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by Haein

엄마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무슨 세상 무너질 일을 했나, 무슨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나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내가 평생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온 엄마에게 종교가 미친 영향력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집은 대대로 모태신앙을 지켜왔다. 뚜껑을 열고 보면 구한말 개신교의 역사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아가신 아빠는 이북 출신으로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였나...?) 평양에 온 미국 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영락 교회파 개신교 집안이었고, 제주도가 고향인 엄마도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접한 신실한 믿음의 집안이었다. 그 영향으로 나는 태어나자마자 교회에 다녔고 대학에 다니는 동안 개신교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했으며 그 영향으로 대학원에서 학부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신학을 전공했던 것이다. 어쩌다 보니 한때 교회와 그 언저리에서 일했으니 엄마 입장에서 나는 종교적으로 꽤 신실한 쪽에 속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엄마와 아빠는 "멀쩡한 대학 나와서 왜 전망도 없는 대학원에 가려고 하냐?"라며 집을 나가라고 했......)

엄마가 모르는 게 많은데, 첫째, 나는 신실하다기 보다 단순히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인간이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다닌 교회생활을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다. 게다가 나는 신심이 깊다기보다는 온 우주의 존재 이유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유와 죽음 이후의 삶과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 등 소위 말하는 돈 안되는 주제에 끊임없이 호기심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영성 서적이나 물리학, 뇌과학 서적이 다양하지 않았으므로 그저 그 언저리에서 질문을 던진 것뿐이다. 게다가 나는 교회에 다니는 동안 늘 재미가 없었다. 운이 좋아서 새로운 생각을 하는 정말 좋은 사람들 곁에 있을 수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늘 어딘가 지루했다. 세상의 새로운 문화에 흥미가 많고 반복을 싫어했으며 제도나 권위에 대한 알레르기가 심한 성격 탓일 수도 있었겠으나 기본적으로 내 자리가 아닌 듯한 혹은 좀 안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 사라진 적이 없었다. 나는 종교 정체성이 흐릿한 사람이었다. 불교 수행이나 동양적 명상에 더 많이 끌렸고, 좋은 수련 방법이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친구들의 종교도 무교에서부터 천주교, 천도교, 불교, 칭하이 무상사까지 다양하다.) 끝으로, 박사 과정을 진학한 학교는 서울불교대학원 대학교였다. (내가 기대한 박사과정 수업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고 목표 의식도 없어서 한 한기 만에 자퇴했지만.)

어쨌든, 엄마는 내 프라이버시를 존중했고 내가 말하지 않는 한 묻는 법이 없는 사람이어서 모르는 게 많았다. 그러니 내가 아메드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엄마는 놀랐을 수도 있다. 문제는 내가 그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엄마라 할지 라로 평생을 보수적인 교회에 속해 살아왔고 정치적 성향도 그 교회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이집트에서 왔어"라는 말을 했을 하기 전에 조심했어야 했다.

애지 간해서는 용건 없이 오지 않는 엄마가 내가 아메드에 관해 이야기한 지 3일 만에 다시 연락을 한 건 엄마가 3일 동안 정말 화가 많이 났고 그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처음에 엄마는 격앙된 목소리였지만, 종교에 관해 말을 하지는 않았다.

"뭐? 학생?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 건데?"

"네가 먹는 요리도 제대로 못하면서 걔를 어떻게 신경 쓰려고 그래? 그건 결혼이 아니라 노예야."

"지금은 네가 눈에 뵈는 게 없어서 판단이 안되는 거야. 결혼은 삶이야. 걔가 집이 있니, 취직을 했니.

네 몸 하나 건사 못하면서 어떻게 걔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살려고 그러니?"

여기까지는 아무리 엄마가 몰아붙여도 걱정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당시 우리는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메드의 석사 과정은 끝날 것이고 박사 과정이든 취직이든 무엇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비자는 만료될 것이었다. 아메드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라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그러니까 엄마의 기준에서 보면 (혹은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선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생에 아메드와 가보기로 이미 선택했고, 멈추거나 돌아설 생각은 없었다. 게다다 나는 '걱정'이 엄마가 사랑하는 방식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엄마의 사랑과 관심은 늘 아주 현실적인 조언이었고 엄마의 기대와 달리 현실감각이 제로였던 나는 엄마의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마지막 말은 타격감이 있었다.

"너 그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아? 아랍 남자들이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

그리고 이어진 말

"무슬림이라니.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나는 현실적인 문제는 앞으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차차 개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 때였으므로 조금 더 선명한 삶의 형태가 만들 신뢰는 따라올 것이라고. 하지만 종교적 문제는 좀 달랐다. 엄마의 다른 걱정은 현실의 상태로부터 오는 것들이었으나 종교적 문제는 그 너머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현실을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넘을 수 없는 큰 산을 만난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간 뒤, 나는 혼자서 조금 울었다. 친구도 거의 없고 애착을 느끼는 관계도 없는 나에게 엄마는 온 우주였다. 엄마의 지지는 나에게 무엇보다 큰 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평생 응원이나 지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사실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누군가 나를 지지하거나 응원하는 것에 영향받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나로서도 용기를 내어 걷는 새로운 삶이었으므로 이 발걸음에 아주 작은 응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게 엄마의 응원이었다면 나는 온 우주로부터 응원을 받는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끈 떨어진 연처럼,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게 사랑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엄마가 나한테 실망했다고 해서 내가 엄마에 대한 사랑을 잃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엄마에게 "엄마의 걱정이 사랑인 걸 잘 알아. 그래도 나는 가볼 거야. 그러니까 지지해 주면 좋겠어. 그리고 엄마 내가 엄청 사랑해"라고 문자를 보냈다. 물론 아무런 답문도 없었다.

아메드는 이 상황을 잘 알았다. 꿋꿋하게도 아메드는 크리스마스나 엄마의 생일, 그리고 특별한 기념일에 손으로 카드를 써서 보냈다. 서툰 한국어로, 엄청 삐뚤삐뚤한 글씨로, "어머니, 제가 최선을 다해서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딸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고맙고 사랑해요." 같은 내용 말이다. 현실주의자인 엄마가 싫어할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거부감이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아메드가 한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어도, 엄마에게 아메드는 여전히 '학생' 그리고 '무슬림 남자'다. 여전히 엄마는 딸의 동반자에 대해 어디에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사랑도 잃지 않았다. 여전히 아메드를 사랑하고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의 걱정마저도 사랑의 일부분이다.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 찔끔 눈물 흘릴 일이 생기지만, 그런다고 물러서거나 돌아서지도 않을 것이다. 엄마의 반응 때문에, 즉 외부의 상황 때문에 사랑을 내보내는 일이 끝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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