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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솜 Aug 26. 2022

유후인의 추억

우리가 다시, 함께 갈 수 있을까

예를 들자면, 동영상을 재생하면 퍼드드 퍼드드-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고 가끔 새 우는 소리나 한 번씩 들릴 것 같은 분위기. 그런 분위기가 무척 그립다. 따져보면 그런 풍경 속에 서 있었던 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도 같은데 기분상으로는 굉장히 오래된 일인 것만 같다. 4년 전 엄마와 다녀온 유후인에서 기억이 멈춘 것 같아 그때 찍은 사진들만 하릴없이 넘겨보며 시간을 보낸다.






바람조차 따뜻할  같은 봄이었다. 지옥 온천을 출발해, 한국인지 일본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고속도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마을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지진이 나는 바람에 관광객도  끊기고 예전의 예쁘던 모습도 사라진 것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되살려냈다고 기사가  적이 있는 ‘유후인이다. 가이드는 버스를 세운 곳을 기점으로 왼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호수가 나올 것이라고 했고,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벌꿀을 넣은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먼저 호수에 가보기로 했다. 언뜻 청평호 같았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호수 건너편 아름드리 벚나무를 가리키며 진짜 근사하다, 고만 말했다. 한국 사람이 , 일본 사람이 반인 호숫가에 남들처럼 둘러서서  가장자리까지 다가와 헤엄치는 주홍빛 커다란 잉어를 구경하다 카메라 뷰파인더에 잡힌 엄마의 카키색 트래킹화도 한국적 분위기에 추를 더했다.

지금은 카페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오래된 일본식 주택 앞에는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형제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우리에게 연신 스미마셍을 외치며, 엄마로 보이는 여성분이 아이들을 잡아다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줄무늬 형제 둘. 이렇게 여섯 식구의 단체 사진이었다. 어쩐지 나도 그 집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엄마의 독사진을 찍어주었다. 한국 같아 보이지 않는 첫 번째 사진이었다. 사진 속 엄마는 내가 선물한, 그렇지만 사이즈를 잘못 가늠해 조금 큰 마 재킷을 입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웃고 있다.​


호수를 돌아 나와 벌꿀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는 길에 잠깐 길을 잃어버렸다. 마침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아저씨가 지나가길래 그거 어디에서 샀냐고, 벌꿀 아이스크림이 맞냐고 물어보았지만, 벌꿀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은 애초에 한국 관광객에게만 유명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아저씨도 유후인이 처음이었던 건지, 벌꿀은 잘 모르겠다며 코 앞에 있는 어두컴컴한 가게를 가리켰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빨리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안달이 난 소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마도 생전 처음 본 영어를 말하는 딸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우리처럼 벌꿀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지 못해 헤매던 다른 모녀 커플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아저씨와 대화를 마쳤다. 참지 못한 엄마가 그 할머니에게 ‘우리 딸’을 자랑하는 주책을 늘어놓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 먹은 벌꿀 아이스크림은 솔직히 그다지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하긴. 인사동에서 먹는 용수염이나 호떡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가 지금 여기 있구나 하는 자각과 거기에서 비롯된 기쁨의 충족은 일순간 청평호 같던 호수를 긴린코 호수로 바꿔 놓았고, 마미손 같던 고무장갑을 일본판 천냥 백화점의 것으로 변신시켰다. 수선화와 튤립과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피어있는 골목 어귀가 그제야 다정하게 느껴졌다. ​


“너무 예쁘다. 이런 데서 살고 싶어.”​


포도나무 한그루가 심어진 시골집에 사는  꿈이라던 엄마가 나보다   앞서 걸으며 감탄에 젖었다. 엄마가 무언가에 감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인  같았다. 해가 기우는 골목 풍경만으로도 이렇게 쉽게 감탄 사람그럴 새도 없이 살아왔구나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오후가 되며 살짝 서늘해봄바람 때문인지 코가 시큰거려졌다.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가볍게 걷던 엄마는 최근 지팡이를 짚고 걷기 운동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넘어지는데 어지러움증까지 생겨 혼자 밖에 나가는 게 무섭다는 말에 아들이 챙겨준 등산용 지팡이다. 홍매색 티셔츠를 입은 엄마가 오른손에 지팡이를 들고 세 살  아기처럼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뒤로 동생이 따라 걸으며 동영상을 찍어 보냈다.


우리 다시 유후인에   있을까. 이번에는 엄마 몸에  맞는 옷으로 다시 사드릴 기회가  생길까. 아픈 몸에 지친 표정 말고 수선화를 보고 소녀처럼  엄마 얼굴을 다시   있을까. 포도나무가 심어진 시골집에 엄마를 모실 날이 올까.


어른의 시간은 몹시도 빠르게 지나간다는 사실에, 그래서 엄마에게 남은 인생이 생각보다 길지 을 수 있다는 생각에, 또다시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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