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더를 만난 날

# 10일 차, 함께 밥을 먹는 인연

by 아샘
오는 길에 마르크가 라벤더를 가리킨다.
정말 길가에 지천으로 라벤더가 피어있었다.
함께 라벤더를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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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걸은 지 열흘이 다 되어간다.

만약 36일을 예정한다면 1/4을 걸은 셈이고 45일을 예정한다면 1/5을 걸은 셈이다.

어제는 너무 힘들었는데 오늘은 좀 낫다.

오늘 나는 26km 정도를 걸은 것 같다.


내일은 좀 더 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제 만난 드니스와 독일남자를 오며 가며 계속 만났다.

드니스는 너무 덥다며 숄을 그럴싸하게 말아 머리에 썼다.

역시 멋졌다.

독일남자의 이름은 플로렌.

먹는 것을 좋아하는지 배가 많이 나왔다.

오늘은 카페에서 만났는데, 헤드랜턴을 꿰매고 있었다.

나의 선입견이겠지만, 먹는 것 좋아하고, 배 나온 남자가 바늘에 실을 꿰어 끊어진 랜턴 줄을 꿰매는 모습이 매우 신선했다.

꽤나 두꺼운 책도 가지고 다니면 읽었다.

그래도 배낭이 가벼워 보였다.

역사와 과학에 대해 관심이 많은지 어제는 타임머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니,

오늘은 예전에는 인간이 동물과 자연의 신을 믿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영어는 캐시의 영어보다 알아듣기 쉽다.


같은 알베르게로 올 줄 알았는데, 없다.

조금 아쉽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과 함께 걷고 싶었는데, 나의 일행을 떠날 수가 없다…….

이것 또한 삶인가…….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함께 살수 밖에 없는…….

우리 모두는 누군가가 불편하지만 때로는 그들이 없으면 또 길을 걷기 힘든…….


때로는 그들이 날 기다려 주니까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들이 내 어깨 괜찮으냐고 물어봐주니까 고마운 것이다.

때로는 내가 더 이상 걷기 힘들다고 쉬면 어떻겠냐고 할 때 흔쾌히 마음 내주니까 또 감격하는 것이다.

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연 따라…….

가게 될 것이다.

아마도…….



어제 한번 예정에 없던 마을에서 쉬다 보니, 오늘도 역시 책에서 제시하지 않은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이 호스텔 역시 개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옛날 집을 개조한 것 같았다.

왠지 정감이 가고 꽤나 운치가 있다.

꼭대기 층에는 작은 예배당도 갖춰져 있다.

호스텔 가격은 7유로, 저녁을 7유로에 만들어 준단다.

작은 마을이어서 식당도 없는 듯했다.

우린 호스텔 주인이 만들어주는 저녁을 먹기로 했다.

오늘도 만만치 않은 코스였으나,

'today is another beautiful day.' 라 잘 걸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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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벤토사 알베르게에서 라벤더를 한 움큼 따서 걸어 들어오는 남자를 만났었다.

내가 너무나 예쁘다면서 물어보니, 라벤더라고 했다.

난 라벤더를 보지 못했는데, 그가 오는 길에는 많았다며 주겠다는 걸 괜찮다고 했었다.

그는 프랑스남자였던 것 같았다.

일행이 있었는데, 프랑스어로 서로 얘기했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묵은 숙소에서 이들 일행을 만났다.


오늘도 그를 만나 반가워서 인사를 했는데, 오늘은 뭔가 열매를 따 가지고 들어왔다.

뭐냐고 물어보니, 맛있는 과일이라며 먹으라고 하나 준다.

먹어보니 맛있었다. 배 같기도 하고, 사과 같기도 했다.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의 이름은 마르크라 했다.



마르크 일행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숙소주인이 만들어준 수프는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바게트와 수프, 와인 그리고 후식으로 직접 만든 요구르트에 무화과 잼을 대접해 주었다.

와인도 훌륭히 숙성된 최고의 맛이었고, 요구르트는 내가 이제껏 맛보지 못한 진귀한 맛이었다.

모두들 감탄했고 고마워했다.


저녁 후 마르크가 샘이 있는 곳에 가자고 했다.

거기서 발을 담그면 피로가 싹 풀린다고.

우리 모두 마르크를 따라나섰다.

작고 귀여운 샘이었는데, 발을 담그니 아주 차가웠다.

그렇게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면 좋다고 해서, 온몸을 떨며 발을 담갔다.


오는 길에 마르크가 라벤더를 가리킨다.

정말 길가에 지천으로 라벤더가 피어있었다.

함께 라벤더를 꺾었다.

그리고는 숙소의 식당에 같이 앉아 라벤더 꽃을 땄다.

그렇게 따서 바람이 통하는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가란다.

나는 없어서 휴지에 싸서 비닐 주머니에 넣었다.

냄새가 좋았다.

오늘밤 머리맡에 두고 자면 좋다고 조언해 주었다.

고마웠다.

그의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


그는 영어가 서툴다. 대신 내가 프랑스어를 알아들으니 서로가 대화가 통했다.

나는 때로 영어로 때로 서툰 프랑스어로 말했다.

그는 프랑스어를 쉽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대부분 잘 알아들었다.

그는 핵발전소에서 일한다고 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의 일행들은 캐나다에서 왔다고 했다.

모두들 나이가 있는 여성분들이었다.

함께 걷긴 하지만 내일은 혼자서 걸을 예정이라 했다.

물론 숙소에는 함께 묵을 예정이라고.

왠지 조금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내가 활기차게 웃어주니 나보고 웃는 게 좋아 보인다고 한다.


오늘도

또,

감사한 날이다.




2015년 8월 30일, 시루에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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