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이 좋아지는 이유

# 12일 차, 가장 아름다운 미사, 풍성한 식사

by 아샘
신부님은 우리들의 출신지를 물었고,
영어로 된 기도문과 한국어로 된 기도문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 페레그리노를 위한 기도를 해 주시고는,
기념 목걸이를 걸어주셨다.


이동 : Villamayor del Rio --> San Juan de Ortega




오늘은 거의 30km를 걸었다.

걷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이 걸은 날이다.


어제 소나기를 만나 좀 일찍 들른 알베르게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오늘은 힘을 내기로 했다.

아침부터 비가 와서 비옷을 입고 걸었다.

가랑비라 걷는데 지장은 없었으나, 비옷이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 속으로는 땀이 많이 났다.


중간쯤 도착하니 잔이 먼저 비옷 입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 돌아가며 사진을 찍었다.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사실,

그동안 잔이나 캐시 모두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잔과 캐시 둘 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긴 했지만,

잔이 걸으면서 폰을 꺼내 사진 찍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캐시는 아주 조그만 소형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결코 스마트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곳 산티아고에서 잔과 캐시가 보기에 나는 매우 스마트한(?^^) 여자였다.


아이폰 6을 가지고 다녔고,

그것으로 좋은 풍경이 나오면 사진을 자주 찍었고,

일기도 스마트폰에다 썼으니…….


잔은 지난번 경찰이 찾아온 이후,

아주 가끔씩 부모님께 전화할 때만 폰을 꺼냈다.

잔은 특히 자신은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 산티아고 길에는 클래식 음악조차 듣지 않을 결심으로 왔단다.

모든 일체의 인위적인 소리에서 떠나 자연의 소리에 귀담고 싶다 했다.


캐시는 좋은 풍경이 있으면 사진을 찍긴 하는데,

자기 사진 찍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본인 사진은 전혀 찍지 않고, 잔과 나를 주로 찍었다.


그랬던 나의 친구들이.

오늘 어쩐 일인지 잔이 나보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먼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내 사진기로 잔과 캐시 그리고 캐시와 나의 사진을 담았고,

캐시의 사진기에 나와 잔, 그리고 나와 캐시의 사진을 담았다.


그래!

우린 더욱 친해진 걸 거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싶고, 서로의 사진기에 서로의 사진을 담고 싶어 하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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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의 한마디가 날 무척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민, 여기서 우리 사진 꼭 찍어야 할 것 같아요.^^"

걸으면서 날이 더운 게 더 좋냐, 비 오는 게 더 좋냐 하며 서로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비웃으며 장난을 쳤다.

나보고 어제 비 맞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라 했는데, 아직도 그 마음에 변함이 없냐고 놀렸다.

아니다.

그런 비는 별로야…….^^





점심을 먹기 전 오랜만에 유리를 만났다.

그녀는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 마을에서 쉰다고 했다.

어제도 우리보다 전 마을에서 쉬었기 때문에 소나기를 피했단다.

우리는 오늘 좀 더 걷겠다고 했더니 그럼 이제 서로 만나기 힘들 수도 있다면서

내 이메일을 적어달라고 해서 적어줬다.

지난번 에스테야에서 만났을 때 땀띠까지 났었던 그녀였다.

물집도 있는 그녀가 무사히 산티아고까지 잘 걸어가길 빈다.


중간지점에서 우리의 목적지 까지는 계속 산 길이 이어졌지만,

그리 힘들지 않은 코스였다.

어깨만 아프지 않다면, 정말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을 텐데,

가끔씩 찾아오는 어깨의 통증에 신경이 쓰였지만,

나만의 통증완화 비결을 찾아냈다.

캐시에게는 1분 휴식이라고 말했는데,

아주 잠깐 배낭을 내려놓고, 어깨를 돌려주는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훨씬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늘 잔이 앞서 걷고, 그 뒤로 캐시가 걷던가 아니면 내가 걸었다.

조금 걷다 보면 잔이 우릴 기다리고 있고, 우리가 함께 모이면 또다시 걷곤 했다.


오늘은 아무리 걸어도 잔이 보이지 않았다.

캐시와 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거의 2-3시간을 그러고 걸은 것 같다.

그래도 잔이 안 보여서 좀 걱정이 되었는데,

드디어 잔이 멀리서 우릴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캐시가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나 같은 늙은이를 혼자 걷게 하면 어떻게 하냐고.

얼마 전 까미노를 걷던 여자 한 명이 실종된 사건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잔은 웃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며 걷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오후 내내 걷는 길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주 이따금 한두 명이 보이곤 했었다.

생각보다 인적이 드문 것에 조금 놀라긴 했으나,

나는 캐시가 있어서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한데, 캐시는 속으로 좀 걱정을 했던 모양이었다.




오늘의 까미노는 그랬다.

한적하고 약간은 지루한 고원길이 계속 이어졌다.


마을이 나오려면 이 고원을 다 지나야 만 했다.

길 중간에 Buen Camino라고 쓰인 돌무더기도 보이고,

I love XXX라고 쓰여 있는 돌무더기도 보이고,

사랑의 하트표시 돌무더기도 보였다.

누군가 걷다가 지루해서 돌무더기로 글자를 만들고 간 모양이었다.

또 나무로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 놓은 길바닥 나뭇가지 전시회를 접했는데,

그 모두가 근처 대학생들의 재능기부로 이뤄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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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오래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오늘 걸은 까미노는,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돌무더기 장식과 나뭇가지 장식이 순례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던 것 같다.




드디어,

타운이 보였다

정말 오늘은 타운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걷는 동안 가족도 그립지 않은데, 타운은 너무 그리웠고 반가웠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별로 없다

순례자들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나 보다.

오늘이 9월이어서 그런가?




6시에 미사가 있다고 해서 옆 교회로 갔다.

이미 론세스바예스 미사에서 모두들 감동을 받았던 경험이 있어,

우린 자연스럽게 미사를 보려고 작은 교회를 찾았다.

그곳엔 우리밖에 없었다.

잔과 나 그리고 캐시 셋만 참석한 미사에서 신부님 혼자 미사를 집전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였지만 신부님의 강론은 차분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마지막 성찬의식을 마친 후,

신부님은 우리들의 출신지를 물었고,

영어로 된 기도문과 한국어로 된 기도문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 페레그리노를 위한 기도를 해 주시고는,

기념 목걸이를 걸어주셨다.

감동이 몰려와 눈물이 나올 뻔했다.

감사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미사였지만,

내 평생 가장 감동적인 미사였다.

전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신부님의 강론이 내 온몸을 감싸고 날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그 힘들고 지루한 도보 길의 고단함을 위로해 주었던,

가장 아름다운 미사시간이었다.




이윽고 저녁시간.

우리는 오늘 이곳 알베르게에서 제공해 주는 저녁을 먹기로 했다.

자원봉사자들일 거라 생각되는 분들이

직접 저녁을 만들어주었다.

아, 늘 맛있고 풍성한 저녁이다.


정말 매일매일 진수성찬이라 이렇게 많이 걸어도 살이 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프에 전식으로는 쌀밥과 계란 프라이가 본식으로는 고기와 프랜치프라이와 샐러드 그리고 후식으로 요구르트. 거기에 바게트와 과일까지.


도보 후 이렇게 가득한 음식을 앞에 두면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든다.


물론 많이 걸어서 먹고 싶은 생각이 크기도 하지만,

어느 마을엘 가도 순례자들을 위한 메뉴는 풍성하고,

어느 게스트하우스엘 가도 순례자들에게 파는 메뉴는 정성은 물론 양도 푸짐했다.


스페인이 좋아지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순례자들을 위한 따뜻한 배려 때문이다.




오늘은 알베르게에 도착한 것이 6시라서 미사보고 저녁 먹느라 겨우 샤워만 했다.

일단 빨래는 패스다.


내일은 좀 여유롭게 걸을 수 있을까?

우리 일행은 결코 빠르지 않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느리다.

어쩌면 잔은 우리 때문에 느리게 걷는지도 모른다.

잔에게 고맙다.

캐시는 항상 솔선수범이다.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고.


잔은 이미 물집으로 고생을 겪었고,

캐시도 발에 한 두 개 물집이 생겼는데,

나만 발에 아무 문제가 없으니,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거의 매일 발마사지를 한다고 했더니 나보고 발 전문가라며, 함께 웃었다.


오는 길에 프랑코시절 내전으로 참상을 겪었던 지역의 기념탑을 지나게 되었다.

잔은 소비에트 연방 시절 이야기를 하며 그때나 지금이나 민족끼리 전쟁하는 이런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며 안타까워했다. 잔은 스치듯 내뱉는 이야기 속에 늘 진중함과 역사의식 같은 것이 배어 있다.



2015년 9월 1일, 산 후안 데 오르테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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