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어 모지민 Sep 29. 2023

그렇게나 굳세어라 줄리엣이 있었다

발레리나가 되지 못한 나는 이태원 환락가에서 그렇게나 긴 시간을 꾸물거렸다.

그간 수많은 무대에서 뜀박질했지만 발레리나가 되지 못한 채로 서성서성한 무대는 내 묵은 체증을 해갈시키지 못했다.

올해 초부터 엘지아트센터 크리에이터스 박스 개관 두 번째 작품으로 선정되어 기획에 들어갔고

많은 이들의 수고스러움을 통해  급기야 로미오와 줄리엣 and more로 탄생했다.

여기서 more는 나 자신 그리고 그 이상의 것! 을 의미한다.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현역 무용수들과 견주기 위해 하루하루 성실하게 체력을 다졌고

공연에 임박해서는 그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혹여라도 몸에 해가 되는 것들,

떨어지는 나뭇잎도 잽싸게 피해야 했다.

지난한 과정을 어렵사리 관통한 줄리엣 나는 공연에 대한 예감이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런데

구월십구일

공연 하루 전 리허설에서 오케스트라 피트에 둔부로 굴러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쇼크로 잠시 의식을 잃고 119 차가 극장으로 들이닥쳤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의 어렴풋한 기억은 흡사 재난 영화에서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긴급 구조된 상황.

뉴스나 드라마에서나 흔히 보던 장면인지라 모든 게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엑스레이 상으로 뼈는 무사했지만 통증이 심하고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밤 10시가 돼서야 치료가 끝났고 효섭은 조심스레 내일 공연을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할 수 있어" 말을 하기까지 전 스테프와 무용수 그리고 극장 관계자들은 초비상이었다.

나 하나로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공을 무너뜨릴 수 없고 애초에 나를 기반으로 기획한 공연에서

내가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돼버린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비극이 펼쳐질 것이다.

훗날 줄리엣은 평생 지옥에서 울고 있겠지.


구월이십일

공연 당일 내 속도 모르는 빌어먹을 하늘 구석탱이에선 하염없이 비가 내리쳤다.

오전에 부랴부랴 치료를 받고 오후 한 시 어제 사고가 난 무대로 엉금성큼 들어갔다.

귀신이 질질 끌고 가 내 발을 낚아채 빠트리게 한 피트가 검은 웅덩이처럼 보였다.

공연 전까지 테크, 런쓰루 등 여러 차례 리허설을 거치는데 어제의 치명적인 사건으로 최종 드레스 리허설을 못했기에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씬별로 진행하는데 그렇게나 간절한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니 준비한 동작을 하라고 했지만 걷는 건 둘째치고 앉았다 일어나는 것조차 어려웠다.

결국 공연 30분 전까지 내 씬이 통재로 바뀌고 준비한 테크닉은 모조리 도려냈다.

다시 한번 굴러 떨어진 절망의 구렁텅이! 아, 이런 거구나.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나 서럽고 이렇게도 처절하구나.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무심한 하늘을 원망할 시간도 없이 전쟁 같은 시간이 속사포로 흘렀다.

공연 몇 분 전 남편의 도움으로 간신히 얼굴만 닦아 냈다.

그날 하루종일 입에 댄 거라곤 미지근한 물뿐, 그렇지 않아도 뼈다귀인 몸뚱이 그날은 제대로 해골 줄리엣이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싶었는데 씻지도 못한 설상가상으로 거동이 불편한 줄리엣이라니.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형벌을 내리시나이까! 무심하기도 하여라.

걷지도 못하는데 무용 공연라니 죽고 싶은 마음 도망치고 싶은 참담한 심정을 어디에도 티 낼 수 없었다.

공연 시작 10분 전 조심성스레 육중한 무대 문을 무거운 마음으로 열었다.

상수 소대 캄캄한 곳에서 제발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움직일 수 있게 해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무대 중앙, 줄리엣 솔로 (자막: 아! 슬픈 시간은 길기도 하여라)

혹여라도 “신이" 찾아와 준다면 그 등에 업혀 춤을 추겠노라 했지만 매정하게도 오지 않았다.

발걸음마다 통증을 호소하며 무대에서 존재하기는커녕 귀신한테 몸서리치게 끌려만 다니다 70분 넘짓 그냥 그렇게 끝이 났다.

"커튼콜" 관중들의 환호 소리가 들리는데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나는 그 박수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나 비통한 커튼콜은 난생처음이었다.

그 달콤한 맛을 보기 위해 고된 시간을 버텨온 것인데 그렇게나 고대했던 무대가 그렇게나 행복하지 않다니.

무대에 서는 사람이 준비한 걸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성악가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목청을 잘라 피를 토해서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을 것이다.

나는 매일 다리를 자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은 그야말로 시지프스의 가혹한 형벌이구나.

그간 살면서 힘들다고 투정 부렸던 일들은 그저 엄살에 불과했구나.

무대를 지켜내야 하는 무게가 이렇게나 큰 것이구나.

그동안은 그저 평안히 아름답게 누려왔던 것이구나.

이런저런 생각들로 흡사 랭보의 지옥의 한철을 보냈다.


구월이십삼일

공연 4일째 “대망의 마지막 공연”

어찌어찌 그렇게나 긴 터널을 무사히 지났고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그리하여 비로소 지난 구 모든 찰나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아름다운 과거의 기억들로 줄행랑쳤다.

한없이 깊이 감사한 마음으로 줄리엣은 관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어 효섭이 깜짝 등장해 무용수들에게 장미를 선물했다.

꽃을 받은 줄리엣은 끝내 환하게 웃었다.


구월이십칠일

여전히 거동이 불편하고 통증이 심해 이번 추석엔 고향에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지난 4일은 분명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이 또한 다 이유가 있었으려나. 잘 참고 잘 버텼다.

이제는 팔다리 멀쩡히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 하염없이 감사하다.

공연 이튿날 휠체어를 타고 온 관객을 만났을 때 그때 이미 감사해하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유난히 밝았다.

나는 더 아름답고 단단한 줄리엣이 될 것이다.

그렇게나 굳세어라 줄리엣이 있었다.


“엄마

다시는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지 않게 해 줘요

늪지에 빠지지 않게

그물에 걸리지 않게

발등에 빛을 비추고

눈물에 빛을 비추고

잠들지 않는 밤에 빛을 밝혀 주세요

운전대 앞에서 빛을 보게 하고

사람들 앞에서 빛이 되게 해 줘요

지난한 과거에 빛을 밝히고

현재의 삶에 감사함을 비추고

미래의 바람에 빛을 비추고

희망에 희망을 비추고

기쁨에 기쁨을 비추고

빛처럼 빛을 태우고

빛처럼 빛을 항해하다

그빛을 향해 달려가게 해 줘요

그렇게,

한없이,

빛처럼 아름다운 기억을 비추고

그렇게 빛을 짊어지고

그렇게 빛처럼 살아가게 해 줘요 “


작가의 이전글 여름여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