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봄,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 혼자 갑자기 짝이 바뀌었다.
개학 후 첫 일주일은 새로운 짝과 잘 어울렸고 학교 생활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단지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못 알아들어서 수업을 못 따라가는 바람에 가만히 졸음 참고 앉아있었던 거 빼고는.
그런데 주말이 지나고 학교에 왔더니 다른 아이로 바뀌어있었다.
나 없는 새 언제 짝을 바꿨지 싶어 둘러보니까 나 혼자 짝이 바뀌었다. 물론 먼저 짝했던 아이를 포함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쳐서 반가운 마음에 손 흔들고 인사를 했는데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라면 그 행동에 온갖 의미를 부여했겠지만 당시엔 어라? 하기만 했다. 날 못 봤나 싶었다.
곧 수업 시작이기도 했고 새로 바뀐 짝이 궁금해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말하기와 듣기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이들과 대화가 어려웠다.
게다가 보청기도 지금처럼 발달되어있지 않았다.
어른 손바닥 채 안 되는 박스 형태에 양쪽 귓본에 연결된 두줄이 끝으로 갈수록 한 줄로 모아져서 꽂혀있는 형태였다.
소리가 들어가는 마이크 부분이 박스 상단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옷 안에 착용하는 대신 옷 겉에 특수제작된 주머니 벨트에 넣어 고정해야 했다.
전체 모양은 어깨 부분이 벨트 정도로 가늘고 가슴 정도 길이인 안전조끼로 생각하면 되겠다. 가운데 버클이 잠그는 구조로 보청기용 주머니가 중앙에 달려있었다.
이 벨트를 옷 위에 차야했는데 어린 마음에 기껏 이쁘게 입은 옷이 이것 때문에 구겨지는 게 속상했던 기억이 많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 많은 애들 틈에서 마치 ‘별종‘처럼 튀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옷 위 가슴 위치에 주머니 벨트를 차고 양쪽 귀에서 긴 전선줄이 늘어져있어서 외관상 더 그리 되었다.
게다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말도 잘 못했다. 하긴 했는데 웅얼거리는 수준이었다.
못 알아들어서 항상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던 나는 아마 요즘이었다면 확실히 왕따가 되었을 듯하다.
뛸 때마다 이 보청기를 찬 벨트가 흔들려서 체육시간엔 혼자 앉아있곤 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내 또래들은 어려서 그랬는지 처음에만 보청기를 궁금해했을 뿐 내 상태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리 지어 놀고 있는데 슬며시 옆에 가서 앉으면 구경이라도 하라는 듯 끼워주었다.
돌이켜보면 그 아이들은 아직 장애에 대한 편견이 채 형성되지 않았고 그저 내 상태가 불편하구나 싶었던 모양이다.
곱씹을수록 정말 순수하고 착한 아이들이었구나 싶고 참 고마웠다. 만약 그 애들이 나를 노골적으로 피하고 못살게 굴었다면 아마 나는 큰 상처를 입고 열등감에 질식했을 거니까.
그리고 그 영향이 지금까지도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날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집에 갔는데 엄마의 얼굴이 유독 어두웠던 기억이 있다.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싶어 잠시 눈치 보았지만, 새로 산 종이인형을 오려보느라 금방 잊었더랬다.
짝인 바뀐 일은 우영부영 넘어가게 되었고 어느새 완전히 잊혔다.
(종이인형 놀이는 당시 한참 유행하던 놀이 중 하나였는데 A4 사이즈 크기의 종이에 속옷만 입은 여자와 각종 옷과 장신구, 신발들이 색색이 인쇄되어 있었다. 오려서 착용시켜 보는 놀이였다.)
그러다가 2학년을 거쳐 3학년 올라갔을 때였다. 1학기 처음 중간고사를 치렀을 때 올백을 받았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당시엔 아직 학교 명칭은 ‘국민학교’였고 초기, 중간, 기말고사를 한 학기에 3번 치를 때였다.
비록 수업을 못 따라갔었지만 대신 참고서와 문제집으로 공부하면 되었다.
슬프다면 슬픈데 언어훈련을 계속 받아왔음에도 여태 원만한 소통이 어려워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되레 공부에 집중했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었으니까. 아이들과 밖에서 어울려 놀기 어려웠고 텔레비전 방송을 전혀 못 알아들어 볼 수 없었고 그렇다고 나가 놀기엔 세상 소리를 잘 들을 수 없어 무서웠으니까.
시험 결과가 나온 후 며칠 지났는데 어느 날 방과 후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나를 툭툭 치길래 돌아보니 어떤 아줌마가 본인 자식을 데리고 서있었다.
누군가 봤더니 1학년때 잠시 나와 짝했다가 바뀐 아이와 그 아이 엄마였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면서 누구지 했는데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었다.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며 아이를 내 쪽으로 밀면서 인사시키길래 인사를 나누긴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니 지나가듯 대답하셨다.
“그래? 그런 일 있었어?”
생각보다 너무 건조한 엄마의 반응에 ‘별일 아닌 건가?’ 싶었다.
그래서 그날의 일은 그냥 넘어가게 되었다.
인사를 나눴던 아이와는 왠지 굳이 친해지고 싶지 않아서 이후로도 일부러 인사하거나 하진 않았다.
이후 중학생이 되었을 때인가 내가 어느 정도 큰 다음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문득 그 아이와 엄마 이야기를 꺼내셨다.
알고 보니 초등 1학년때 나 혼자 짝이 바뀐 건 그 아이 엄마가 담임선생님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본인 자식을 장애아와 짝을 시킬 수 없으니 바꿔달라고. 선생님이 엄마에게 전화하셔서 상황을 알리고 짝을 바꾸게 되어 죄송하다고 하셨단다.
아, 그래서 그날 엄마의 얼굴이 그리 어두웠구나 싶었다.
신기했던 건 짝이 바뀐 일은 분명 하루도 채 못가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신 떠올리지 않았었는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당시 상황이 너무나 생생하게 사진처럼 다시 기억나는 것이었다.
아마도 소위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작용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내 본능이 작용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입지 말라고 ‘잊어버린’ 모양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아이와 엄마가 찾아온 일은 내게 공부의 측면에서 큰 동기부여가 되었지 싶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겠구나 싶었고 공부라도 잘하면 장애가 있더라도 날 ‘무시‘하지 못하겠구나 싶었으니까.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처음으로 엄마가 되고 내 자식이 그 나이가 되어보니까, 그 옛날 일이 문득 다시 떠오르면서 마음이 아픈 것이었다.
우리 엄마 정말 속상했겠구나. 그때의 어린 나는 알게 모르게 상처를 많이 받았나 보다. 그 당시엔 상처 입었다는 자체를 깨닫지 못한 거였구나.
그 엄마는 어린아이와 엄마에게 참 잔인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했구나 하고.
내가 자라오면서 그런 종류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속상한 티를 안 내려고 애쓴 엄마에게 참 고마웠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