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태와 영자의 ABC-4

땅바닥에 철퍼덕

by 임경희

로지라고 불리는 산속의 숙소는 엇비슷하지만 시설이 조금 나은 곳도 있는데 그런 곳은 어김없이 만실이다. 방과 방 사이를 얇은 합판으로 막아 놓았기 때문에 옆 방의 뒤척거리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린다. 화장실은 공용으로 한 개나 두 개 있으니 시설이 좀 떨어지더라도 덜 붐비는 쪽을 택하는 게 낫다.


핫 샤워가 가능하다고 강조하는 여주인이 보여주는 샤워실은 양변기 옆에 LPG 가스통과 연결된 샤워 꼭지가 있고 못을 동그랗게 구부려 만든 요상한 도구를 떨어져 나간 꼭지에 꽂아 조심스레 비트니 병아리 눈물만큼 또로록 뜨뜻한 물이 나오긴 한다. 모든 문의 잠금장치는 직사각형 나무토막의 가운데에 대못을 박아 수직으로 걸쳐 놓으면 잠기고 평행이 되게 돌리면 열린다. 낯설지 않아 정겹다.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은 헐거워진 나무토막이 저절로 돌아가 그냥 열리기도 하는 것. 특히 화장실의 문짝은 단단히 여며 놓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발을 헛디뎌 사정없이 곤두박질칠 것 같은 좁고 구부러지고 가파른데 난간도 없는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간 후 작은 방들이 다다닥 붙어 있는 복도, 제일 끝 방이 우리 방이다. 방에는 딱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나무 침대 두 개가 양쪽 벽면에 붙어있고 얇은 스펀치 매트가 깔려있다. 그 위에 준비해 온 침낭을 펴고 자야 한다. 두 침상 사이의 거리는 50cm 정도. 그리고 옷걸이용으로 벽에 박힌 못 세 개. 이것이 방안 시설의 전부다. 하룻밤 숙박비 약 3000원, 샤워 인당 1000~1500원. 변기 옆의 샤워기 아래에서 거의 묘기에 가까운 포즈로 씻어야 했지만 그렇게라도 씻고 나니 날 듯 상쾌하다.


청정한 히말라야 깊숙한 산속. 폭포소리 같이 우렁찬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로지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은 여왕이 부럽지 않다. 한껏 오만해져서 잘 넘어가지도 않는 짧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있는 대로 거들먹거린다.


그러나 잠시 후 여주인이 조심스레 식탁에 늘어놓은 먹거리 앞에선 한숨이 절로 나온다. 웬만하면 무어든 잘 먹는 병태와 영자였는데 로지에서의 메뉴는 거의 비슷해서 볶음밥, 달밧이라는 네팔 국밥에 현지 빵이 전부이다. 볶음밥은 너무 짜고, 밥알들은 거의 승천할 기세로 마구 날아다닌다. 달밧은 느글거렸으며, 빵은 흘러내릴 만큼 기름범벅이다. 각오는 했었지만, 가져온 깻잎, 볶은 김치, 마늘장아찌, 볶음고추장으로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앞으로 계속 걷는 일정인데 두 돼지가 통 먹지 못하니 살짝 걱정되기 시작한다.


대부분 일정이 해가 지기 전, 네 시쯤 엔 목적지 숙소에 도착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 때문에 씻고, 밥 먹고, 배낭 정리 후엔 별로 할 일이 없다. 어두워지면 작은 로지에선 거의 소등을 해버리니까 6시만 되어도 바로 침낭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해야 한다.


제일 큰 걱정이 밤에 변소 갈 때이다. 반드시 그렇게 불러야 할 것 같은 이름 변소다. 양변기가 있어 생각보다 깨끗했지만 어쩐지 빨강종이, 파란 손이 들락거릴 것처럼 몹시 으스스하다. 깊은 산속 허름한 숙소의 삐걱거리는 깜깜한 복도와 계단은 손전등 만으로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고산병을 예방하겠다고 마구 마셔댄 물로 빵빵해진 아랫배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자꾸 신호를 보내온다. 괜찮다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지만 병태도 혼자 가긴 싫은 눈치다.


새벽 한 시. 둘은 아직 익숙지 않은 침낭에서 힘겹게 빠져나와 조심조심 방을 나선다. 거의 기다시피 엉금엉금 내려가 변소에 들어갔다 나오는 영자를 병태가 황급히 잡아 끈다. 병태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 영자의 무릎이 스르르 풀어지며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환할 때엔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마차푸차레 봉우리가 바로 영자 머리 위에서 삼킬 듯 덮고 있다. 새까만 밤하늘을 거의 다 덮을 듯 어마어마한 설산의 서슬 퍼런 위용에 갑자기 몸이 마구 떨려온다. 그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무서워 정말 무서워, 죄가 있다면 무조건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세요'

그 자리에 엎드려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어 진다.

주저앉은 영자는 바닥이 차가운 것도 못 느끼며 한동안 꼼짝 못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