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 차, 예정에 없는 쉼
어쩌면 이렇게 예정에 없는 마을로 들어오고
예정에 없던 숙소에서 이제까지 오며 가며 만났던 사람들과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
이것이 까미노의 속살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길 위의 삶이 가지고 있는 수수하고 내밀한 모습일지 모른다.
매일매일 마음이 바뀐다.
때로는 잔과 캐시와 함께 있는 것이 좋고 고맙고,
때로는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
언어의 문제 때문인지, 사고방식의 문제인지 잔과 캐시는 금방 친해진 것 같은데, 아직도 난 좀 외떨어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왠지 내가 이들에게 점점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잔은 공간감각이 뛰어나 지도를 보고 길을 잘 찾는다.
사실, 까미노에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때로 나 혼자 걷는 순간도 많고, 우리셋 만 달랑 걷는 구간도 많았다. 이때 잔의 감각이 발휘된다. 마을에 도착해서 알베르게를 찾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작은 마을은 조금 돌아다니면 되지만, 조금 큰 마을에서는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그때마다 잔이 앞장선다.
캐시는 워낙 말하기 좋아하고 누구에게는 관심이 많은 성격이기도 해서, 날 참 많이 도와준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내가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까미노를 선택한 것도,
여행을 혼자 하기로 결정한 것도 모두 좀 더 주체적인 나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어쩐지 나는 주체적이지 못하고 계속 도움만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들처럼 고마운 친구들도 없다.
내 어깨가 아프다니 잔은 계속 내가 배낭을 멜 때마다 배낭을 들어 잘 메도록 도와준다.
캐시도 섬세하게 배낭의 끈을 잘 조이도록 봐주고, 본인의 배낭이 더 무거운데도 꼭 물을 잔뜩 가지고 다니며, 물이 떨어지면 본인의 물을 마시게 해 준다.
고마운 이들이다.
가끔씩 함께 걷는 것이 불편을 주는 것 같아 고민이 되다가도 이렇게 한 두 번 고마움을 겪으면 난 감동하고 또 함께 걷는다.
오늘은 원래 28km를 걸으려고 했으나, 내가 너무 힘들어 ventosa에서 묵자고 했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제안했는데, 캐시와 잔은 또 선뜻 그렇게 하자고 응해 주었다. 고맙고 또 고맙다. 고마운 마음 때문에 자꾸 내가 불편한지도 모르겠다…….
벤토사에는 사설 알베르게밖에 없었다.
들어가 보니 가격은 좀 비싼 편이었는데, 깔끔하고 참 예뻤다.
도착하자마자 걷느라 수고가 많았다며, 차를 한 잔 주는데 참 감사했다.
이런 차 한 잔의 대접 같은 것은 사실 그동안 알베르게 뮈니시빨 (공립 알베르게)에서는 받아보지 못했었다. 어디선가 은은한 향 냄새도 났다.
방 하나에 4개의 침대가 있고, 무척 깨끗했다.
이 작은 마을의 범상치 않은 알제르게가 마음에 든다.
가격은 싼 대신 정말 도떼기시장처럼 시끌벅적한 알베르게에서만 묵다가 이곳에 오니, 왠지 하루의 도보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이곳 알베르게는 아마도 계속 기억될 것 같다.
온갖 꽃들이 활짝 핀 아름답고 소박한 정원과 자그마한 빨래터와 벤치가 조화롭게 배치된 뒷마당은 참 아늑했다.
뒷마당에서 빨래를 하다 브라질에서 온 드니스를 만났다. 브라질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교수라고 한다. 지금은 안식년이고. 무척 다정다감하고 정이 많게 보였다.
어쩌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냥 생각나는 것이 아마존이라 아마존을 지켜달라고 했더니 말이 많아진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개발해서 걱정이라고……^^
하여튼 나는 그녀가 맘에 들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한 눈에 반할 것 같은 (예쁘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외모에다 말도 시원시원하게 하고 무척 친근했다.
노란 리본을 주었더니, 너무나 고마워하면서 커피를 사주고 또 작은 조개를 준다. 목걸이로 하면 좋을 것이었다. 그녀는 인기가 많을 것 같아 보였다. 자꾸만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것이 좀 걱정되긴 했지만.
그녀도 함께 걷는 일행이 있었다. 독일인 남자였는데, 덕분에 그 남자에게서 말린 자두를 간식으로 얻어먹고, 파스타도 먹으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우리는 밖에서 식사를 할 예정이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좀 미안했다.
드니스는 우리가 식사하는 식당으로 불쑥 찾아왔다.
우리는 저녁 후의 시간을 맥주를 마시며 함께 할 수 있었다.
드니스가 담배를 피워야 한다며 밖으로 나가니, 스페인 남자가 합석해도 되냐며 식사를 주문했다.
우리는 모두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이름을 라파엘이었다.
스페인사람이라니 우리가 물어볼 것이 많았다.
스페인 음식에 대한 것, 스페인을 여행하면 어디를 가면 좋을지 등. 그는 정말 붙임성 있는 젊은이였다. 친절하고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또 다른 친구들을 사귀는 중이다.
새로운 만남은 참 즐겁다.
어쩌면 이렇게 예정에 없는 마을로 들어오고,
예정에 없던 숙소에서 이제까지 오며 가며 만났던 사람들과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
이것이 까미노의 속살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길 위 삶의 수수하고 내밀한 모습일지 모른다.
이렇게 작은 마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 중에서도 또 다른 색다른 사람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 브리얼리의 책을 보고 그가 제안한 루트를 따른다.
가장 많이 가는 코스를 따라 걷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머무는 마을도 같아진다.
다들 뿔뿔이 걷다가 같은 마을에서 다시 만난다.
그곳의 알베르게는 싸긴 하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심하게 말하면 수용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렇게 예정에 없는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는 숙소에 들어서니,
또 다른 만남과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삶도,
그럴 것 같다.
늘 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혹시 남들 가는 길을 따라가기 힘들면 살짝 쉬는 것도 좋겠다.
가까운 쉼터에 가보는 것도 좋겠다.
그곳에는 또 그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더 속 깊은 사랑을 체험할지도 모른다.
벤토사는,
그렇게 내 마음의 작은 타운으로 기억될 것 같은 예감이다.
2015년 8월 29일, 벤토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