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의 '여백', 아마존에선 '지루함'이 되는 이유

by 아침산책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맛, 한국의 '여백'


한국 소설 좋아하시죠. 저도 참 좋아합니다.


특히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다 말하지 않고 꾹꾹 눌러 담는 감정들. 주인공이 말없이 창밖 먼 산을 바라보거나, 소주 한 잔을 앞에 두고 한숨 푹 쉬는 그런 장면들요.


우리는 그 행간을 읽습니다.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 침묵 속에 담긴 회한, 슬픔, 뭐 그런 복잡한 심경을 알아챕니다. 이걸 흔히 '여백의 미'라고 부르죠. 한국 문학이 가진 큰 미덕 중 하나입니다.


태평양 건너면 '예술'이 '지루함'이 된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아름다운 미덕이 태평양을 건너 아마존으로 가면 문제가 좀 생깁니다.


영미권 독자들, 특히 아마존에서 장르 소설을 주로 소비하는 독자들은 이 '여백'을 아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들은 이걸 못 견뎌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그 깊이 있는 침묵을 그들은 '지루함'이라고 번역해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 문해력이 딸려서? 감수성이 메말라서? 아닙니다. 그냥 이야기를 즐기는 문화적 코드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눈치'와 '맥락'의 문화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걸 미덕으로 여깁니다. 소설도 비슷합니다. 독자가 스스로 감정을 채워 넣을 공간을 남겨두는 걸 고급스러운 작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분위기'가 아니라 '사건'


반면 영미권 상업 소설은 다릅니다. 아주 명확해야 합니다.


주인공이 뭘 원하는지(Desire), 그걸 방해하는 게 뭔지(Conflict), 그래서 지금 무슨 행동을 하는지(Action)가 눈에 딱딱 보여야 합니다. 이걸 '사건' 중심으로 전개한다고 하죠.


그런 독자들에게 한국식 여백을 들이밀면 반응이 어떨까요.


주인공이 심각한 상황에서 갑자기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습니다. 작가는 그 연기 속에 온갖 감정을 실어 보냈지만, 미국 독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지금 급해 죽겠는데 왜 멍 때리고 있어? 그래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그들 눈에는 사건이 진행 안 되고 멈춰버린 겁니다. 답답하죠. 페이지가 안 넘어갑니다. 그러면 바로 별점 테러가 이어집니다. "Nothing happened(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Boring(지루하다)" 같은 리뷰가 달립니다.


우리가 '은근하게 스며드는 감정'을 좋아한다면, 그들은 '확실하게 터지는 갈등'을 좋아합니다.


내 '여백'을 '친절'로 채워야 할 때


아마존에 내 소설을 팔아보고 싶다는 작가님들을 종종 만납니다. 번역만 잘하면 우리 정서가 통할 거라고 기대하십니다. 물론 통하는 작품도 있겠죠. 하지만 대다수 상업 소설 시장에선 이 '여백'의 차이를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고 하죠. 아마존에 가면 아마존 독자들의 독법을 어느 정도는 따라야 내 이야기가 읽힙니다.


내 소중한 여백을 다 포기하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 약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해외 독자들을 위한 '친절한' 글쓰기 팁 3가지를 드립니다.


1. 침묵을 구체적인 '생각'이나 '행동'으로 바꾸세요


주인공이 말없이 소주잔만 기울이는 장면. 한국 독자는 "아이고, 짠하다" 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미국 독자는 "그래서 무슨 생각 하는 건데?"라고 묻습니다.


이럴 땐 침묵 대신 내면의 독백을 한 줄 넣어주세요. '이 잔을 비우면 그녀에게 전화할 용기가 생길까'처럼요. 아니면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소주잔을 쥔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막연한 분위기 대신 구체적인 단서를 줘야 합니다.


2. '눈치'로 때우지 마세요


한국식 '정(情)'이나 '한(恨)', 혹은 선후배 간의 묘한 기싸움 같은 거, 우리끼린 설명 안 해도 압니다.


하지만 해외 독자는 모릅니다. 이걸 눈치껏 알아서 해석해 주길 바라면 안 됩니다. 상황이 주는 압박감이나 감정의 인과관계를 우리 기준에선 '너무 설명적인 거 아니야?' 싶을 만큼 친절하게 풀어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3. 주인공의 '욕망'을 매 순간 보여주세요


영미권 장르 소설의 핵심 엔진은 주인공의 '강렬한 욕망'입니다.


이 장면이 주인공이 원하는 걸 얻는 데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 명확해야 합니다. 단순히 감정을 잡거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장면이 길어지면 가차 없이 지루하다고 느낍니다. 주인공을 쉬지 않고 굴리세요. 그게 그 동네 룰입니다.


소설가를 위한 아마존 출판 가이드

https://morningwalkai.com/ebooks/?idx=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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