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냉이 Apr 20. 2021

쿨/핫/블루

물냉이의 전시 관람기

이 글을 부탁받았을 때 생각했다. 이차령의 사진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써야지. 물감처럼 빛나고 얼음산처럼 독자적이며 새처럼 섬세하다고 써야지.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사진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내가 가진 능력 이상으로 열심히 써 봐야지. 막상 글을 시작한 나는 생각한다. 그의 사진에는 작가가 자기도 몰래 심어둔 비밀스런 무언가가 있는데, 그걸 단박에 알아채는 이들의 수가 많아지는 건 어쩌면 조금은 슬퍼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air & water> 시리즈는 이차령 작가가 더운 나라로 건너간 어느 때의 장면들이다. 그리워하던 열기를 앞에 두고서도 풍덩 뛰어들지 못하는 머뭇거리는 마음의 풍경이 여기 있다. 우울은 공기다. 슬픔은 물이다. 작가의 손에 들린 카메라는 따뜻한 바다를 앞에 두고도 공기와 물을 응시하는 눈이다. 그의 눈은 하얀 배를 힘껏 미는 뱃사람의, 반짝이는 바다에서 머리를 내밀고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의, 해변의 그늘 아래 누워 책을 읽는 독서가의 기분과 기운을 즐거이 바라본다. 물결에 실린 파란 돛을 본다. 간간이 웃는다. 고무 거북이 튜브를 풍선처럼 어깨에 멘 사람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때 특히 그렇다.


뜨거운 모래, 시원한 야자나무, 청량한 파도, 눈부시게 흰 천과 빛나게 웃는 사람들 속에서도 우울이 곁에 있는 이유를 설명할 도리는 없다. 다만 어디에나 드리워진 그것의 존재감을 유독 응시하는 이들도 있다고 슬쩍 알려줄 수 있을 뿐이다. <air & water>는 어떤 사람들이 동시에 들여다보는 슬픔과 우울의 심도를 최선을 다해 엷게 한 작업들이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말은, 적어도 이 사진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렌즈에서 가까운 쪽과 먼 쪽 모두 동등한 깊이를 가진다. 어느 거리에서 봐도 우울은 드리워져 있고, 그것들을 헤엄쳐 지나갈 수 있게 돕는 작은 귀여운 것들이 드문드문 흩뿌려져 있을 뿐이다.


갈 수 없는 휴양지를 그리워하듯 이차령의 사진을 본다. 선명한 푸른색과 평등하게 흐린 피사체를 본다. 망설이는 마음이 단 한 장을 고를 수 없어 모두 내어줘 버린 스냅샷을 본다. 이 모든 것들을 연결하는 건 한 가지 색깔이다. 이차령의 사진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색깔과 이어져 있는 누군가들이다. 그들은 안다. 흰색과 잘 어울리고 검은색과 닿아있는 것이 파란색이라면, 그들이 푸른색의 심상을 곁에 두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오직 그들만이 이차령의 사진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


춥고 푸른 우울이 뜨거운 태양을 쬔다. 햇볕을 받은 마음의 온도는 일상으로 돌아올 힘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떠날 수 없는 시대, 푸른색이 깊어가는 나날들이다. 이차령의 사진을 곁에 두기에 이보다 적절한 때는 없다. 모두의 건강을 빈다.

*제목의 ‘쿨핫’은 유시진의 동명 만화 제목에서 따왔다. 제목뿐만은 아닌데, 그 만화를 사랑한 적 있는 이들이라면 아마도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2020.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