틀면 춥고 끄면 덥고 대체 어쩌란 말이냐
여름 파리
날쌘 모모가 날아가는 파리를 때려잡았다
덕분에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모모가 살해한 파리를 고이 쓰레기 통에 버려 준다
여름 커피
한 여름에 따아는 한약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따아 졸업하자니 나약한 장으로 들어온 아아로 급 화장실행이 농후
하여간 예민한 장 덕분에 화장실 왔다 갔다 지친다 지쳐
한두 번 속냐. 맹물이나 마시고 속 차리자
여름 신발
여름도 겨울도 사계절엔 크록스뿐이다
칼러만 다를 뿐!
여름 쇼핑
이 더위에 입는 옷이라곤 하얀 티셔츠 조각뿐이다. 다행이다.
돈이 굳었고 맥시멀리스트의 사는 행위를 중단하는 시간
여름 전화
다들 입에 단내가 나서 아가리에 얼음 씹어가며 전화질이다
걸지 마라. 나는 얼음 없어서 양치 중이다
여름 버스
한숨과 쉰내가 진동이다
부채를 펴든 할아버지, 챙 넓은 모자를 쓴 할머니
천근만근인 버스의 바퀴가 겨우겨우 일영리로 향한다
여름 전철
에어컨의 냉기가 날아와 살결이 오그라들었다
흡사 이곳은 돼지고기를 가둔 정육점의 회색 냉장고인 걸까
챙겨 온 바람막이를 꺼내 입는다. 밖에 나가서는 곧장 벗어야 한다
여름 운전
차 문을 열자마자 피부로 닿는 열기에 숨이 헉헉 막힌다
에어컨 바람이 시급하다
참을 인자 세 개를 그리듯 내비에 목적지를 찍고 일단 달리자
신호에 걷는 사람들 사이로 아지랑이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여름 운동
땀을 뻘뻘 흘리는 근육맨의 유튜브 시청으로 대신하자
내가 애쓸 일은 아닌 것으로
여름 빨래
이 고운 두 손으로 빤 속옷을 옥상에 걸어두면 순식간에 수분 증발.
건조기가 쉬어가는 시간.
전기세를 절약하는 시간.
그 전기세는 에어컨이 대신하는 것으로.
여름 식물
속절없이 시들시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없다. 비는 언제 오려나
여름 그늘
시골집 개집에 아빠가 심은 구슬나무 아래서는 개도 가족도 시원하다
여름 모모
키우는 고양이 모모는 포유류라 한참이나 더울 것이다
털이 많기도 하여라
여름 약속
이 더위에 나오라는 거 실화?
시간은 다가오고 더위에 못 이긴 얼음처럼 그 약속 와장창 녹아버리길
여름 촬영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 섰다. 실바람 부는 가을이 그리운 시간
여름 마스크
저것들은 덥지도 않나.
코로나, 입냄새, 한증막 그리고 마스크라니.
하여간 어지간히 독하다
여름 음식
너무 금방 가는구나. 시간은 참 빠르기도 하여라
여름 죽음
여름에 떠난 친구는 아직 여름에 있을까
여름 택배
내겐 반가운 손님. 기사에겐 죽음의 시간
여름 벌
숨 참고 꼼작 마라! 움직이면 죽는다
여름 술
두 잔이 한잔으로 한잔에서 영잔으로
잔은 비워지고 편의점에서 900원짜리 속청수 하나로 속을 채우고 잠에 든다
여름 목욕
냉수마찰 최고야. 보일러가 쉬어 가는 시간
여름 주말
물놀이를 가는 사람들 차로 도로가 일시정지
나는 집구석에서 허리가 끊어질 때까지 누어 일시정지
여름 상처
호호 불어주니 제법 시원하다
상처는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준다
여름 불면
열대야엔 한강에 나가 새우깡에 사이다지
이래저래 자긴 글렀다
여름 모기
윙 윙 윙
모기가 앉은 살갗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매번 모기와의 사투는 거의 자해 수준이다
내 피 같은 피로 채워진 모기의 죽음으로 결국 피를 보았다
여름 화장실
여기저기 눌어붙은 똥내가 진동을 한다
똥파리가 알을 깠다.
생명은 인간이나 곤충이나 징하다
여름 티브이
천 개가 넘는 채널, 볼 게 없는 티브이는 시간이 아깝다
시각공해에서 쉬어 가는 시간
여름 건강
하염없이 비실비실. 천둥번개 내리치는 비가 그립다
여름 장마
정태춘의 92년 종로에서 장마가 듣고 싶다
그가 선물해 준 책을 읽어 보자
여름 음악
에어컨 틀고 집구석에 박혀있는 엘피를 꺼내 듣는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구나
여름 여름
마흔여섯 번째 여름
할 일이 태산이다. 하나씩 잘 헤쳐 나가 보자
여름 장흥
벌써 세 번째 맞는 장흥의 여름
이곳으로 이사 와서 좋은 일이 참 많이도 생겼다
마흔일곱 번째 여름은 더 시원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