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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현대의 대리석이 함께 섞여

#10 아스펜도스, 페르게

by 아샘


로마시대의 대리석과 현대의 대리석이 함께 섞여있는 공연장,
옛 것과 현재의 것이 함께 엮여 있으니 그 또한 새로운 조화였다.
그렇게 엮여서 앞으로 또 2000년 이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만약 1800년대에 태어났다면, 이러한 흔적을 볼 수 없었다.
어떤 유적은 1900년도 중후반이나 되어야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정도의 복원이 이뤄졌다.
내가 오늘 발굴이 이뤄지고 비문을 해석해 내고 또 보기 좋게 복원이 된 로마 유적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간 여기 있을 수 있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운의 결과다.






쓸쓸한 바닷가 앞에서 아침식사


지난밤은 너무 추웠다. 달달 떨면서 조식을 먹으러 호텔 마당의 야외식당으로 갔다. 비가 쏟아졌는데, 마치 장맛비 같았다. 투명 천막이 쳐져 있던, 주인아저씨가 앉아 있곤 했던 그곳으로. 아저씨는 테이블을 안내한다. 앉으니 빨간색 식탁보를 깔아준다.

이어 빵과 식기류와 오렌지와 샐러드(오이와 토마토 슬라이스)와 롤 튀김을 내온다. 두 번째로 삶은 달걀과 각종 치즈가 놓은 접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를 내준다. 고양이 세 마리가 우리 주위에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아침을 먹다가 얼어 죽었을지도 모르는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주인아저씨가 꼬박꼬박 채워주시던 차이 때문이었다. 그 따뜻함을 느끼며 조식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아스펜도스


안탈리아로 가는 길에 우연히 아스펜도스라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고, 안탈리아까지 50분이 남았다는 구글맵에 따라 미리 들르기로 했다. 아... 알라신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나 보다. 아스펜도스에 주차를 하자 조금씩 내리던 비가 싹 멈췄고,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자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 원형극장은 로마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지어졌고, 당시 건축가는 제논이었다고 한다. 13세기에는 셀주크 시대 알라딘 1세가 코발트 타일로 증축하여 여름 주거지로 사용하기도 했다는데 오늘날까지 그 음향시설이 매우 뛰어난 가장 위대한 로마 원형극장으로 유명하다고. 오전에 비를 뚫고 아스펜도스를 온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아직도 여름이면 실제로 오페라 공연이 열린다는 아스펜도스 원형 극장은 어제 시데에서 본 공연장의 완성판인 것 같았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지고 오늘날까지 공연하는 2000년 된 공연장에 오늘은 공연 없이 우리뿐이었다. (코로나로 공연이 중단되었다고)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실제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어서인지 낡고 허물어진 대리석 의자 혹은 기둥들은 개보수되었다. 로마시대의 대리석과 현대의 대리석이 함께 섞여있는 공연장, 옛 것과 현재의 것이 함께 엮여 있으니 그 또한 새로운 조화였다. 그렇게 엮여서 앞으로 또 2000년 이어졌으면 좋겠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또 한 번 튀르키예에 와야 할 것만 같은데 ( 이뤄질지는 모르지만...ㅜ) 이 공연장에서 오페라를 꼭 보고 싶은 것도 그 이유에 포함된다.


아스펜도스 역시 팜필리아로 알려진 안탈리아의 고대도시였다. 팜필리아 대부분의 고대도시들처럼 한 때 페르가몬의 영토였다가 로마로 합병되었고 AD 2-3세기가 황금기로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단다. 아스펜도스는 팜필리아에서 매우 중요한 상업의 중심지여서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살았는데, 로마제국 멸망 후 큰 지진과 전염병, 기아로 인해 7세기경 도시가 쇠퇴했다고.


원형극장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면 원형경기장의 흔적이 남아있다. 비탈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아크로폴리스 거리가 나오는 데 거의 폐허 수준이라 상상력이 많이 동원되어야 한다. 아치형 문과 그 아래로는 수로가 보이는 듯하고, 폐허 속에서 그나마 잘 보존된 건물은 바실리카(로마시대 공공건물, 집회 장소)인 것 같았다.






페르게


안탈리아로 가는 길에 페르게 고대도시도 들러보기로 했다. 페르게 역시 팜필리아의 고대도시이며,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사람들이 세운 도시라고 하는데, 로마제국에 편입된 뒤 발전하였다고 한다.


거의 24미터의 높이에 이르는 로만게이트는 서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으로 문이 나 있었다고. 이곳 님파에움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있었다고 하는 데 실제 로마시대 때의 그림을 보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프로필론은 로마시대 공공건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하는데 지금은 기둥만 남아있다. 헬레니즘 시티 게이트는 가장 오래되고 눈여겨볼 문이라는데, 탑 모양이다.

페르게, 헬레니즘 시티 게이트와 로만게이트


입을 다물지 못했던 곳은 대목욕장이다. 그 규모가 어찌나 컸던지 온탕, 냉탕, 체육관 등으로 구분되었다는 건물들의 광대함(?)에 그저 감탄과 웃음만 나왔다. '뭐, 이렇게 목욕탕이 커?' 실제로 아직도 목욕물(?)이 있었고, 바닥의 일부에는 예전의 목욕 타일이 보였다. 한 번에 사진으로 담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페르게, 대목욕장 건물들




페르게 메인스트리트


하지만 놀라움은 목욕장에서 멈추지 않았다. 메인스트리트의 셀 수 없이 많은 기둥들 때문이었다. 시데에서 널브러진 원기둥에 대한 아쉬움이 이곳에서 말끔히 해결되었다. 메인스트리트는 동서남북으로 나 있었고, 그 사이에 원기둥이 줄을 지었는데, 걷기가 힘들 정도로 거리가 꽤 되었다. 우리는 로마시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리를 걸었다. 너무 많이 걸어서 다리가 아플 정도로.

페르게, 언덕 위에서 찍은 메인스트리트


타일로 장식된 실내공간

길거리 양쪽으로 조그만 돌로 된 사각형의 공간이 늘어서 있는 데 아마도 마켓이거나 집이었을 것이다. 그중 한 곳이 온전히 보전되었다. 바닥에 타일로 그려진 그림이라니... 그렇다면 그 많은 방들에 이러한 타일 디자인의 바닥과 벽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 모든 공간이 다 이렇게 아름다운 타일로 꾸며져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니 화려함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았다. '거의 4-5km 정도는 되어 보이는, 아니 그 보다 더 길 수도 있는 메인스트리트 옆 상점이나 집이 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었다고?'


거리 끝에는 님파에움(분수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아치가 생생하게 남아있었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아고라 터를 보았다. 무려 내부 길이만 51미터의 정사각형으로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형태라 한다. 안에는 원형의 신전이 있었다 한다.



페르게를 비롯해 고대도시들은 땅에 묻혀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발견되어 기나긴 발굴의 과정을 거쳐 오늘 그 흔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1800년대에 태어났다면 이러한 흔적을 볼 수 없었다. 어떤 유적은 1900년도 중후반이나 되어야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정도의 복원이 이뤄졌다. 내가 조금 더 일찍 태어나 내 나이 70-80대였다 해도 오늘의 로마 흔적을 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 건강한 노인이라면 뭐 상관없겠지만…..^^)

2022년 오늘, 내 나이 60이 되기 전, 발굴이 이뤄지고 비문을 해석해 내고 또 보기 좋게 복원이 된 로마 유적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여러 겹의 행운의 결과다.



페르게 원형경기장


마지막으로 원형경기장으로 향했다. 밖에서 보았을 때 크고 높은 터널같이 생긴 입구로 들어간 후 좀 더 작은 입구로 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확 트인 긴 타원형의 원형경기장이 보인다.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된 원형경기장이다. 밖에서 본 터널 입구가 크고 높았던 이유는 그 정도 높이여야 경기장 내 관객이 앉을 수 있는 단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긴 타원형인 것은 많은 관객을 입장시키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당시 전차 경주가 유명했으니 박진감 넘치는 경주를 연출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타원형의 긴 원주 구간은 말들이 시원하게 달리는 모습을 보이기에 좋고, 짧은 원주 구간은 경주마들이 급격하게 회전하게 함으로써 경기를 흥미롭게 구성하기 위해서 말이다. 원형극장의 구성과 원형경기장의 구성은 그렇게 달랐다. 목적에 따른 건축이었다고 나름 추측해 본다.



페르게 원형극장


페르게 고대도시 옆으로 찻 길 건너편에 있는 원형 극장은 따로 입장했다. 또 한 번 두근거린다. 난 왜 원형 극장에만 들어가려면 두근거릴까?

이제까지 두 개의 원형 극장 중에서 가장 손상이 많이 간 것 같았다. 하지만, 2000년의 시간이 온전히 간직되었다는 느낌 때문일까? 날 것 그대로의 공연장은 귀한 보물 같았다. 모든 돌들이 로마시대 것인 듯, 새로 보충된 것들이 없는 듯 보였다. 복원이 덜 되어 그런지, 입구가 많지 않았다. 한두 개의 입구와 한 두 개의 계단을 통해 1층에서 3층까지 힘들게 둘러보았지만, 2천 년을 그대로 안겨준 페르게 원형극장은 오늘 최고의 감동이었다.

페르게, 원형극장



그리고, 안탈리아 올드타운에 도착했다.



2022년 1월 25일, 안탈리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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