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편지
Y에게
내일 낮이면 비행기에 타고 있겠네. 작년에 내가 김혜리 기자님의 팟캐스트를 듣고 '로테르담 영화제에서는 라이브 뮤직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대!'라고 말한 걸 기억했다가 정말 가다니. 하긴 네가 지금 영화제 일을 하고 있는 것보다는 놀랍지 않다. 고등학교 때의 나에게 "Y는 대학 졸업하고 영화제에서 일하게 될 거야"라고 미래 요정이 말해주었다면 나는 "구라 치지 말고 꺼지세요"라고 답했을걸? 당연히 공무원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네가 암스테르담 비행 표를 샀다는 카톡을 보냈을 때, 반가움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컸어. 내가 사랑하는 친구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왜 마냥 반갑지 않지? 처음에는 그 감정을 그냥 무시하려고 했어. 하지만 플릭스 버스, DBS기차를 알아보다가도 '정말 만나도 되는 걸까?'라는 마음에 자꾸 멈칫하게 되더라.
나는 새로운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계속하고 있어. 지금은 덴마크의 한 섬에서 청소일을 하며 지내. 엄마가 궁금해해서 구글 지도로 위치 공유했는데 처음으로 경악하시더라. 웬 섬에 가있냐고. 27살에 덴마크에서 청소일 하는 걸 알면 더 기가 차실 것 같아서 말 못 했어. 이 섬은 별을 관측하기 위해 최소한의 불빛만 쓴다는 걸 아시면 더 걱정하시 겠지. 오늘도 일 끝나고 슈퍼 갔다가 무서워서 죽을 뻔했어. 사람, 불빛, 자동차 모든 게 없어. 그냥 텅 빈 검은색 도화지 같더라니까.
편한 사람 하나 없이 낯선 곳에서 지내다 보니 자꾸만 내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져. 일하는 학교에서는 학생, 스태프를 포함해 내가 두 번째 아시아인이고 장을 보러 밖을 나가면 오로지 백인들 뿐이야. 이 학교에 나를 소개해준 일본인 친구가 (그 친구는 이 마을 역사상 첫 아시아계 였을지도) 워낙 상냥하고 긍정적인, 마치 순정만화 캐릭터 같은 성격이었어서 그런지 나도 같은 이미지 일거라고 기대하더라고. 여기서 청소를 하며 지내는 것도 길어야 2달, 그 시간 동안 나를 다 드러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그들의 기대에 맞춰주고 있어. 하지만 오랜 친구인 너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슬프다는 걸 눈치채겠지. 너를 보면 감쳐왔던 감정들이 터져 나와 엉엉 울 것 같기도 해. 덴마크에서 잘 지내고 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까 봐 무서웠어.
너를 만나러 가겠다고 결심을 한 건 같이 일하는 분의 영향이 컸어. 나는 한 여성분과 같이 일을 하고 있는데, 키가 180cm에 한 겨울에 민소매를 입고 2m가 넘는 무거운 사다리를 한 손으로 들고 다니시는 분이야. 모든 일에 하하하 웃으면서 덮어버리는 사람이지. 예를 들어 학교에 유명한 덴마크 영화감독이 왔는데, 그 감독에게 처음 한 소리가 "우리 학교 여학생들 꼬셔서 섹스할 생각은 하지도 마요!" 였다니까. 어느 날은 골똘히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다가 다가온 나를 보며 웃으며 얘기하더라고.
어릴 때 공부하는 것보다 몸 쓰는 일이 좋아서 글을 배울 필요를 못 느꼈어. 학교에서는 글을 익히지 못하는 선천적인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연기했지. 근데 18살 때 기차에서 우연히 십자말풀이를 하는 할머니를 봤는데 너무 멋있는 거야. 그래서 그때 글을 배우기로 결심했어. 하지만 아직도 문자를 치고 이해하는 데는 느려.
엄청나지? 더 놀라운 건, 학교 교장이 이 분에게 공동 교장이 될 생각이 없겠냐고 제안했는데 거절했데. 자기는 앉아서 싫은 소리만 해야 하는 자리는 싫다고. 청소부로 들어온 사람에게 교장의 자리를 제안한 것도 대단하고, 그 교장 자리보다 청소부 자리를 택한 건 더 대단하고. 이 이야기를 듣는데 내 모든 편견이 깨지고 머리가 어지럽더라니까.
작년에 덴마크 학교에 있으면서 가장 놀랬던 건 청소부, 교사, 목수, 요리사와 같은 다양한 직업의 학교 스태프들이 평등한 위치에서 일을 한다는 거였어. 만약 교장이 어떤 행사를 기획하고 싶다고 해도 키친에서 거절하면 끝! 물론 치과의사, 변호사 같이 고위 직종은 돈을 더 받고 사회적인 직업도 높겠지만 적어도 학교라는 직장 내에서는 직업의 상하관계를 발견하기 힘들었어. 아마도 임금 문제와 관련 있을지도 몰라. 덴마크에서는 목수가 교사보다 더 많은 돈을 받으니까.
나는 속물인지라 젊은 나이에 청소일을 하는 게 창피해. 친구들이 카톡으로 덴마크에서 뭐하냐고 물어볼 때마다 에둘러 이야기하곤 했어. 좋은 숙식을 제공받고 있지만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내 생계를 꾸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그래서 더 우울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 분을 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편견의 경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야. 난 이 분처럼 멋있는 분을 만나 본 적이 없어. 항상 자기 자신으로 타인을 웃기고, 따듯하고, 솔직하고 무엇보다 즐거워. 이 분과 같이하면 왠지 청소도 특별한 일이 되고 페인트 칠도 하나의 놀이 같아.
나는 한 번도 내가 청소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하지만 이 일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을 만났지. 이런 우연들을 생각할수록 놀라워. 이 분에게서 느끼는 건 어떤 마음인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자기 자신을 용감하게 똑바로 바라보고 타인에게 솔직하고자 하는 마음. 물론 덴마크라는 사회가 기본적으로 보장하는 직장환경과 수평적 구조의 영향도 클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 있는 모두가 행복한 건 절대 아니니 그분은 정말 특별하지. 딴 얘기지만 너에게 덴마크 인들이 얼마나 우울하고 폐쇄적인지 말하려면 하룻밤은 걸릴 거야. 그분도 덴마크 인들이 "fucking Racist"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셔.
그분처럼 내 마음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노력해밨어. 물론 내 마음속에는 창피함, 두려움이 가득했지. 하지만 너를 만나 즐겁게 한 번이라도 웃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더라고. 우리가 언제 함께 유럽에 있겠어? 나도 그냥 하하하 웃으며 나 덴마크에서 청소일 하면서 지내! 근데 미래는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하하하!라고 네 앞에 웃어버리지 뭐.
근데 평일에는 일하니까 주말만 가능한데 여기서 로테르담까지 버스로 16시간이래. 하하 우리 독일에서 만나면 안 될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