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냉이의 저주
봄에는 향긋한 술을 마시고 낮잠이나 자면 좋다. 그러기 위해 술자리를 모은다. 이것은 지나간 술자리의 이야기, 다가올 술친구를 부르는 글이다.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 꼭 빈 병을 못 치우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병을 마셨는지 헤아려보고 조절을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나 이만큼 마신다고 트로피 마냥 뿌듯해 할 요량인지는 알 수 없다. 실은 둘 다겠지. 처음엔 전자의 목적이었으나 마시다 보니 어물쩍 후자가 되어 버리고, 다음 날 아침에서야 멋쩍어하는, 범상한 술꾼의 평범한 결말.
늘어 둘 술병이 없던 옛날 옛적에도 술 좋아하는 이의 심리란 비슷했던 모양이다. 마시는 건 금지여도 문학이란 이름으로 교과서에 실린 술 예찬은 주야장천 공부해야 했던 고교 시절, 나는 언어영역 문제를 풀다가 ‘상춘곡(*정극인의 조선 가사. 세상사 됐고 술이나 마시자는 내용)’과 ‘장진주사(*정철의 사설 시조. 어차피 죽을 테니 술이나 마시자는 내용)’를 읽고 깊은 궁금증에 빠지게 된다. ‘꽃가지 꺾어 수(修)를 놓고 마시자’라는 구절에서였다. 꽃이 피었다고 하니 계절적 배경은 봄이겠다. 술이나 마시며 현실 도피하는 것도 알겠다. 여기까지는 시험에도 나온다. 선생님이 설명해준다. 이해도 쉽다. 아니 그래서 꽃가지로 술잔을 왜 세지? 고교생은 혼란스럽다.
지금이야 뭐, 줄 세울 소주병이 없던 시대니 술병 대신 꽃가지나 늘어놨겠지, 단박에 이해하는 삼십 대가 됐지만, 그때의 난 고교생이었다. 고교 시절이란 교복 재킷 안에 종이컵이랑 담뱃갑을 품고 인적 드문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어 마시던 때를 일컫는 말이니, 나도 보고 남들도 보도록 테이블 한쪽에 술병을 차르르 늘어놓는 술꾼의 유희 같은 것 알 리 없다. 당시 우리가 지나던 시절은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강변의 시간이었다. 교복 입은 미성년자에게 술 몇 병 파는 게 그리 심각한 도덕적 해이는 아니라 여기는 늙고 냉담한 꼬부랑 할머니의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사던 시절이었다. 누군 소주가 든 까만 봉지를, 다른 누구는 떡볶이가 든 봉지를 들고 어둠 위를 뛰어가던 회색 주름치마에 감색 넥타이를 맨 여자아이들의 밤이었다. 꽃이 피어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문득 꽃향기 묻은 바람이 지나가던 어두운 봄밤이었다.
(*폴레트 켈리의 시이자, 정희진의 책 ‘아주 친밀한 폭력’의 초판 제목)
그 시절 우리는 많은 이유를 안주 삼아 마셔댔다. 각각의 이유, 모두의 이유, 좋은 이유와 슬픈 이유가 우리의 빌미였다. 하루는 좋아하는 선배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 받았기 때문에 마셨다. 쉬는 시간마다 사물함실에 모이는 여자아이들은 그걸 생전 처음 보는 장미처럼 구경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강변으로 갔다. 종일 구경한 그 꽃을 새우깡 곁에 두고 마셨다. 어느 날은 엄마가 아빠에게 꽃다발을 받았기 때문에 마셨다. 많은 아이들이 알고 있듯 남편은 아내를 팬 다음 날이면 꽃다발을 들고 귀가한다. 수능이 100일 남은 날에도 마셨다. 맥주를 사서 강변에 왔는데 병따개가 없었다. 그래서 콘크리트 계단에 병목을 깨고 마셨다. 내 위가 약한 건 그날 곱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 몇 개가 내 위장에 박혔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한다. 사방이 어두웠다. 언제나 어두워서, 우리는 술을 쏟았다. 보이지 않는 종이컵에서 넘쳐버린 술이 운동화에 잔뜩 스몄다. 딸의 운동화에서 술 냄새를 발견한 엄마는 밤새 울었다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다음 날 아침 엄마가 끓여준 부드러운 달걀국을 먹고 등교해선 아침 자율학습이 끝나자마자 친구들과 매점으로 달려가 컵라면을 먹었다.
대학생이 됐다. 좋아하는 나무가 생겼다. 하양, 빨강, 분홍의 겹벚꽃을 온 가지마다 피워대는 도서관 앞 작은 나무였다. 아무도 정확한 유래를 알지 못했지만, 모두가 그 나무를 미친 나무라고 불렀다. 나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그 나무도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은 그 나무 아래에 앉은 선배들에게 포착됐다. 그들은 책을 대충 깔고 앉아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무 아래 잔디 위로 짜장면, 짬뽕, 아마도 빼갈이 난무했다. 가볍고 바삭한 베이지색 재킷 같은 캠퍼스의 오후, 햇살과 낮술에 따끈해진 얼굴로 선배들은 말했다. 남은 강의 따위 째 버리고 다 같이 롯데월드에 가자. 나는 수업을 빼먹는 게 아무렇지 않은 성숙한 1학년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롯데월드에 가자는 선배들에게만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쪽 끄트머리 소도시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여행이나 외식 같은 가족 공동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던 부모 아래에서 자란 내게 그곳은 수학여행처럼 누군가가 짜 놓은 일정의 마지막 코스로 존재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롯데월드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가 보내준 사설 캠프에서였다. 서울행 비행기에서 내 창가 자리를 자기 동생에게 양보해달라는 그 애 언니의 부탁을 거절했다. 커서 비행기를 이렇게나 타게 될 줄을 모르고 옹졸하게 굴었다. 이젠 좀 잊고 싶은 기억인데 안 잊힌다. 이렇게 써 두면 더 안 잊히겠지. 대신 그날 선배들을 따라 롯데월드를 갔는지 안 갔는지는 새하얗게 잊었다. 아마 안 갔을 거다. 그 시절 나는 대체로 돈이 없어서, 비용을 미리 파악할 수 없는 일은 시도할 수 없었다. 아무 날도 아닌 아무 날에 롯데월드를 가자니. 세 가지 색깔의 벚꽃을 피운 미친 나무 밑에 앉아 빼갈이나 얻어 마시며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했겠지. 어쩌면 술을 마시던 내가 선배들이 바이킹 앞에 줄 서 있는 모습을 본 것도 같고. 그런데 그게 롯데월드가 아니라 MT를 갔던 강촌의 바이킹이었던 것도 같고.
언제나 목련은 벚꽃만큼은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목련 나무 아래에선 술을 마시지 않는다. 떨어진 꽃잎이 지저분 하단 이유인데, 그래도 나는 그 꽃을 두 손에 살그머니 품은 희고 작은 새처럼 예쁘다 여긴다. 서울 신촌의 수많은 골목 중 가장 비탈진 쪽에 있는 한 술집은 커다란 목련 나무로 유명했다. ‘바람산’이란 현판이 붙은 작은 대문을 지나 폭 좁은 돌계단을 올라가면 손바닥만 한 마당이 나온다. 거기에 목련 나무가 서 있다. 키가 아주 크다. 꼭대기 3층 커다란 유리 창가에 앉으면 만발한 목련꽃이 조용히 흔들리는 풍경을 곁에 두고 술을 마실 수 있다. 그래도 나와 내 친구들은 목련 나무 아래 야외 테이블을 좋아했지만. 미세먼지의 시대 이전의 이야기다. 술집 자체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데, 목련 외의 특이점이라면 안주가 어마어마하게 맛이 없다는 것 정도. 얼마나 맛이 없냐면, 땅콩이랑 쥐포처럼 공산품을 담기만 하면 되는 마른안주조차 맛이 없다. 생맥주도 맛이 없으니, 목련 구경하는 자릿값이라 생각하고 손도 대지 않을 마른안주를 앞에 놓고 병맥주나 마셔야 한다. 매년 3월이면 올봄엔 꼭 친구들에게 바람산의 목련을 소개해줘야지 결심해보지만 맛없는 안주 덕에 언제나 마음만 먹다 만다. 술꾼들이란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가. 마시다 보면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 못 하는 주제에 맛없는 안주만은 철천지원수의 이름이라도 되는 양 잊지 않는다.
지금껏 본인이 몇 잔 마셨는지 인지하는 건 술꾼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술자리란 몇 잔을 마셨는지 아리까리 할 때가 가장 즐거운 법이다. 술잔의 수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너무 많이 마셨다. 또렷하게 셀 수 있다면 당신은 아직 덜 마셨다. 많이 마시기 직전, 그러나 덜 마시지는 않은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깨끗한 이불을 덮고 잠에 들어야 한다.
어느 겨울엔 오직 네 명의 관객만을 위한 공연(*박박parkpark 의 <춘면곡/권주가>. 한 번의 공연에 최대 4명의 관객만 입장할 수 있었다)을 보러 갔다. 공연장은 높고 낮은 화분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살아있거나 죽은 꽃대와 꽃잎들이 달큼한 냄새를 풍겼다. 관객은 해먹으로 기어올라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공연을 기다렸다. 천장에 달린 스크린 속에서 문이 열렸다. 음악과 함께 경험한 적 없는 장면들이 추억처럼 흘렀다. 나는 높이 달린 해먹 위,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곁에 나란히 누워 앞발이 도라에몽처럼 커다란 고양이, 머리랑 눈이랑 코가 동그란 강아지, 초록색 동산, 창호지로 만든 문, 수직으로 하강하는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 같은 것들을 올려다보았다. 정면 바깥으로 난 커다란 유리창을 바라볼 때도 있었다. 유리창 가장자리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시든 이파리를 단 나무 뒤로 드물게 명멸하는 행인을 보았다. 점점 밀폐되어 가는 공간과 압축되는 공기 사이로 향기와 소리가 고요히 퍼지고, 노래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목소리는 걷고 있었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발소리도 내지 않은 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노래하는 목소리의 파장이 꽃 위에 누운 내 뒷덜미로 전해져왔다. 파장이 닿은 피부에 엷은 흔적이 돋아나는 게 느껴졌다.
절화와 생화로 가득한 밤이었다. 입장할 때 받은 꽃과 열매로 담근 술을 입술에 흘려 넣으며 불로초로 술을 빚는다는 노래를 들었다. 약산에 흐드러진 꽃을 꺾어 술잔을 세며 끝없이 먹자는 노래를 들었다. 유령조차 무덤까진 술을 못 가져간다는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서쪽 나라의 동쪽을, 동쪽의 성당 지하를, 무거운 석관 속에 누운 사람의 기분을 떠올렸다.
술자리는 꿈을 꾸는 일과 비슷하다. 술자리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듯 집으로 돌아와 잠에 든다. 잠에서 깨어나면 조금 전의 꿈을 잊는다. 꿈을 잊듯, 술자리의 어떤 시간을 우리는 잊는다. 잊어버린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 꿈이다.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장면이다. 나는 석관에 누워 어떤 꿈을 까맣게 잊게 될까. 가사가 떠오르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혹은 계절도 잊은 채 누워 있게 될까. 그 시간을 그리워는 할까, 꿈꾸던 시절을 기억이나 할까. 기억나지 않는 시절이 오기 전까지 바라는 건, 그저 좋은 꿈을 꾸는 일이다. 향기를 풍기는 술, 좋은 음식, 경계를 풀고 웃는 사람들의 무해한 술자리 같은 꿈을 꾸는 일이다. 잠에 들 듯 하나의 술자리를 빠져나오고, 꿈에서 깨어나 또 다른 술자리로 향하고 싶다. 꽃을 보듯 술을 마시고 싶다. 술을 마시며 꽃의 곁에 남고 싶다. 그러기 위해 글을 쓴다. 친구를 부른다. 올해는 바람산에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