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하지 않은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미적지근한 모든 것들은 물에 씻겨간다.
남들보다 뇌의 용량이 작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엄마가 옛날에 어딜 갔던 이야기, 뭘 먹었던 이야기를 하면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어릴 때 이야기도 아닌데.
“그때 왜 할머니랑 용궁사 갔을 때 말이야.”
대체 언제 얘길 하는 건지? 아무리 뇌에 힘을 줘봐도 흐릿하다. 비 내리는 날 와이퍼 없는 차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 그때?”
비슷한 장면들을 조합해 기억을 제작해 본다. 이걸 기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저화질의 기억들은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기승전결이 빈약하다. 나는 어쩌면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추상적으로 저장해서 그걸 말로 구체화하지 못하는 걸 아닐까.
추억을 공유하지 못할 때는 심장이 아릿하다. 내게 그 기억이 소중했다면 나는 분명 기억하고 있을 테다. 내가 버린 순간이 엄마와 할머니에겐 중요했다는 걸 알았을 때 효라는 콤플렉스가 불쑥 솟아난다. 그들과의 시간을 너무 대충 보낸 건 아닐까.
여태껏 붕어 같은 뇌를 탓하던 나는, 엄마의 말을 듣고 생각을 달리했다.
“너는 한창 새로운 일들이 많이 생겨날 시기잖아. 엄마나 할머니는 그럴 일이 많이 없어서 그때 일들을 더 잘 기억하고 있는 거야.”
아, 이거구나. 내 머릿속은 한국의 아파트처럼 불쑥 솟아났다가 재건축에 들어가고, 또 철거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구나. 가치 있는 추억은 문화재가 되고, 그렇지 않은 추억은 난쟁이가 쏘아 올린 공이 되어버리고..
늙었을 때는, 사라지는 것들이 적어질 때구나.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기억은 콘크리트처럼 땅땅하게 굳는다. 대체될 필요가 없을 만큼 반짝이고 강렬한 기억들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혹은 <아몬드>처럼 서점 내 베스트셀러 매대에 오래도록 남는다. 늙기 전에는 많은 기억들이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들이 적어질 때 비로소 늙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엄마는 담담하게 얘기했는데, 담담한 만큼 슬퍼졌다. 내 기억 속 엄마의 모습은 아직도 30대에 멈춰있는데 세월은 순간을 즐길 만큼 충분히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건지. 세월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오래토록 술주정을 하고 싶었다.
우리가 지나간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기억을 여러 저장소에 분산시켜 누군가가 기억의 사서가 되어주길 바라서가 아닐까. 엄마는 나의 든든한 사서가 되어주었다. 내가 기억치 못하는 것들을 끄집어 올려서 탈탈 털어 다시 널어주고. 그렇게 살아난 기억은 포근한 볕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나의 일부는 그렇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또한 엄마의 찬란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테니.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은 사라지는 것들을 막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다. 나누거나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테니. 어쩌면 우리는 늙음을 동경하고 있을 지도. 사라질 일이 없는 단단한 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