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애 Sep 18. 2021

장수노인의 배우자도 장수할까?

상대방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는 팩트폭력배

‘상대방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는 팩트폭력배’. 


10년간 그의 직장생활을 옆에서 봐 온 내가 그의 사회생활 캐릭터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그는 일에 있어서는 완벽주의자이고, 따라서 자신만의 기준이 남들보다 높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에 맞춰주길 바란다. 물론 이런 사람이 나의 아랫사람이라면 더없이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가끔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기특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 관리자의 총애를 받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나의 상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는 주위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가 하는 잔소리는 돌직구를 넘어서 불직구다. 본인은 피드백을 줄 생각으로, 노하우를 전달할 목적으로 했던 말이었겠지만, 그 말을 듣는 직원들은 팩트폭력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이것은 다행스럽게도 아랫사람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상사의 불합리한 처사에도 용감하게 맞서는 남편. 그 모습이 참 멋있지만, 본인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또 다른 사람이 그에게 던지는 합당한 사실로 이루어진 언어폭력도 그는 잘 견뎌낸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참된 말이라면 그는 언제든지, 감정의 동요없이 모든 이의 질책을 받아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고민을 이야기하고 스트레스 받은 일을 쏟아내도 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마치 현자의 모습으로 내 말을 들어준다. 성질이 물과 같아서 타인의 감정에 잘 동화되는 나와는 달리, 그는 나무같은 모습으로 변함없이, 하지만 뻣뻣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이가 자신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고, 그와 함께 일하던 아랫직원들은 항상 몇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는 귀가 후 나에게 정신과 상담하듯 쏟아내며 풀었기에 나는 남편의 에피소드 속에서 그의 행동과 말을 통해 그의 성격을 분석하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을 알고나니, 남편의 완벽주의는 실수가 두려워 발현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않아도 일은 진행이 될텐데, 남편은 실수를 방지하고 싶고, 또 팀원들도 그것을 따라주길 원하여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어린시절에 실수를 하고 크게 혼난적이 있었을까? 괜시리 그가 안쓰러워진 것은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잔소리를 하는 그의 현재 모습만 본다.


내가 들은 것 중 가장 뜨악했던 말은 이거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해서 모든게 서툰 직원이 남편의 노하우 전수를 가장한 잔소리를 참다못해 반항했고,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는 뜻을 전하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네가 없는게 더 나아.’


음... 물론 그의 말 자체는 사실이다. 공감한다. 모든게 어설펐을 그 친구가 팀에 얼마나 기여를 했겠나. 그러나 좀 더 예쁘게 말할 수 있었을텐데. 좀 더 격려하는 마음을 담아서 이야기했더라면 그 안타까운 청년의 실직을 막을 수 있었을텐데. 처음엔 ‘요즘애들은 빠져가지고 참을성이 없어’ 라며 그에게 동조해주던 나도 그 케이스가 열 손가락을 넘어가게되니, 이젠 문제의 근원은 다른 곳에 있지 않은가싶어 남편의 말을 곱씹어보게 된다. 여태까지 남편을 거쳐간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며 읊조렸을 말들을 떠올리면, 남편이 아주 장수할 수 있을 것 같아 씁쓸한 웃음을 짓는 한편 간담이 서늘하다.


정말 욕먹으면 오래살까 궁금해져 찾아보니, 실제로 장수하는 노인들은 성격이 까칠하다고 한다. 주변의 평판에 목매지 않고 거침없이 속내를 드러내서 욕을 듣지만, 본인은 마음의 부조화가 없어 장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까탈스러운 장수 노인들 곁에 있던 배우자들도 함께 장수할 수 있었을까? 


남편의 잔소리를 나라고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그 표현이 회사에서 만난 이들에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부드럽겠지만, 여전히 왼쪽 가슴에 날아와 콕콕 박히고, 심호흡을 불러일으킨다. 하루는 그의 잔소리가 합당한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잔소리를 종이에 옮겨써보면 내 감정을 배제하고 볼 수 있지 않을까? A4 용지에 그의 잔소리를 적어보았다. 국냄비에 국자 넣어두지 마라, 도마랑 냄비, 후라이팬은 큰 걸 써라, 된장국에 버섯은 잘라서 넣어라, 이럴 땐 작은 칼을 써라, 김치찌개 끓일땐 김치를 더 많이 볶아라, 체는 쓰고 바로바로 씻어라, 보온병에 차를 끓여줄땐 뜨거운 물과 찬 물의 비율을 7:3으로 해라, 숟가락으로 보온병 바닥 긁지마라.


대부분이 주방일에 대한 잔소리인 이유는 그가 요리를 오래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놓고 읽어보니 마치 자취하는 자식에게 부모님이 생활 꿀팁을 전수해주는 것 같다. 참 유용하다. 근데 왜 남편의 입에서 나왔을땐 그렇게 짜증이 솟구쳤을까? 나는 오십살, 육십살이 되어서도 그의 꿀팁을 ‘정말 유용하다, 오빠!’ 라며 반응해 줄 수 있을까? 그는 장수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내가 죽을 때까지 노하우를 전수해주려 할 수도 있는데? 





작가의 이전글 나는 그의 구글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