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썽아, 겁내지 마.”
수화기 너머 동생의 표정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분명 울지도 못하고 한숨 쉬지도 못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감정을 숨긴 담담한 표정으로 15도 아래쯤에 있는 투명한 벽 같은 걸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이 나온 것은 엄마의 다음번 진료 일정을 동생으로부터 전달받던 중이었다. 이번에 내가 가면 의사한테 이것도 물어보고 저것도 물어보고 해야겠다, 했더니 동생이 그게 그렇게 맘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내가 말을 할 줄 몰라서 못 물어보는 게 아니야,라고 했다.
예약을 했음에도 한참을 기다려 진료실에 들어가면 막상 진료는 3분이면 끝난다고, 밖에 환자들이 줄줄이 있는데 이거 저거 다 물어볼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고, 내 눈에는 아니지만 의사가 다 좋아요 하는 순간 말문이 막힌다고, 괜히 인터넷에서 보니 이 약은 이런 부작용이 있다던데요라고 말을 꺼냈다가 그다음 서로 화가 나고 난처해지는 상황을 어떻게 하냐고.. 그런 이야기 끝에 동생이 말했다.
“나는 엄마를 매일 보잖아. 그래서 엄마가 서서히 나빠지고 있어도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칠 수도 있잖아. 누나는 엄마를 가끔 보니까 ‘엄마 저번엔 잘 걷더니 지금은 아니네? 엄마 지난번까지는 혼자서도 할 수 있더니 왜 이제 못 하지?’하고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 있겠지만.. 나는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놓치는 게 있으면 어떡해? 제일 가까이서 제일 긴 시간 보는 게 난데, 내가 그걸 모르고 다 지나가고 있으면 그럼 어떡하냐고.”
한 시간 전에 먹은 저녁밥이 요동치도록 가슴속이 뜨겁게 울컥거렸다. 그동안 내 하나뿐인 동생이 힘들었구나. 같이 살고 있다는 이유로 동생에게만 아픈 엄마를 떠맡겼구나.
“썽아, 겁내지 마.”
“……”
“엄마가 아픈 건, 앞으로 점점 더 나빠지는 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리고 네가 눈치 채지 못했다고, 아무도 너에게 뭐라고 하지 않아. 오히려 너한테만 너무 많이 떠맡긴 게 미안하고 고맙지. 너는 너대로 자주 보면서 느끼는 걸 기억하면 되고, 나는 나대로 가끔 보면서 달라지는 걸 눈치채면 되지. 그래서 그걸 더하면 되잖아.
누가 그러는데 자기 엄마가 전 날까지도 멀쩡하게 집안일을 하다가 다음 날 갑자기 혼자 앉지도 못하게 되었대. 그런데 그게 사실은 갑자기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서서히 그렇게 진행이 되는 동안 그 엄마가 버티고 버텨왔던 거래. 그리고 하룻밤 사이 더 이상 버틸 그 마지막 힘조차 안 남게 된 거였다는 거야. 엄마가 버텨온 거라는 걸 진작 눈치채지 못한 게 미안하지만 어쩌겠냐고 하더라. 이게 나을 수 있는 병도 아니고.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엄마가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 되고 나니 어쩌다 혼자 뭐 하나만 해도 그게 너무 예쁘데. 웃으면 웃어서 예쁘고, 작은 거라도 뭘 하면 다 귀엽대. 그 사람 얘기 듣고 나 반성했거든.
그러니까 그냥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건 받아들이자.”
잠시 말이 없던 동생이 대답했다.
“알았어.”
그 후 일주일이 지난 엄마의 진료일. 심하게 손을 떨고 있는 할아버지와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이 든 할머니들 사이에 우리는 비교적 괜찮은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섯 사람의 순서가 지나자 간호사가 드디어 엄마의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 잼잼 한 번 해보실까요? 네~ 잘하셨어요. 이번에는 한 번 왔다 갔다 걸어보실까요? 아주~ 좋습니다! 약을 잘 드시는 거, 운동하시는 거, 그거 제일 중요한 거 아시죠? 그렇게 잘 유지하시다가 다음에 또 봬요. 그리고 겨울 옷을 입으셔서 그런지 몸이 조~금 무거워지신 것 같은데.. 이 병 자체가 무거운 병이라, 어머님까지 무거워지시면 안 돼요~ 우리 다이어트도 살짝살짝 해 가면서 다음에 뵙시다.”
열심히 검색해서 프로필 사진 이미지를 보고 선택했던 의사가, 사진 속 이미지 그대로 다정한 목소리로 진찰을 했다.
“선생님 엄마 유산균을 좀 드시게 하고 싶은데요, 약국에 갔더니 파킨슨 환자는 복용 중인 약 때문에 아무 유산균이나 먹으면 안 된다고 하던데..”
“예에?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아무 유산균 다 드셔도 됩니다! 유산균 먹으면 좋죠~ 우리는 변비 문제도 있고.. 또 그거 아니어도 몸에 좋으니까요. 저도 가루로 된 거 먹어요. 제가 처방을 해 드려도 이건 더 싼 게 아니니까 그냥 어머니 편하게 골라서 드시면 돼요. 전혀~ 상관없어요.”
“아~ 잘 됐네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엄마의 진료비는 2400원이다.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2400원이라니 놀랄 노자다. 약값 역시 90 퍼센트 공제를 받는다. 석 달치 약을 짓고 낸 돈은 18800원. 내리막길을 잘 걷지 못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그래도 엄마의 병 덕분에 내가 엄마랑 손을 잡고 걷는 일이 다 있구나 생각해본다. 병원을 나와 그다음은 어디를 가야 할지, 그날은 큰 손주의 졸업식이라 언니네 가기로 했었으면서 시간과 거리의 조합을 계산해 판단할 줄 모르게 된 엄마의 손을 잡고 기린 주차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