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릴 Feb 25. 2020

남자와 연애를 하면  페미니스트가 아닌 걸까

 



얼마 전 트랜스젠더 대학 합격 소식이 알려졌을 때


 해당 학교의 페미니즘 동아리 일부는 트랜스 젠더 학생 입학을 반대하는 성명문을 냈어. 해당 학교뿐만이 아니라 외부 학교의 동아리들과도 연대해 발표한 입장문에는 참여 동아리 이름들이 적혀있었고. 너는 알고 있었겠지. 네가 속한 동아리도 연대 성명을 했으니까.


3년 전 만 해도 우리는 낙태죄부터 불법 촬영물, 페미니스트에 대한 낙인 등 다양한 페미니즘 의제들을 함께 나누는 사이였어. 같이 학회나 세미나를 한 적은 없지만, 카톡으로 "OO 기사 봤어?" "하 그니까 정말 화나더라"와 같은 대화를 통해 함께 분노하는 든든한 친구였고.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내가 북유럽을 다녀온 후 바뀌었던 것 같아. 오랜만에 돌아와 마주한 자리에서 내가 예전처럼 페미니즘 이슈를 꺼내자 너는 가만히 듣더니 "너는 정말 쓰까구나"라고 말했지. 내가 "쓰까"가 뭐야 라고 묻자 너는 대화 주제를 바꿨고.


네가 나에게 "너는 쓰까"다 라고 말한 이후 우리 사이 이해할 수 없는 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어.  언젠가 '특정 소수자를 배제하며 페미니즘 운동을 할 수 없다'는 나의 의견에 너는 '그런 식으로 하면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거야'라고 말했지.


너는 나를 답답해했고 나는 네가 틀렸다고 생각했어.


우리 트랜스젠더와 페미니즘 운동을 함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나? 너는 트랜스젠더가 여성성을 과장되게 수행해 여성성을  강화시킨다고 말했고 나는 사실 생물학적인 여성이란 범주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에 트랜스젠더를 배척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지. 대화는 거기서 멈췄어. 하지만 그날 해결되지 못한 대화가 트랜스 젠더 입학 반대 문을 읽게 되는  순간 다시 떠오르네.


나는 묻고 싶었어.

어떻게 이런 반대 성명에 동참할  있었어?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소외당하는 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페미니즘 운동 아니었어?

여성들의 공간을 위협받는다는 불안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성명서를 읽고 나서 질문들이 한없이 쏟아졌지만 나는  질문들을 쓸어 담지 못한  그저 잠잠해지길 기다렸어핸드폰에서 너와의 카톡을 찾아  자를 입력하다가 핸드폰 잠금 버튼을 눌렀지.



*트랜스젠더 입학 관련한 주요 질문과 논의는 아래  기사에  담겨있습니다. 굳이 제가 정리하는 것보다  기사를 읽으시는  도움이   같아 링크 남깁니다.


-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 “남의 권리 빼앗아 내 권리 만들 수 없다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2201416081614

- 트랜스젠더 문제에 중립? 가장 위험한 입장 :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002210700001&fbclid=IwAR1oREcSug8iv5s7vh-b7N-eIamcHhfBfFChsSp64PPzialyi2q6OIBwZZ0 




나 연애를 시작했어.


트랜스 젠더 학생의 입학 논란이 있기 며칠  우리 홍대 카페에서 만났잖아. 햇살이 들어오던 2 카페테라스에 앉아 대화 사이 정적에 네가 길가의 사람들을 마냥 바라보고 있었을 , 나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계속 고민했지. Y,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어. 그런데  자신에 대해  사람에게 말하고  사람에 대해 믿음을 가지게 되고 점점  사람이  삶에 스며드는 모든 과정들이 혼란스럽고 불안해.  사람은 내가 헤어짐을 이야기할  폭력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나를 성적 대상화하지는 않을까?


 훅스  <사랑은 사치일까> 읽으며 나의 불안과 혼란이 가부장제에서 비롯한 당연한 감정이라는걸 깨달았어. 과거에는 막연한 불안이었다면 페미니즘을 배운 후에는 의식적으로 깨닫고 말로 표현할  있게  거지.

사랑에 서투른  아니라 가부장제  두려움과 안전에 대한 걱정이었던 거야.


여자들은 남자를 처음 만나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가 위협적인지 아닌지를 빠르게 판단한다. 여성이 남성에게 처음으로 나타내는 반응이 두려움 혹은 안전에 대한 걱정인 한, 여성이 진심으로 남성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은 오지 않는다. 여성들은 자신의 삶에 남자가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그들은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남자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알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남자를 사랑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고백할지 모른다. p219, 사랑은 사치일까, 현실문화


 생각 정말 많잖아. 끊임없는 질문과 가라앉지 못하는 불안에 머리가 터질  같았어.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적으로 나오진 않을까. 연애가 나의 커리어에 지장을 주진 않을까.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이게 되면 어떡하지. 엘리자베스 워첼이 말했지 "어떤 선택을 내려도 결국 사랑에는 희망도 효용도 없다는 생각만 강화되는  같았다"  


우리  세계에서 사랑을 이야기할  있을까?




내가 새로운 남자와 연애관계를 시작했다고 말하면,

네가 나를 '남자 못 잃는' '입페미'로 바라볼까 무서웠어.


하지만 그날 난 결국 너에게 아무 얘기도 하지 못한 채  먼 이야기만을 맴돌았지. 궁금하지도 않았던 동창의 안부를 이야기하고, 이제는 나이가 드나 봐 술 마시면 피곤하다고 푸념하며 함께 웃었잖아. 서로 언급해서는 안될 주제들에 대해서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아.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온라인 공간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그 차이들. 한국 남성과의 관계 맺음과 여성 범주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


오혜진은 "안티 페미니즘에 맞서 성차별이 엄존하는 현실을 강변하고 페미니즘을 '옹호'해야 하는 위치에서 자신의 페미니즘을 구성하고 있는 20대 페미니스트들이 '한 마음'인 줄 알았던 페미니스트들 간의 차이 또한 계속해서 마주하게 되면서 겪는 곤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범주화한다.

1)  남성에 대한 불신과 변화에 관한 전망  : 남성과 함께 하는, 소통하고 설득하는 페미니즘이 가능한가?

 2) 여성 범주를 둘러싼 논란과 페미니즘 진영 구분 : 페미니즘 운동의 주체와 연대에서 퀴어 및 트랜스 배제할 수 있는가?   

출처 : 오혜진, 20대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페미니즘'과 그 의미,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여성학 전공 2019.  


내가 새로운 남자와 연애관계를 시작했다고 말하면, 네가 나를 '남자  잃는' '입페미' 바라볼까 무서웠어.

4B 운동에 함께 하지는 못할 망정 새로운 '한남'과의 연애라니.

언제부턴가 네가 '한남' 구제 불가능이라고 말했던  떠올랐어. 나도 웃으며 동의했잖아. 이성애 로맨스는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적인 문화에서 벗어난 남성을 찾기란 불가능하고, 연애가  삶의 필수 요건이 아니라는  아는데,  아는데도  사람은 자꾸만  삶에 스며들어. 나는 혼란스럽고.


 4B는 비혼, 비출산, 비 연애, 비 섹스를 의미한다. 이성애를 바탕으로 한 섹스·연애·결혼·출산이 여성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기존 가부장제를 공고히 한다는 인식하에 4B 운동은 20대 여성들 사이 페미니즘 운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애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법 촬영물 범죄와 데이트 폭력,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과 같은 만연한 사회 문제들을 감수하면서 남성과 연애를 하기보단, 더 많은 여성들과의 연대에 힘을 쏟겠다는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하다.


 얼마   트위터에서 '결혼을 하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없다)'라는 주장이 논란이   알아?

결혼이 남성 중심 사회를 유지시키는 수단이기에 결혼  여성은 가부장제의 부역자라는 주장이었는데 

이에 기혼 페미니스트들은  불합리한 결혼제도 속에서 가부장제를 해체하기 위해  자신들이 어떠한 노력들과 투쟁을 일상적으로 벌이고 있는지 이야기했지만 서로 합의를 찾지 못한  논쟁이 사그라졌어.


너와 내가 쉽게 렏펨과 쓰까(교차) 나눠질  있는 걸까.

어쩌면 너는 이번 트랜스젠더 입학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입학 포기까지의 사태를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 기혼여성 또한 페미니즘 운동을 함께   있다고 믿고.  하지만 나는 너에게 물어보지 않았고, 너도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으니 추측만  .  


나는 너와 이야기하다 보면  '너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야!'라고 서로 오해할까 .

우리의 논쟁이 페미니스트 자격 검증이 되어버릴   두려워. 그게 아닌데. 정말 아닌데.

우리는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각자의 자리에서 앎과 삶의 괴리에 괴로워하면서.

그리고 세상에 싸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너와 싸워야 한다니!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어.


페미니즘에 올바른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나의 페미니즘이 아닌 페미니스트 내부 논쟁을 통해 다양한 색의 페미니즘 운동을 함께 만들어   있을까

내가 탈코르셋이 극단적이고 획일적인 운동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운동에 동감해 실천했던 것처럼 말이야.  




 나를 더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 자신과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교감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누군가와 사랑하게 되면 그런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한다 (…) 종종 우리는 누군가와 맺는 관계가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즉 타인과의 관계는 그저 내면의 삶의 확장에 불가하며 자기 자신과 열려 있는 관계를 맺을 때에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말이다_ 존 웰우드 , 사랑과 각성


페미니즘을 배우고 말한 지 5년이 지났네. 처음에는 나의 언어를 찾았다는 기쁨에,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구조가 문제였다는 인식에,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동료들을 찾았다는 든든함에 마냥 기뻤어. 하지만 최근 나의 페미니즘이 확장이 아닌 단절이 되어버릴까 두려워.


페미니스트 동지들을 만나면 '교차 쓰까'와 '렏펨'이라는 진영 구분이 머릿속에 맴돌아 어떤 대화 주제를 꺼내야 할지 고민이 들어. 20대 남자 25.9%가 페미니즘에 강한 반대를 보이는 현실 속에서 또래 남성들과 대화를 한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고. 그래서 요새 계속 책 속으로 파고드나 봐. 누군가와 논쟁하고 설득하는 과정 자체가 부담스럽고 지쳐서.


위에서 언급한 최근에 만나기 시작한 그 사람과의 관계도 비슷해. 관계에 고민이 들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닌 책을 찾았어. 마치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그러다 예전 나의 심리 상담사 분이 했던 말이 떠올랐지. "연애 혼자 하는거 아니잖아요. 혼자 고민하고 그걸 다 끌어안아도 결국 상대와 같이 해결해나가야 해요."  세 번째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이고(말하는 순간 혹시 얘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페미 만난 썰이라고 올리면 어떡하지 싶더라) 나에게는 중요한 기준이니 답해주면 좋겠다고 말하며 아래 질문들을 던졌어. 아래 질문들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의 기본 조건이라고 여기는 가치들이야.


단체 카톡방에서 여성 동기를 희롱하거나 모욕한 경험 혹은 방관한 적은 없는지

어떤 유튜브, 웹툰, 음악을 소비하는지(여성 혐오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성매매 경험이 있는지

성소수자를 지지하는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친구들과 페미니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지



내가 어떤 부분에서 불안을 느끼는지 깨닫고  불안을 숨기지 않고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20 초반의 나였다면 해내지 못했을 거야.  오히려  불안 때문에 타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겠지.   사람 답변은 어땠냐고? 물론 부족한 답변들이었어. 내가 그런 고민들을 하고 있는  전혀 몰랐대. 나는 그게 너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차별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거라고 답했지. 결국 그가 페미니즘 책을 읽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어. 아직 확신이 들지 않지만  사람을   지켜보고 싶어. 나를 자주 웃게  주는 사람이거든. 같이 있으면 따뜻한 차를 마시는 기분이야. 따듯함이 조금씩 스며들게 해주는 사람. 앞으로  물어보고  이야기하고  보려고.


Y, 너와도 그러고 싶어. 최근 이슈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를 보며 어떤 감정이 드는지.  각자의 자리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면 되니까. 그러다 우리는 마주치고 다시 흩어지겠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지치지 않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 싶어.  우리가 처음 페미니즘이라는 빨간 약처럼 먹게 된 건 페미니즘이라는 인식관이 우리를 더 자유로워지고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었잖아.  


근데 배울수록  어려운 일이었어. 페미니스트한테는 요구되는   이리 많은 거야? 

여성에서 시작한 페미니즘이 장애, 인종,  정체성, 계급, 환경까지 나아가니까 정말 죽겠더라.

 해도 욕먹고  해도 욕먹는 삶의 반복이었지. 분명 지치는 일이었어.


하지만  자유로워진  또한 확실해.

 사람에게 저런 질문을 던지고, 나의 불안을 명확히 이야기하니 나는 한결 가볍고  스스로를 지킨 느낌이었어.  이상 마냥 불안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신이 마음에 들더라니까.


너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거라고 마냥 추측하는 거 그만하고 싶어. 우리가 논쟁지점 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서로 상처받거나 지치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없어.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적듯이 계속 노력할거야. 노력이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세계가 이대로 닫힐테니까.  





*표지사진: 동백꽃 필무렵

매거진의 이전글 여자배구 3회 연속 올림픽 진출이 가능했던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