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일 차, 소나기 그리고 영화
아, 이제 슬슬 몸이 아플 것 같다…….
다행히 샤워물이 따뜻했다.
난 샤워실에 쪼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따뜻한 샤워물을 등으로 받아냈다.
소나기가 온다는 예보를 들었지만 아침 날씨는 좋았다.
새벽녘에 숙소를 나와 걷기 시작하자마자 마르크를 만났다.
마르크가 가려는 길과 우리가 가려는 길이 달라 처음에 서로 혼동이 되었지만,
잔이 또 감각을 발휘해 길을 잘 찾았다.
혼자 길을 나선 마르크에게 안내를 잘해주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침 첫 마을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주로 마르크와 함께 걸었다.
마르크가 영어를 잘 못하기도 했고,
잔과 캐시는 프랑스어를 또 전혀 못했기 때문에.
또 어제부터 우리는 라벤더로 서로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조용조용히 말하는 마르크는 새벽이 좋다며, 새벽하늘의 모습을 카메라에 많이 담았다.
나도 아침을 좋아한다며, 나의 닉네임이 '아침'이라고 말해주었다.
혼자 걷고 싶어 하던 마르크였기에,
첫 번째 마을이 나오자 우린 아침을 먹으러 카페로 들어가고,
마르크는 혼자 걷기 시작했다.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잔이 독일인들 아저씨들을 만났다.
그들 중 한 명이 음악교사라며 이런 인연이 다 있을 줄 몰랐다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이들과는 중간마을에서 헤어졌는데,
이때부터 하늘이 많이 흐렸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비가 오니 그 마을에서 쉬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사실, 이제 나는 쉬자는 말을 하기가 좀 미안했다.
나 때문에 팜플로나에서 하루 쉬었고,
또 엊그제는 원래의 목표지점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마을에서 쉬었기 때문에.
그리고 몸 상태도 좋아서 더 걸을 수 있었다.
물론 잔과 캐시도 더 걷는 걸 원했다.
그래서 우린 나름대로 비옷과 배낭 커버로 비를 대비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조금씩 내리는 빗 속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하늘에서 양동이로 물을 붓는 것처럼 내렸다.
타운을 이미 벗어난 터라 다음 마을이 나올 때까지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나는 비를 맞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것 또한 새로운 경험이라며…….
하지만, 굵은 빗줄기 앞에서 내 얼굴은 점점 불편해져 갔다.
바로 다음 마을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아무 순례자도 머물지 않았을 것만 같아 보이는 알베르게를 찾아냈다.
이곳 주인은 그리 친절하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침대의 위층을 짐 칸으로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건 마음에 들었다.
이 알베르게에는 오로지 우리 셋 만 머물렀다.
우리 세상이었다.
소나기에 배낭과 침낭, 옷이 다 젖었고 금방 몸이 차가워졌다.
아, 이제 슬슬 몸이 아플 것 같다…….
라는 느낌이 왔다.
다행히 샤워물이 따뜻했다.
난 샤워실에 쪼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따뜻한 샤워물을 등으로 받아냈다.
사실 그동안 알베르게에서 샤워를 할 때는 최단시간에 하고 나와야 했다.
뒤에 사람이 있기도 했고, 뭐 샤워를 오래 하고 싶을 만큼 그렇게 샤워장이 쾌적한 곳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좀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사실,
몸을 떨고 있었다.
아프면 안 돼!
하면서.
따뜻한 샤워가 내 몸을 따뜻하게 해 주길 바라면서.
그렇게 한참 앉아있었다.
다행히 금방 햇볕이 나왔다.
햇볕이 나오니, 숙소도 따뜻해졌고 몸도 따뜻해졌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따뜻해진 것이 가장 기뻤다.
그런데, 이곳 숙소는 어쩐지 베드버그가 있을 것 같아 찝찝해서 침낭과 배낭을 햇볕아래서 말렸다.
신발이 푹 젖은 상태에서 걷는 것은 정말 최악이다.
소나기가 올 땐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만.
오늘처럼 길 중간에 만나면 뭐 할 수 없는 일이다.
가까운 알베르게에 가서 쉴 수밖에…….
소나기여서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알베르게 식당의 식탁 위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잔이 와서 같이 일기를 쓰고 있다.
잔은 손 글씨로 공책에 쓴다.
아마도 까미노 중 물집이 가장 많은 사람이 누군지 대회를 열면 잔이 1위를 차지할 것이다.
물집밴드 컴피트를 사는데 돈도 많이 들고, 젊은 청년이 걷자니 늘 허기져 있기에 먹는 데에도 돈이 많이 든다.^^
하지만 늘 유쾌해서 좋다.
참 멋진 친구다.
음악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분명 좋은 교사가 될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오늘도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샐러드와 돼지고기 스테이크 그리고 와인과 요구르트 혹은 과일을 디저트로 제공해 주었다.
가격은 9유로.
집에서 직접 만든 돼지고기 스테이크는 양도 넉넉했고, 맛도 있었다.
워낙 양이 많아 조금 썰어 잔에게 주니 좋아한다.
스페인 순례자메뉴는 늘 양이 많았다.
처음부터 잔에게 내 음식을 나눠주고 싶었는데, 처음에는 사양을 했었다.
그래서 음식을 나누는 것이 실례인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이제 잔은 내가 음식을 나누면 좋아한다.
고맙다고 덥석 받아서 맛있게 먹는다.
음식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이 편해졌다는 뜻일 거다.
이렇게 맛난 음식을 먹고,
아무도 없는 쾌적한 알베르게에서 묵게 되었다니…….
정말 우린 행운아야! 하면서 오늘 하루 무사히 지나간 것에 깊은 감사들 드렸다.
더 행복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마을 역시 아주 작은 마을이었기에 주변에 구경거리도 바(bar)나 카페도 없었다.
지루한 저녁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가 영화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잔이 노트북을 꺼냈다.
배낭 깊숙이 처박아 두었던 잔의 노트북 속에 영화가 있었다.
먼저, untouchable이라는 프랑스 영화를 소개해 줬다.
프랑스어로 말하고 세르비아어가 자막으로 나오는 영화여서
잔이 영어로 대략의 설명을 해 주었는데,
장면 몇 가지만 추려서 봤는데도 대충 이해가 되었다.
감동적인 줄거리였다.
나중에 한국에 가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라이프오브파이를 보여주었다.
나도 좋아하는 영화였고, 잔은 자기 인생의 영화라면서 좋아했고,
캐시는 보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다 같이 라이프오브파이를 보기로 했다.
원래 다 아는 내용이라 영어원어만으로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혹시 까미노 걷는 중에 영화를 본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나요?”
2015년 8월 31일, 빌라메이요르 델 리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