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3230m
올라갈수록 로지의 상태가 열악하고 다른 사람들과 방을 함께 사용해야 한다고 해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운 좋게 우리만의 깨끗한 방이다. 여기서는 이만하면 호텔이다. 방에서 20m쯤 떨어진 곳에 변소가 있고 변소 안에 수도 대신 놓인 큰 통의 물로 볼일 본 것도 처리하고, 세수도 하고, 양치질도 해야 하는 호텔.
반대쪽 30m 거리에 좀 멀긴 해도 수돗가가 있다. 바로 코앞에 설산들이 버티고 있는 골짜기 낭떠러지의 수돗가. 거기서 마주한 경치는 오금이 저릴 만큼 멋지다. 짐을 풀자마자 수돗가에 나가 속옷 몇 개 빨고 세수하고 양치질까지 마친다. 이런 곳에서 언제 씻어보냐며 춥다고 망설이는 병태까지 닦달한다. 3000m 이상에선 세수도 절대 하지 말라던 선배들의 충고를 깡그리 무시한 채.
3200m 절벽 위에서 날 것 그대로의 통쾌한 바람을 만끽하고 식당으로 향한다. 그런데 식탁에 앉자마자 병태가 갑자기 이빨을 다다닥거리며 떨기 시작한다. 왜, 또? 하루만 그냥 지나가면 아니 되겠니? 그런데 오늘은 정말 심각하다. 식사를 포기하고 방으로 돌아와 파커를 입은 채 누워 이불을 두 개 덮어줘도 떨림은 멈추지 않는다. 털모자를 쓰고 온몸엔 핫팩으로 도배를 한 뒤, 뜨거운 물통까지 침낭에 넣어줬는데 병태의 오한은 잦아들 줄 모른다. 오늘 밤부터 고산병 예방약을 먹으려고 했지만 열 내리는 것이 우선이니 준비해 온 해열제를 두 개나 먹인다. 2700m 이상 올라오니 아무것도 못 먹은 돼지 병태가 앓는 소리를 하며 아파하니 보는 영자도 많이 아프다.
초저녁부터 이마에 찬 수건을 계속 갈아주고 약기운도 돌았는지 한밤중이 되자 다행히 병태의 고열과 오한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러나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고산병과 싸워야 하는 구간이다. 최상의 컨디션이라도 조심스러운데 저렇게 아픈 상태로 더 진행하는 것은 무리다. 어차피 메달을 다투는 경기도 아니고 누구에게 내세우려고 떠난 길도 아닌데 영자는 그만 하산하기로 마음먹는다. 내려가는 길도 롤러코스터 길이니 결코 만만치 않아 하산 일정과 병태의 상태를 살피느라 그 밤 영자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산하겠다고 얘기하니 의외로 병태가 완강하다. 고지가 코 앞인데 예서 물러설 순 없단다. 워낙 승부욕이 강한 병태의 고집을 꺽지 못해 일단 올라가 보기로 한다. 고산 증세 때문인지 둘 다 식욕이 전혀 없다. 가져갔던 누룽지를 끓여달라고 부탁해서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때우고 일찌감치 길을 나선다. 어느새 계곡 밑바닥까지 내려온 길은 언뜻 보기엔 험한 것 같지 않아도 계속되는 오르막에다가 이미 상당히 높은 구간이라 평소처럼 씩씩하게 진행하기 어렵다.
얼마 전 이 구간에서 한국 여성이 고산증세로 중심을 잃고 계곡 밑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는 말에 발걸음이 더욱 무겁다. 초콜릿으로 허기를 달래고 자주 쉬어 가며 겨우 MBC에 도착한다. MBC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 오르자 그동안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마차푸차레가 몇 걸음이면 뛰어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이 바로 코앞에 있다. 까마득히 멀리서 우러르던 봉우리를 지척에서 마주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과연 3대 미봉답게 누구든 그 앞에 서면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괜히 주눅 들 만큼 도도하고 당당하며 빼어나게 아름답다.
여기서부터 ANNAPURNA SOUTH, ANNAPURNA 1, ANNAPURNA 3 등 7800m가 넘는 거대한 하얀 봉우리들이 골짜기 양쪽으로 도열하듯 늘어서 있다. 말로만 듣던 안나푸르나 품속에 제대로 안겨 보는 것이다.
가슴이 마구 뛴다. 제멋대로 뛰는 가슴을 맘껏 즐기게 내버려 둔다.
7시에 출발하여 10시쯤 MBC에 도착했는데 웬일인지 가이드 코글이 서둘러 댄다. 부지런히 올라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ABC에서 점심을 먹자고 한다. 서둘러야 편히 쉴 수 있는 숙소를 선점할 수 있다면서.
그동안 정성껏 돌보며 묵묵히 안내해 준 그가 제일 중요한 구간에서 왜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다. MBC에서 몇 시간, 또는 하루를 묵으면서 충분히 고도에 적응한 후 진행하는 것이 원칙일 만큼 제일 힘든 구간인데 고작 10분 휴식 후 코글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