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태와 영자의 ABC-6

아닌 밤중의 변소 청소

by 임경희

등산로에 있는 집들은 어느 집이나 깨끗이 청소한 변소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 제공한다. 주인이 있든 없든.

야박하기 그지없는 유럽 화장실이 생각난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잃어버리는 소중한 것들. 영자 역시 어쩔 수 없다며 적응해 버리는 얍삽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소중한 것들을 아주 잊어버리지는 말자고 다짐한다.


애잔함을 뒤로한 채 그 집을 나서니 다시 끝없는 오르막의 연속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해발 2340m 시누와다. 하루에 1000m 이상 고도를 높이지 않는 것이 좋단다. 천천히 오르면서 자주 쉬고 물 많이 마시면 고산병 예방에 좋다니 그 규칙을 충실하게 지킨다. 하루 7~8시간쯤 놀며 쉬며 걸으면 목적지에 닿는다. 주말에 동네 수통골을 꾸준히 오르며 체력을 다져 놓아 가능하겠지만 고산병에 대한 우려만 없다면 올라가는 것은 견딜만하다.


도착한 시누아의 숙소는 그곳 로지중에서도 최악이다. 먼지가 덕지덕지 쌓여있는 창틀에 침상은 부서질 것 같고 밤에 춥다며 주인이 가져다준 이불은 만지기도 꺼려질 만큼 형편없다. 때가 타서 검게 변한 솜뭉치를 얇은 거즈 같은 헝겊으로 씌어 놓았는데 살짝 들었다 놓기만 해도 닭털 베개싸움이라도 한 것처럼 목 안에 먼지가 가득 찬다.


졸졸 나오는 뜨뜻한 물은 여기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이 많아 한 시간 반정도 추위에 떨며 기다렸는데 하필 영자가 씻을 때 가스가 떨어져 찬물로 마무리했으니, 어제와는 다른 이유지만 오늘 역시 이빨 다다닥 부딪치고 몸은 덜덜 떨리는 고행의 연속이다. 숙소는 영화에서 본 포로수용소와 흡사하다. 손님으로 가득 찬 수용소는 무척 혼잡하다. 영자방이 있는 2층에는 작은 방이 6개 있는데 복도 끝에 변소가 하나 있다.


어젯밤과 비슷한 시간에 같은 모양새로 변소에 간 둘은 경악을 금치 못 한다. 막힌 변기에서 흘러넘친 오물이 바닥까지 가득하다. 누가 뒤처리를 하지 않고 간 모양이다. 여기 말고 계단을 내려간 후 한 층 더 지하로 내려가면 시커먼 굴 같은 곳에 변소가 하나 더 있다. 하지만 그쪽 사정도 장담할 순 없을 것 같다.


새벽 두 시.


둘은 변기 뚫기에 돌입한다. 그나마 다행히 변소 안에 수도와 자루 달린 수세미가 있다. 온갖 당근과 채찍으로 여기까지 데려온 병태의 못된 성질이 도질까 봐 영자는 전전긍긍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락가락 눈치보기 바쁘다. 그런데 히말라야에 온 뒤부터 오랜 세월 도 닦으신 수도승이라도 됐는지 병태는 수세미를 뺐어 쥐더니 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그런 병태의 뒷모습이 낯설긴 해도...... 많이 고맙다.


한밤중 변소 청소는 영자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긍정의 달인답게 아주 귀한 경험이었다고 꼭꼭 새겨둔다.


고진감래라고 시누와를 지나자 언제 그렇게 힘든 오르막이 있었나 싶게 편안한 숲길이 이어진다. 울창한 원시림 속을 걷다가 나무가 흔들리는 곳을 올려다보면 어김없이 흰 원숭이 가족이 놀고 있다. 대부분의 나무는 줄줄이 줄기를 늘어뜨린 기생식물로 뒤덮여 있어 아바타 영화 속에 들어온 듯하다. 우렁찬 것 같지만 아주 멀리 들리는 물소리로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골짜기는 까마득히 깊다. 깊고 푸른 숲 속을 아바타의 나비족이 된 영자가 맘껏 날고 있다.


아무렇게나 내딛던 발 밑에서 뱀이 밟힐 뻔 해 기겁하기도 했지만 두 시간 정도 편안한 원시 숲을 즐긴다. 이런 길만 계속된다면 매일 이 길을 걷고 싶다며 콧노래가 힘찬 이중창으로 변할 즈음 여기는 히말라야임을 각인시켜주듯 다시 험한 오르막길이다. 한참 오르다가 노천 힌두사원을 만난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네팔 사람들처럼 그들의 신에게도 경건한 기도를 드린다. 안전 산행을 위하여, 그리고 네팔의 발전을 위하여. 사원 반대편에 108 폭포가 보인다. 내키는 대로 내지르듯 높은 산 전체를 뒤덮으며 쏟아지는 폭포는 힘겹게 오른던 발길들이 잠깐 쉬며 들이키는 가슴 뻥 뚫리는 청량제다.


해발 2500m 이상에는 자생적 마을이 없고 트레커들을 위한 로지만 있다. 로지에서 쉬고 밥도 먹고 더 이상 올라가기 힘들면 자고 가면 된다. 그러므로 지칠만 하면 나타나 주는 로지는

오아시스처럼 반갑고 고맙다. 병태의 광 팔기 타령도 지칠 만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한 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데우랄리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