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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냉이 Apr 20. 2021

인형의 집/의/와이프

물냉이의 동시상영관

사무엘 아담슨 원작, 신유청 연출의 연극 <와이프>를 보고 왔다. 인터벌까지 장장 175분이나 되는 극. 연극이라면 아무리 짧아도 그 현장성의 에너지에 반응하다 내가 소진되어 버리는 게 보통이었는데, 극을 보는 중은 물론 다 보고 나서도 전혀 힘들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생동감이 내게 일부 옮아 온 듯한, 기분 좋은 생경함을 느꼈다.


입센의 <인형의 집>을 모티프로 한 <와이프>는 1956년-1988년-2020년-2046년에 이르는,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이야기다.  시대의 감각으로 각각 다르게 해석된 <인형의 집>이 끝나면, 배우는 무대 뒤로 나온다. 그걸 시작으로 당대의 ‘노라’와 ‘안티 노라’가 이 시대의 사랑과 자아의 자유를 위해 버려야 할 것과 얻어야 하는 것에 관해, 서로를 상처 주고 상처 입히며  물러서지 않는 논쟁을 벌인다.


페미니즘, 퀴어, 가부장제와 이성애 로맨스를 유지하는 제도로서의 결혼, 혹은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의 표상인 결혼, 관계에서의 평등,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서 부르짖는 투쟁,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핑계로 연대를 회피하는 무기력함, 자신이 약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타인에게 행하는 건 폭력이 아니라는 사고 방식의 오류… 이런 것들을 사회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예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관한 회의가 있었다.  많은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 메시지에 관한 그의 이해 부족을 들켜버리고, 그럴 바에 예술은 암시와 은유로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암시와 은유로 일관한다 하여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니다)


2019년 영국에서 초연된 <와이프>를 2020년 한국에서 볼 수 있었던 걸 행운이라 말해도 좋을 듯하다. 자신 안의 확신과 불확신을 명확히 알고 그걸 내보이는 각본, 인물에게 내대된 모순을 가리기보다 부각시킴으로써 캐릭터를 도구화하지 않은 연출, 그렇게 관객에게 몰입의 여지를 마음껏 내 준 무대였다. 코로나의 시대라 동행끼리도 한 좌석씩 띄어 앉고,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했는데, 반토막난 관객수만큼 박수 소리도 반토막이었던 터라 배우들에게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오면서 대본집을 사왔다. 같은 연출가의 <그을린 사랑>도 이미 예매 완료. 그나저나 신유청 연출가 이름 한문 뭐 쓰시는지.


*<그을린 사랑>은 결국 코로나로 인해 내년으로 연기되었다.


(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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