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태와 영자의 ABC-5

산집 아기

by 임경희

매일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기도 하지만 네팔이 우리나라 보다 세 시간 정도 늦기 때문에 새벽 네 시 전에는 저절로 눈이 떠진다. 별로 할 일도 없으니 계란프라이와 삶은 감자로 아침을 때우고 7시쯤엔 숙소를 나선다. 깊은숨을 들이키며 폐 속 가득 들이키는 싱싱한 공기가 밥만큼 달다. 어젯밤엔 금방 벌이라도 내릴 듯 무서운 산신령 같아 나도 몰래 주저앉고 말았던 마차푸차레가 아침엔 인자한 옆 집 언니처럼 하얗고 맑은 미소를 보내준다.


-마차푸차레 Machhapuchhre-


fish tail-

물고기 꼬리라는 이 신비한 봉우리 정상에는 아직 아무도 오른 사람이 없다. 신성하게 여겨 네팔 정부에서 등정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날렵한 물고기 꼬리 모양의 눈 시린 순백의 정상은 똑바로 쳐다보기 송구 할 정도로 성스러워 보인다.

포카라에서 나야풀까지 오는 길 내내 멀리서 지켜주듯 자상한 모습을 보이더니 MBC(machhapuchhre base camp)까지 오르는 길에선 마치 등대 같다. 구름을 어깨에 두르고 늠름하게 서있다가 이제는 산에 가려 안보이려나 싶으면 어느새 저만치서 다정한 친구처럼 손짓하고 있다.


그 산을 바라보며 그 산을 향해 빨려들 듯 걸어가는 길은 몸 안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고, 사유하게 하는 치유의 길이다. 그 길을 저만큼 앞서서 휘적휘적 병태가 걷는다. 영자도 천천히 그 뒤를 따른다.


해발 2170m 촘롱까지 3000개는 됨직한 어지러운 돌계단 오르막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태산이 높다 하되... 를 수십 번 되뇌며 힘겹게 오른 촘롱에서 마주친 마차푸차레는 현기증이 날 만큼 황홀하다. 컵라면과 함께 먹는 볶음밥도 환상적이고 믹스커피 역시 최고다.


이번 일정 중 제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촘롱을 지나자 다시 급격한 내리막 길이다. ABC까지의 길이 차라리 오르막만 계속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라가다가 내리막 길을 만나면 어김없이 나오는 병태의 투정. '알탕알탕 광팔아 모아 둔 돈을 한꺼번에 다 털리는 느낌' 이란다. 고스톱 이야기다. 조금 내려오다 다시 오르겠지 싶었는데 웬걸 돌계단 3000개를 다 내려와 완전히 바닥까지 닿는다. 강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시냇물이 넘쳐흐르는 골과 골은 긴 출렁다리로 연결돼 있다.

"완전히 다 털리고 이제 알거지가 되었네.

"할 수 없지 뭐 다시 광팔러 가야지 자 출발~"

출렁다리는 출렁거리라고 있는 거라며 신나게 출렁거리며 건넌다.


다리를 건너니 작은 오두막집 툇마루에 커다란 바구니가 매달려 있고 집 앞 좌판엔 음료 몇 개, 초콜릿 몇 개가 놓여 있는데 지키는 사람은 없다.

일하러 나갔단다. 음료를 사고 싶으면 돈을 놓고 가져가면 된단다. 온몸으로 햇빛을 맞으며 좌판에 놓여 있는 빨간 콜라는 생경하다.


그 집 앞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매달린 바구니에서 15개월쯤 돼 보이는 아기가 배시시 나온다. 놀라긴 했지만 너무 귀엽다. 아기를 저렇게 바구니에 넣어놓고 일하러 나간단다. 섬집 아기는 우리나라 어촌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까만 사탕 눈의 아가는 얼러주니까 깔깔 잘도 웃어준다. 가져간 간식을 주고 싶었지만 등산로 주변의 아기들이 사탕을 많이 먹어 이가 전부 썩으니 절대로 주지 말라고 네팔치과협회에서 특히 한국사람들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과자 하나 건네지 못해 서운한 영자가 일어서려는데 혼자 있기 싫은 아기가 울먹거린다. 그 아기를 두고 오려니 마음 한구석이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