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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어 모지민 Nov 10. 2023

기저기

이천이십삼년 가을

기적이란 것이 내게도 찾아왔다.

만질 수도 없는 것이 그렇게나 불쑥 성대한 모습으로 1퍼센트 미만의 희박한 가능성을 통과해 왔다.

오랜 시간 나라 없는 사람으로 살아온 예브게니가 끝내 난민신청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모두가 뜯어말렸지만 그는 여느때와 달리 확고했다.

작년 친구사이에서 영화 모어 특별 상영회가 있던 날 오랜만에 만난 김지림 변호사는 비자 문제를 돕고 싶다고 했다.

몇 년간 한주도 쉬지 않고 나간 나발니(러시아의 대표적 반 푸틴 정치 인사)와 전쟁 반대 시위등  정치적 망명은 어려워 보였고 변호사는 영화에서 처럼 나와의 관계를 피력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퀴어 퍼레이드 마저 없어지는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성적지향 난민신청 이건 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아예 일찌감치 포기였다.

예브게니는 3개월에 한 번씩 나를 통해 거주지 확인서를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제출해야 했고 너무 많은 시간 너무 많은 좌절과 인내와 의지를 필요로 했다.

출국 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고국으로 갔다 한국으로 재입국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매일이 노심초사였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세상에서 그렇게나 거대한 사회의 벽을 그저 우리 두 사람의 몸뚱이로 애처롭게 두들기던 시간은 그저 비극이었다.

나와 같은 오랜 국제 동성 커플은 결국 제 나라로 돌아가 동성혼을 하고(동성혼이 합법화된 국가) 안정된 삶을 지속하게 되지만

우린 둘 다 속하지 않은 나라의 국적을 달고 있으니 설상가상 최악의 커플이었다.

이천이십삼년칠월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출입국 관리소에 가는 날 예브게니는 내가 사준 샛노란 크록스를 개시했다.

190cm 커다란 키에 올망졸망 노오란 신을 신은 예브게니는 면접관들에게 나의 연인 지민이 이 신발을 사주었다고 우리가 함께 살게 해달라고 했다.

이천이십삼년시월이십일

끝이 보이지 않던 그렇게나 지난한 싸움에 종지점을 찍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예브게니는 끝내 승리하였고 더 이상 불안에 몸서리치며 출입국 관리 사무소를 드나들지 않아도 된다.

나중에 변호사한테 들은 바로는 면접관이 제출한 자료를 매우 세심하게 봐주셨다고 한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한해 수만 명의 신청 서류가 검토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보니  어쩌면 신의 가호가 있었던게 아닐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놀라움과 감사함으로 그렇게나 충만한 기적의 날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모모와 나와 예브게니 우리 가족은 크게 숨을 내 쉬고 깊고 푸른 잠에 들었다.

돌이켜보면 이천십칠년오월 한강에서 혼인식을 치른 일은 결코 헛된 '짓'이 아니었구나.

뻘밭을 구르고 질척이다 보면 무지개 장화 신은 여신이 행운의 깃발을 들고 있다. 그 이정표에는 '될지어다'가 쓰여 있었다.

나는 행복한 '끼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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