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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샘 Dec 06. 2022

김연수 작가를 만나던 날

김연수 작가 낭독회에 다녀와서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정하게 겸손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대화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모습이 좋았다. 





작가를 만나기 전


공식적 행사명은 '김연수 소설가 낭독회'다. '작가와의 만남'이란 내게는 거창하고 멀리 있는 일이었다.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작가에 매료되어 작가를 만나기 위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그런 열성 팬인 적이 없었다. 나는 김연수 작가도 그동안 이름만 잠시 들어봤을 뿐, 책을 읽어본 적도 없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작가는 1993년에 등단했단다. 1993년이면 한참 큰 애를 낳고 육아는 단 한 번만 경험하겠다는 결심을 하던 때이기도 했다. 뭐, 이렇게 늘 변명을 하곤 한다....


결론은 김연수 작가를 이제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최근에 나온 신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 '는 나같이 상상하기 좋아하고 계획하기 좋아하고 늘 뭔가 시도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위로를 주었다.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야기 많이 듣고,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핀잔 주는 사람들 앞에서 갈수록 다리 관절과 아래 어금니가 시큰거려 생활에 불편을 초래하는 경험을 하던 나는 '네... 그렇죠.... 이젠, 안 되겠죠...'하고 주눅이 들곤 했었다.


카르페디엠!이라는 멋진 표현에도 의구심이 들 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때로 공허하기도 했다. '뭘 위해? 어떤 상상으로? 어느 정도 규모로?' 김연수 작가의 책 속에서 나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미래를 기억하는 것, 어떻게든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바로 그 기준이 될 수 있겠다. 이제 나는 비로소 현실에 충실한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낭독회


행사장은 서점. 내가 사는 지역에서 서점까지는 차를 타고 30분은 가야 하는 거리다. 모처럼 도시로의 여행 같았다. 서점 2층에 50-60여 명 정도면 꽉 찰 것 같은 공간 앞에 작은 테이블과 스탠드, 그리고 뒤편으로 스크린에 김연수 작가의 모습이 보였다. 젊은 시절의 작가는 수줍은 듯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어버린 자유로운 영혼 같았다. 

테이블은 작은 꽃과 작가의 책들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고, 한 사람을 위한 의자만 놓여 있었다. 작가는 그 의자에 앉아 그의 미발표 글들을 낭독해 주었다. 


하나는, 진주를 좋아한다

음악은 백예린, 산책. 

이번에 발표한 소설집, '진주의 결말'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진주'란 글 초입에 언급된다. 다 읽고는 잠시 음악을 감상한다. 작가의 진주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첫여름

음악은 카더가든 with 오존, 긴 겨울. 

처음엔 작가의 실제 이야기인 줄 착각해 검색해 볼 뻔했다. '작가의 엄마가 정말 배우였어?' 하고.

나중에 소설이란 걸 깨달았지만, 다 읽고 울컥했다. 낭독 뒤 음악을 듣는 내내 감정을 가라앉혀야 했다.




작가의 이야기


나는 작가의 이전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어, 젊은 시절 작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번 책모임 때 이 책을 추천한 분이 '작가의 생각이나 성향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만 해요'라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스크린에도 미리 작가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올라왔는데, 같은 내용이다. 작가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이야기의 주제로 삼은 듯했다.


작가는 내년이면 소설 쓴 지 30년이 된다고 한다. 40대 때, '글을 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어 거의 10년 정도 글을 쓸 수 없었다고. '멋진 글을 쓰고 길이 남을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문학도 새로운 조류가 나타날 것이고 결국엔 밀려나게 되지 않을까?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라며 방황을 했다고 한다.


일곱 해의 마지막, 백석 이야기를 쓰면서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단다. '백석은 실패한 사람으로 사라진 것인가?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 아닌 본인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한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본다고.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은 현재를 바꾸고, 의미를 찾는 일이라며, 아마도 백석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을 거란다. 그것은 미래의 목소리, 후대 사람이 말하는 목소리, '당신은 위대한 시인이야!'라는 목소리였을 거라고.. 그래서, 그는 당시로서는 실패한 듯 보이지만 스스로 절필을 선택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그의 시를 사랑하게 될 것이란 미래의 기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후, 유명한 작가가 되기보다 '소설의 정체성'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싶었고,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면서 쓴 책들이 '청춘일기', '일곱 해의 마지막', '청춘의 문장들' 그리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란다.


요즘은 한 가지를 늘 생각한단다.

"지금, 기분 좋은 상태가 되자." 

이것은 미래를 기억하는 상태란다.


그리고, 본인의 3가지 결심을 소개해 주었다.

첫째, 기분 좋은 상태가 될 결심을 하자


나이가 들면서 두 가지를 깨닫는다고. '몸이 내가 아니다' 그리고 '마음이 내가 아니다'. 몸은 내가 빌려 쓸 뿐이다, 성가시지만 고쳐서 써보자, 마음도 내 것이 아닌냥 자꾸 지 맘대로 흘러갈 때가 있다, 마음도 치료하며 고쳐서 쓰자. 이렇게 결심했단다. 작가가 활용하는 팁도 들려줬다. 힘들 때는 나무를 바라본다고. 어디 흔들리는 가지가 있는지를 살펴보며, 그렇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고쳐본다고 말이다.


두 번째, 타인에게 다정해질 결심을 하자


나부터 다정해야겠다고 결심했단다. 세이브 더 칠드런과 방글라데시를 방문했던 경험을 나누었다. 가임기 나이가 되면 무조건 아이를 낳도록 종용받은 방글라데시 여성들에게 피임키트를 나눠주는 일을 했는데, 그저 2달러지만 그들에겐 인생이 바뀌는 일이었단다. 다정할 기회가 오면 바로 다정해지자라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였다고. 그러면서, 남을 돕는 일은 거창한 일이 아니며, 작은 것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인디언의 선물 경제에 큰 감명을 받았다며, 루이스 하이드의 책 '선물'을 추천해 주시기도 했다. 무언가를 팔아 바로 보상을 받는 개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그것이 나중에 돌고 돌아 내게도 도움받을 기회가 생긴다는 개념이라고. 


작가는 자신만의 다정을 연습 중이란다. 상대방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뭐라고 이야기할지 고민될 때는 그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따라 말해주는 것이라고. 이렇게 다정을 연습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세이브 더 칠드런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로 내가 고민했던 지점들을 작가도 똑같이 고민했다는 점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작은 도움이 뭐 큰 변화가 있겠어, 라며 외면하곤 했던 지난날들. 그래도, 도움을 주지 않으면 내가 견디기 힘들어 약간의 기부를 결정했던 순간들. 그러고도 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해 그것이 더 힘들었던 나중의 기억들이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작가는 다정을 연습하며, 내게도 다정을 전달해 주었다. 고맙다.


작가는 매일 결심하자고 한다. 어떤 선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것과 결심하지 않는 것은 다르지 않겠느냐고. 

제대로 해내지 못하더라도 계속 결심하면 그 마음 변치 않게 되고 조금씩 앞으로 나갈 것이라고. 전혀 결심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것이니까 두 방향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기후위기를 걱정할 때 플라스틱 병 하나 덜 쓰는 세계와 하나 더 쓰는 세계는 다르다고. 그렇게 작은 결심을 계속해 보자고 했다.


셋째, 길을 잃을 결심을 하자


어렸을 적에는 길을 잘 아는 택시운전사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자꾸 버스도 잘 못 타는 자신을 보면서, 이젠 길을 잃어도 느슨해지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려고 한단다.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학과를 바꾸는 바람에 도서관에서 보낸 세월이 작가로 서는 밑거름이 된 것처럼 현재 일어나는 일들이 어떻게 삶의 풍경을 바꾸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때로, 속수무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는데, 그때는 옆에서 도와주려는 사람을 신뢰하기로 했단다. 속수무책일 때 괴로워하면 정말 길을 잃는 것이고, 누군가를 신뢰하게 되면 어쩌면 길을 잃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나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이 나에게 보내는 따뜻함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것이다.


작가는 버스를 잘 못 타면, 바로 내려 되돌아가지 않고 그냥 가 본단다. 어딘가에 내리면 뭐라도 사던가 좋은 카페라도 간다고. 마치 거기에 간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 기분이 좋아진단다. 


김연수 작가는 이제 나이 60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래서, 유연해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 탓 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긍정성은 치열한 번뇌와 좌절 속에서 찾은 것이겠다. 그의 소설집 속, 진주의 물음 '과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가능하긴 할까요?'라는 질문은 작가 본인의 젊은 시절 질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주가 이해의 길을 걷도록 했다.


질문들


많은 질문들 중 기억나는 작가의 답변들이 있다.


가파도에서 잠시 머물렀던 시간들이 있었고, 여성 귀농인들이 농사를 지은 후 서점에 와서 인문학 강연을 듣는 모습에 감명받았단다. 그들 앞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고,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이 본인이 할 일이라고 결론 내렸단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그림책 번역에 참여한 것은 딸을 위해서였고, 이제는 딸이 커 버려서 번역도 안 한단다.


1940년대 외국작가들에 대해 공부하고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밤새 술 마시면서 시를 쓰는 작가들 말고, 직업으로서의 성실한 작가의 삶을 살았던 외국작가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나는 하루키 밖에 모르겠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오후에는 조깅과 수영을 한다는 그 하루키 말이다. 하루키 책도 두어 권 정도밖에 읽어보지 못했다. 


1인칭으로 작품을 쓰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라고도 했다. 바로 주인공으로 빙의되어야 하는 일이기에. 차라리 자신이 경험한 지독한 사랑이야기를 쓰는 일이 정말 편할 수도 있다면서.


나도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첫 번째 질문. 

책 전체를 통해 천주교 박해로 희생된 분들을 거론했다. 정난주, 정약용 형제들 그리고 조선시대의 성녀, 바르바라까지. 어떤 생각을 전하고 싶었나?


어렸을 적부터 천주교 신자였단다. 신념 하나만으로 고통과 희생을 견디는 것에 대해 궁금해했다고. 결론은 그들이 '죽음 앞에 기뻐한다'는 것이란다. 박해를 당할수록 하느님 곁으로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그 신념은 죽음을 뛰어넘는 것이었겠다고. 백석도 본인의 선택으로 그 기쁨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추축 한다고.


2014년 교황이 방문했을 때의 사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 의금부에 갇혀 희생당했던 천주교인들에 대한 시복식은 뜨거운 감동이었다고. 200년 전 기꺼이 기뻐하면서 순교했던 그들은 200년 뒤 교황이 찾아와서 시복식을 할 것이라는 미래의 소리를 들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단다.


작가는 순교자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미래의 소리에서 찾은 것이고, 프란체스코 교황의 시복식은 그래서 감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래를 통한 현재 행동의 결심은 천주교 순교자들을 이해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책 전체를 통해 흐르는 시간의 넘나듦 속에 순교자는 메시지를 전했고, 그렇게 우리는 과거와 미래로 연결된 200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작가는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

진주의 결말 이야기를 힘들게 읽었다. 달에 갈 수 없어도 달에 가는 것처럼 희망을 가지라는 말에 방화를 결심한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굉장히 힘들게 쓴 소설이라고 했다. 특히 결말을 내기 쉽지 않았다고. 앞서 낭독한 '진주 이야기' 첫 부분에 쓰다 말다 한 소설이 바로 그 이야기였단다. '카오스 같은 상황에 논리적인 반박이 가능할까? 진주가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사실, 논리적인 결말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단다. 치매를 앓는 것 같은 신의 마음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었다면, 방화라는 맥락 없는 결말이 차라리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었단다. 이 부분에서 참 많은 시간을 할애해 책에 있는 내용을 언급했다. 독자로서뿐 아니라 작가로서도 결말 부분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쓰고 나서야 내렸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다.


작가와의 만남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뜨거움을 느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사실 작가도 써 내려가기 힘들어했다는 그 지점에서, 역설적이게도 나는 소설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정하게 겸손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대화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모습이 좋았다. 



2022년 12월 3일



* 낭독회 글 파일은 '진주문고'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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