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마법이 풀리면.

그 맹렬한 시간

by mbly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 놓기가 부담스러워 잠깐 창문을 열고 있을라 쳐도 금방 땀이 송송 솟아나는 이마들이 안쓰러워 '에이.. 그냥 다른 곳에서 아끼지 뭐..' 싶은 마음이 드는, 뜨거운 낮.


해가 있는 대로 뭉그적대며 넘어가기 시작하고 블라인드를 이제 걷어도 되겠다 싶으면 언제 달려왔는지 창문에 코를 댄 마음들이 들뜬다. 오늘도 드디어 오후 4시가 되었다.


오후 4시, 다시 마법이 풀리는 시간.

마법이 풀리는 건 소리로 알 수 있다. 저 아래 놀이터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리.


어린이집, 유치원은 물론이고,

키즈카페니 아쿠아리움이니 워터파크 같은 곳은 당연히 꿈도 못 꾸는 아이들에게 그나마 샘솟는 기운을 발산할 수 있게 하는 곳이 아파트 놀이터.


해를 바로 마주 보는 앞 동 뒤로 그림자가 길어지기를, 달궈진 미끄럼틀이 뜨뜻한 정도로만 식어지기를 학수고대하던 아이들 혹은 어른들이 오후 4시가 되면 일제히 달려 나온다. 아이들은 자전거, 물총, 씽씽이를 손에 들고 어른들은 휴대폰을 손에 들고. 아이스커피라도 한 잔 들고 벤치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싶지만 요즘 같은 때엔 잠깐이라도 마스크를 내린다는 게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금쪽같은 아이들 곁에 있으니.


공기가 차츰 시원해지면 사람만 반가운 것은 아닌지 벤치 아래 발목을 물어뜯는 모기들이 성가시지만 엄마보다 먼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아이들을 모른 체 할 수 없다. 그래, 우리도 나가자. 이제 4시니까.


행여 넘어질까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 맹렬히 굴리는 자전거 페달에는 다 이유가 있다. 신데렐라처럼 6시엔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퇴근하는 아빠를 맞이하고 저녁을 먹고 욕조에서 잠시 목욕 겸 물놀이를 하고 잠자리에 들려면 아.. 지금 놀이터에서의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


쌩 하니 한 바퀴 돌고 오면 벌써 윗옷이 땀에 흠뻑 젖는다. 물 한 모금 들이키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또 페달을 구른다. 맨날 보는 같은 풍경인데도 구를 때마다 다른 건지. 나는 간간이 지나가는 택배 차에 마음이 쓰여 고개를 이리 빼고 저리 빼고, 반가운 마음에 옆집 엄마랑 수다를 떠는 엄마들도 눈은 계속 아이들 뒤꽁무니에 달려 있으니 놀이터에서 엄마들도 한숨 돌린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엄마들은 몸이 멀어져도 마음은 계속 아이와 한 세트인 것이다.


그나마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어서 엄마들 수다에도 끼지 않으니, 태평한 엄마와 동동거리는 엄마의 교집합에 위치한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며 세상을 배우는 법을 스스로 알게 해줘야 하는데 싶어 멀찍이 무심한 듯 자리를 잡지만, 무릎이 깨질까 혹시 마음이 깨지진 않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뒤를 쫓는다.


어쨌든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논다. 큰 딸아이는 또래 친구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로 모아 재밌게 놀까 고민한다. 새 멤버를 모집하고 규칙을 제안하고 순서를 정하는 모습이 제법이다. 작은 아이는 그저 밖에 있는 것이 신난다. 지나가는 개미를 피해 달려가느라 바쁘다가 뜨거운 땅바닥에 누워있는 지렁이가 걱정되어 한참을 앉아 살피기도 한다.


'시간을 소중히 여겨라'라는 말은 아이들에게는 군말에 불과한 듯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 일과를 계획하고 명상하는 자기 시간을 가지라는 미라클 모닝이나 두 시간만이라도 휴대폰을 멀리하고 다상량하라는 자기계발서 속 대가들의 이야기가 아이들에게는 이미 체화되어 있는 것 같다.


이 두 시간을 어떻게 하면 최고로 재미있게 보낼까 열심히 궁리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엄마 심심해.'를 외치면서 다른 놀이거리를 찾으려는 노력.


멀리서 자기계발의 원칙들을 찾을 것이 아니라 눈 앞에 살아 움직이는 자기계발'자'들의 움직임에 맞추는 것만으로도 나의 계발이 충분히 될 것 같다. 체력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내일 또 만나자는 자기들끼리의 약속을 뒤로 개미들이 과자 부스러기를 무사히 집까지 옮겼고 지렁이는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그런 것 같다는 보고를 받으며 6시, 집으로 올라온다.


열심히 저녁을 먹고 열심히 목욕을 하고 열심히 잠을 잔 후 내일 또 마법이 풀리는 시간을 맞이하자. 코로나로 집콕을 하면서 힘들어하는 건 어른들의 문제일 뿐, 아이들에게는 매일매일 다른 나날들이다. 좀 더 신나게 보낼 수 있는 새로운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