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
중국 남방항공 출국 수속 라인은 중국 단체 여행객들로 인해 하염없이 길다. 이십 분쯤 진행한 후에야 겨우 정식 라인에 진입하여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바바리 깃을 올리고 한껏 멋을 낸 남자가 길게 늘어선 줄을 완전히 무시한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들어간다. 새치기다. 한 성질 하는 병태가 가만둘 리 없다.
"어이 ~~ 아저씨 줄 서요. 줄 안 보여요?"
"이 사람아 누가 줄 안 선대? 왜 그렇게 말이 거칠어?" 나이도 병태보다 어려 보이는데 대뜸 반말이다.
"여보쇼 질서를 지켜야지 여기 서 있는 사람은 전부 빙신인가?"
"아 누가 빙신이래? 이게 어디다 대고 까불어?
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점입가경이다.
"먼저 새치기한 사람이 누군데 어디서 반말 질이야?"
"야 너 이 XX 너 오늘 잘 만났다 나, 오늘 뱅기 안 타도 돼. 너 이리 나와 이 눔의 XX, 저 쪽으로 가서 맛 좀 봐라." 바바리가 병태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갈 기세다. 이쯤 되면 영자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여보세욧! 먼저 새치기한 건 맞잖아욧! 난 무조건 내 남편 편만 들진 않아요. 객관적으로 봤는데 왜 처음부터 반말에 시비예요? 어딜 나가재? 나가려면 댁이나 나가세요. 우린 수속하고 비행기 탈 거예요. 이 사람이 어디다 대고 난리야? 경찰 부를 거예요. 누군 뭐 정말 빙신이라 당하기만 할 줄 아나? 정말 한번 해볼래요? 중국사람들 많아서 나라 망신이라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더니." 뱁새눈을 있는 대로 부릅뜨고 앙칼지게 쏘아댄다. 데이트하다가 혹 불량배라도 만나면 여자가 엄청 세게 나가야 한다는 소싯적 오빠의 조언이 불현듯 떠오르며 만약 쥐고 있다면 유리병이라도 내려칠 기세로 대든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다. 바바리가 갑자기 꼬리를 내린다. 그것도 빛의 속도로. 그리고 뒤로 가서 얌전히 줄을 선다. 이번엔 병태가 분이 안 풀린 듯 여전히 씩씩댄다.
"쉿! 당신도 좀 조용히 해요. 첨부터 어이 아저씨가 뭐야? 점잖게 얘기해도 될걸." 다행히 더 이상의 싸움으로는 번지지 않은 채 출국 수속을 마친다. 그러나 큰소리쳤을 때와는 달리 면세구역에 들어선 영자는 비슷한 바바리만 봐도 가슴이 팔딱거린다. 혹 같은 항공편 일까 봐 탑승할 때까지 사뭇 불안하다.
*네팔 카트만두-60년 대 우리 동네*
카트만두 공항 without visa 앞의 엄청난 인파와는 달리 with visa 줄은 상당히 한가하다. 비자를 미리 받아오길 정말 잘했지? 잘난 척하는 걸 잊지 않으며 잽싸게 공항을 빠져나온다. 밖으로 나오면 삐끼들이 몰려와 무조건 가방을 뺏어 택시까지 안내하고 팁을 요구한다 했다. 각오는 했었지만 늦은 밤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고 흥정을 조금 하다가 무사히 택시에 오른다.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어렴풋하긴 해도 틀림없는 유년의 우리 동네 서울 신당동 xx번지 x이다. 꼭 티코만 한 크기의 낡은 인도산 택시는 이내 불빛이 거의 없는 동네로 들어서더니 족히 30cm는 오르내리며 엉덩방아를 찧어야 하는 비포장 도로가 이어진다. 차 천장에 몇 번인가 머리를 부딪치고, 엉덩이가 얼얼해지는데 길은 여전히 갱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골목길이다. 긴장한 병태가 평소와는 다르게 소곤거린다.
'예약한 호텔이 여기가 맞아?'
'나도 첨 와 봤으니까 당근 모르지'
영자도 어울리지 않게 속삭인다.
'별 세 개 반 짜리라며?'
'그래 분명히 xx닷컴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
도저히 호텔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골목길을 기사님도 모르겠는지 자꾸 헤매고, 중국 어딘가에서 부부가 택시 탔다가 장기 밀매단에게 납치되었다는 괴담까지 마구 떠오를 즈음, 철문이 굳게 닫힌 폐가 같은 집 앞에서 기사님이 경적을 울린다. 조그만 간판에 네팔어만 잔뜩 쓰여있어 예약한 호텔이 맞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한참을 기다리니 자다가 눈 비비며 나온 십 대 소년이 쇠빗장을 끼긱끼긱 열어준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사진으로 봤던 건물, 영자가 예약한 호텔이 맞다. 4층 건물에 객실이 40개는 됨직한 호텔에 투숙객은 우리뿐인 듯, 역시 자다 깬 호텔 직원은 언제 잤냐는 듯 상냥하기 그지없다. 아침 일찍 포카라행 비행기를 타야 하니 이른 아침을 먹어야 하고 시간에 맞춰 택시를 불러달라는 우리 요구를 120% 들어줄 기세다. 친절한 직원 덕분에 먼 길을 날라 온 피곤도 잊고 공인 단무지(단순, 무식, 지X) 둘은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내일 아침 포카라로 날아가 포터와 합류하고, 예약해 놓은 차를 타고 두 시간쯤 달려간 후 오후부터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포터에게 맡길 짐과 둘이 메고 갈 짐을 나누어 정리해 놓고 하얗고 포근한 침대에서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