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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닿는 모든 곳에 로마가

#9 고대도시 시데

by 아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고대도시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중해 바다까지 걷는 1.5km 정도의 거리 전체가 고대 유물들로 가득했다.
내 평생 발길 닿는 모든 곳에서 로마를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따뜻한 남쪽나라, 시데로 이동



코니아에서 예상치 않게 3박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니 또 눈 발이 날린다. 날씨를 보니 낮에는 해가 나오고, 시데 쪽 날씨도 괜찮다. 아침을 먹고 9시쯤 되니, 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슬슬 이동하기로 한다.


2일을 계속 주차를 해 둔 터라 차에는 눈이 쌓여있고, 차를 뒤로 빼려니 또 눈이 한가득이다. 차바퀴가 저 혼자 돌고 엔진 소리만 들린다. 밖으로 나와 왼쪽 앞 타이어 아래 쌓인 눈을 치우려 하니 갑자기 튀르키예 남자들이 한 떼로 몰려온다. 한 사람은 운전을 안내하고 이윽고 두 사람은 차를 뒤에서 밀고, 또 한 두 사람은 삽을 가져와 눈을 치워준다. 활짝 웃는 튀르키예인의 따뜻한 마음을 가슴에 담고, 코니아를 떠났다.


따뜻한 튀르키예 사람들
오래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앙카라에서도 코니아에서도 튀르키예 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빵집 주인아저씨도 호텔 주인아저씨도 그리고 오늘 차를 밀어준 아저씨들도 모두 선하게 웃으셨다. 우리나라라면 벌써 염화칼슘을 사용해서 눈이 말끔하게 치워져야 마땅할 것만 같은 날씨였지만, 튀르키예에서는 염화칼슘을 보기 힘들었다. 물론 제설작업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는 제설차가 다니면서 눈을 치운다. 고속도로도 마찬가지다. 염화칼슘을 뿌리기보다는 그저 눈을 치우는 데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여전히 제설이 안 된 길이 많았다. 그런데, 차가 미끄러질 법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나서서 차를 밀어주는 모습을 자주 봤다. 평소에는 무법천지 같은 횡단보도 건너기를 감행해야 했는데, 웬일인지 눈이 온 후엔 도로에서 길을 건널 때면 언제든 차가 먼저 멈춰준다. 이런 반전의 모습, 참 따뜻하다.


토레스 산맥을 넘어서


시데로 향하는 코니아의 외곽도로는 꽤 많이 미끄러웠다. 제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매우 조심하면서 달렸다. 외곽을 지나 안탈리아로 가는 큰 지방도로 접어들자 그제야 제설이 완벽했고, 햇볕도 나서 안심하고 드라이빙을 즐겼다. 첫 번째 주유소에서 기름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저 멀리 눈 쌓인 높은 산이 보였다. 중간쯤 세이셰히르 라는 작은 도시에서 안탈리아로 가는 길로 접어들자 갑자기 차들이 멈춰있다. 불안한 마음으로 우리도 멈췄다. 전날 우연히 터키 트래픽 라이브에서 안탈리아로 가는 도로중 일부 구간이 폐쇄된 내용이 있었는데, 바로 그 구간 같았다.


잠시 뒤 차들이 움직였다. 경찰이 지켜 서서 한 대씩 차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 차를 쓱 보더니 그냥 보내준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도로는 토레스 산맥을 넘어 안탈리아로 가는 산길이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한계령 같은. 그리고 그 길은 어제까지 폐쇄되었고, 조금 전 뚫렸다. 모든 길은 미끌거렸다. 제설차가 부지런히 눈을 빨아들여 길 옆으로 토해내는 중이었다. 아마도 밤새 작업을 했을 것이다. 조심조심 차선 하나 정도만 열린 산 길을 달렸다. 거의 한 시간 넘은 것 같다. 사방은 눈으로 가득하다. 마치 추운 나라의 눈 숲을 지나가는 느낌이다.

토레스 산맥의 눈을 뚫고 시데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신이 우리를 돌봐주셨던 것 같다. 이곳은 알라신의 나라니 알라신이 돌봐주신 걸까?

눈 덮인 토레스 산맥을 무사히 건너고 우리는 시데에 도착했다. 드디어, 눈의 고통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고대도시, 시데


시데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다. 토레스 산맥의 눈길을 달리느라 고생한 우리는 시데에서 하루를 쉬기로. 이 결정 덕분이었는지, 따뜻한 남쪽나라에 왔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마치 튀르키예 여행을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시데는 가장 들뜨고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다.


터키의 지중해에 면한 남쪽 지방 안탈리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시데라는 작은 반도는 전체가 작은 고대도시이자 휴양지였다. 우리는 이 고대도시 안에 숙소를 잡았다. 고대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차를 통제했기에 우리도 짐만 호텔에 옮기고는 다시 나와 밖에 주차를 해야 했다.


시데는 팜필리아(로마제국의 속주)의 가장 중요한 도시중 하나였다고 한다. 근처에 멜라스 강이 있고 항구도시로서도 매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시데의 선사시대 기록은 없지만 로마시대의 도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초기 비잔틴 시대까지 발전했단다. 아랍인이 지중해 무역에서 주요 역할을 하던 시기 서서히 쇠락하다가 셀주크 투르크시대 때 버려졌다고 한다.


이 작은 유적지는 고대도시가 갖추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었고, 그 흔적들을 느껴볼 수 있다. 시티게이트와 분수대, 원형기둥 거리, 아고라 목욕탕, 바실리카, 아폴론 신전 등을 말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고대도시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중해 바다까지 걷는 1.5km 정도의 거리 전체가 고대 유물들로 가득했다. 내 평생 발길 닿는 모든 곳에서 로마를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님파에움


처음으로 맞이한 곳은 님파에움 이라는 분수대. 고대도시 입구에는 늘 거대한 분수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시티게이트를 지나니 양 옆으로 로마시대를 향유했던 잔해들이 가득했다. 원형기둥이 양 옆으로 늘어진 곳은 당시의 도로였다고 한다. 원주들이 여기여기 무너져 널브러져 있지만, 그래서 더욱 이곳이 사라진 도시였음을 실감했다.

시데 고대도시 입구의 님파에움과 원주들

시데 뮤지엄


시데 뮤지엄은 AD 4-5세기에 발견된 아고라 목욕탕 건물을 개보수한 것이다. 1961년도부터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고 한다. 온탕, 냉탕, 사우나 및 야외 공간으로 구성된 로마시대 목욕탕을 둘러본 느낌이다. 전시실에는 로마시대 신들의 조각상들이 많았다. 아테나,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아폴론, 네메시스, 니케아, 헤라클레스 등의 머리와 몸통의 조각상들이다. 야외 공간에도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해시계를 의미하는 Sundials, 메두사의 머리, 검투사를 그린 기둥, 승리의 신 니케, 사자상, 올리브와 와인을 맷돌 등이 눈길을 끌었다.


시데 원형극장


건너편에는 원형극장이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림을 어쩔 수 없었다. 공연장으로 들어가기 전 복도가 옆으로 펼쳐졌다. 2천년전 사람들도 이 복도를 통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겠지. 드디어 원형의 공연장이 눈 앞에 펼쳐졌다. 세상에는 멋진 공연장이 많다. 한국에는 예술의 전당이 있고, 바르셀로나에는 플라멩코 공연장이 있고, 미국에는 카네기 홀이 있는데, 야외공연장으로 이렇게 멋진 공간이 이미 2천 년 전에 있었다니!


모든 관객은 어떤 자리에서도 중앙의 무대를 완벽히 관람할 수 있는 반원형의 구조. 예술인은 자신의 재능을 맘껏 뽐낼 수 있는 무대. 관객이 앉는 자리는 널찍한 대리석으로 사람이 앉았을 때 편안한 높이였다. 또한 관객이 다리를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의자 밑의 돌은 안으로 둥글게 깎여 있었다. 적당한 간격으로 긴 관객석 사이사이 이동 통로가 있고 이들 통로 계단은 또 오르내리기 편하게 약간 낮은 높이였다. 1층과 2층 사이에도 이동통로가 있어서 원형극장 맨 위층에서 무대까지의 가파른 경사에 안정감을 주었다. 보통은 언덕을 이용해 공연장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시데의 공연장은 축대를 쌓아서 그 높이를 유지한 것이 의의가 있다고 한다.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원형극장을 직접 눈으로 접한 순간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 감동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런 각도 저런 각도로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 담는 일 밖에 없다. 그리고 잠시 앉아서 로마인들이 공연을 관람하던 그때를 상상하는 수밖에.


시데 바다


시데 고대도시 속의 작은 부띠끄들과 카페 레스토랑들은 이러한 로마 유적들과 조화롭게 엮여 있다. 물론 아름다운 호텔도 함께. 시데가 감동을 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지중해를 만나기 때문이다. 바다를 끼고 예쁜 포토존과 산책로가 있다. 그리고, 그 끝에 아폴론 신전이 쓸쓸하면서 위엄 있게 서 있다.



사실, 내가 시데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어디선가 사진으로 본 그저 덩그러니 기둥 5개 정도 남아 있는 아폴론 신전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아도 아름다운, 아름답다는 표현보다 더 한 표현이 있다면 그 표현을 불러오고 싶은 이곳. 그래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함께 석양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낭만적인 곳에서 로마시대 가장 낭만적이라 여겨졌던 두 사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시데 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바로 집 앞에 또 로마 유적이 가득이다. 이곳 시데는 호텔 앞에 카페 옆에 그리고 레스토랑 뒤에 유적과 유물이 가득하다. 땅을 파면 유물들이 나오는 곳이다. 작은 마당이 있고, 방에는 작은 발코니가 있어, 만약 따뜻한 날이었다면 맥주 한잔 마시며 종일 바다를 바라봐도 좋을, 선하고 친절하되 지나치지 않은 주인아저씨가 맞아주는 외넴리 호텔 (Hotel Villa Önemli) 을 이곳에 기록해 둔다. 우리는 비수기라서 예약하지 않고 그냥 찾아가 약간 디스카운트를 받았다. 주변에는 겨울이면 호텔 문을 닫는 곳도 꽤 있는 것 같았다.




2022년 1월 24일, 시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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