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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말라잎 May 22. 2024

어느 4월의 일기에서 너의 웃음소리가 들렸어.

프롤로그

아이의 일기장은 분홍색 홀로그램커버 가운데 헬로키티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다. 내지의 테두리도 핑크색이다. 딱 여자 아이가 좋아할만한 두께가 좀 있는 양장노트다. 그림 일기를 두 권쯤 쓰고 나서 일기장으로 쓸 공책을 골라오라고 했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공책들 중에서 꽤 고심해서 고른 것이었다. 아이는 이 일기장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꽉 채워 쓰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물론 아이 스스로 일기를 쓰지는 않고 엄마의 잔소리가 있어야만 하는데, 아이에게 매일 일기를 쓰도록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치가 빠지거나 수영 배지를 따거나 수학경시대회에 참석하는 특별한 일이 있는 날에는 꼭 일기를 쓰게 한다. 


아이의 일기는 매우 간단하다. 하루동안 있었던 특별한 일들을 간단하게 쓰고 휴대용 사진출력기로 뽑은 사진을 일기장에 붙이는 것으로 일기의 커다란 틀은 완성된다. 사실 아이가 공을 들이는 것은 일기 내용보다 일기장을 꾸미는 일이다. 기분이 좋은 날은 온갖 색연필을 사용해서 형형색색 일기를 꾸미고 쓰기 귀찮은 날은 아이의 표정이 보이는 듯한 단순한 문장들이 틀린 맞춤법과 함께 무심하게 나열되어 있다.


아이가 써내려간 어린 단어와 문장들이 나열된 일기장에는 아이만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수영 수업이 무서운 마음, 만년필을 처음 써봤을 때의 설렘, 여행지에서의 행복감, 숙제를 안 해서 엄마한테 혼날 까봐 걱정되는 마음들이 엉망진창인 맞춤법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 있다. 게다가 영어 필기체로 날려 쓴 날은 엄마가 못 알아보는 탓에 완벽한 비밀 일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점이 매우 마음에 든다. 아이에게도 자기만 알아볼 수 있는 자신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너무 귀엽다.


어느 늦은 오후, 아이가 꽤 오래 나를 찾지 않고 조용했다. 조용한 분위기에 설마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건가 싶어 아이 방에 슬쩍 들어가서 뭐 하고 있냐고 물었다. 아이는 분홍색 홀로그램 일기장을 쓱 덮으며 씩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 내 일기가 너무 재밌어.”

“그렇지? 쓸 때는 참 귀찮기도 한데 나중에 읽으면 참 재밌다니까.”

“응. 일기를 더 많이 써야 될 것 같아.”

일기 쓰기를 통해 아이가 기록의 즐거움을 알기 바랐기에 아이의 대답이 정말 반가웠다. 


나는 이러저러하게 기록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열심기와 휴식기를 오가며 제법 꾸준하게 기록해 왔다. 그렇게 쌓인 기록의 시간이 십여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미래에 돌아보는 오늘의 기록은 부끄러움이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리움과 행복감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독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해외살이가 처음인 나는 막연하게 더 많이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모든 것이 달라진 새로운 삶이 기록의 즐거움을 증폭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기록은커녕 모두에게 첫경험인 이민 생활은 우리 가족을 각자도생, 고군분투하며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가게 만들었다. 매일이 너무 치열했다. 삶의 치열함이 얼마나 바쁜 지가 척도라면 우리는 하나도 바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에서 보다 더 단순한 삶을 살았다. 남편은 회사를 갔고 나는 집안일을 했고 아이는 유치원에 갔다. 그뿐이었다. 달라진 것은 언어와 문화였고 우리가 이 곳의 완벽한 이방인이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것을 즐긴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도 매일 우리는 지쳐갔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 시간을 어딘 가에 새겨 두고 싶은 욕구가 점점 강해졌다. 무력감이 가득하고 특별한 일은 없었고 좋은 말을 쓸 수 없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록이라는 것은 참 보잘것없고 꾸준하지 못해서 일기장과 달력에 아이가 했던 말들을 짧게 메모하는 것이 전부일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어 하나라도, 아이의 한마디 말이라도 적었다. 때로는 자리 잡고 앉아 그 무렵의 일들을 길게 쓰기도 했다. 대부분 힘든 일들을 일기장에 털어놓듯 미주알고주알 적는 일들이 많았다. 그때 그 메모들과 글들을 읽으면 그때의 시간들이 환영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탁상 달력에 적혀 있던, 지치고 어두운 단어들과 환영들 사이로 “네가 깔깔 웃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 행복하다.”라는 한 문장이 마음으로 달려들었다. 독일에 온 지 반년쯤 되었던 4월의 달력에 쓰여 있던 한 줄의 메모였다. 긴 겨울 끝에 꽃내음이 나는 듯한 한 문장이었다.  별 것 아닌 이 한 문장에 갑자기 눈물이 맺혔다.


아이가 노는 모습을 공허하게 바라보던 나의 모습과 그런 엄마를 보고 더 열심히 웃던 아이의 모습이 잔상이지만 또렷하게 떠올랐다. 답답하고 갑갑했던 그때의 우리 삶을 환하게 만들던 아이의 넘어가는 듯 웃던 웃음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새로운 적응 하느라 너무 지쳐서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았던 시간에 아이의 까르르 넘어가던 웃음소리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도 생각났다. 내 아이의 한 번뿐인 어린 날을 그래도 어떻게든 행복하게 보내려고 애썼던 과거의 나도 생각났다.

 

‘아, 그래도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았었구나.’ 

그 달력을 앞에 두고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과거의 우리를 칭찬했다. 그때는 다독이지 못했던 우리의 시간이었다. 


기록의 힘을 믿는다. 글자로 꾹꾹 눌러 담은 날들은 언제라도 글자에서 튀어나와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데려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현재를 위로해 줄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의 편지들’이나 ‘안네의 일기장’을 꾹꾹 눌러썼을 그 시간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의 인생도 참 고단했다. 그들은 그 시간을 기록했고 그들이 남긴 글자는 지금의 사람들에게도 영감과 위로를 준다. 그것이 기록의 힘이다. 


“엄마가 너와 나눈 이야기들을 기록해 보려는 데 어떻게 생각해?”

“기록? 그게 뭐야?”

“음, 일기 같은 거야.”

“엄마하고 내가 쓰는 일기장이야? 우와! 너무 멋지다.”


아이가 대찬성을 외쳤다.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삶의 배경이 바뀌었고 아이는 그 속에서 자란다. 아이와의 대화는 점점 깊이를 더해가고 아이의 시야도 넓어진다. 아이의 인생은 내가 살아온 인생과 달라 가끔 멈칫할 때도 있다. 그런 날들을 아이가 분홍일기장에 써넣듯, 나도 그렇게 적어볼 생각이다. 가까운 미래에 그 활자들이 우리를 위로하고 잘 살고 있다며 다독일 것들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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