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태와 영자의 ABC-8

하늘은 빙빙 돌고 다리는 풀리고.

by 임경희

MBC를 출발하여 100m쯤 올랐을까? 어지럽고 메스껍고 무기력 해지기 시작한다. 낮게 깔린 마른 풀밭 아무 데나 누워 자고만 싶다. 다리가 풀려서 열 걸음 옮기기 어려울 정도의 고산병이 영자를 괴롭힌다. 스무 걸음을 채 못 걷고 주저앉아 버릴 만큼 힘겹다. 마른풀 더미에 큰 대자로 누웠더니 그 와중에도 아름다운 설산들이 눈 안에 가득 담긴다.

빙빙 도는 하늘 따라 설산들도 같이 돈다. 안나푸르나를 가슴 가득 안은 영자도 함께 돈다. 빙글빙글 돌아 하늘로 오르더니 설산 사이를 제멋대로 유영하고 있다.


5분 쉬고 5분 기어가고, 3분 졸고 3분 휘청이고.

보통 한 시간 반 정도 소요 된다는 길을 다섯 시간 헤맨 후 힘겹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기쁨보다는 졸음이 쏟아진다. 바로 잠들면 좋지 않다고 코글이 식당으로 안내한다. 식당 창가 간이침대에 누웠는데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극심한 오한이다. 숙박비와 같은 가격의 콜라 이외엔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할 만큼 식욕은 전혀 없다. 뼛속까지 춥다는 말을 실감하며 거의 실신한 상태로 누워 있는데 창 밖에서 안나푸르나의 태양이 지고 있다. 병태가 양 쪽 손가락으로 억지로 두 눈을 벌리며 환상적인 일몰을 보라고 암만 외쳐도 눈꺼풀은 무겁고 병태의 외침은 꿈 속인 듯 아득하기만 하다.


병태는 계속 외친다.


"저 일몰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라며? 한 번만 눈떠 봐. 황금빛이 하얀 봉우리를 하나씩 물들이고 있어. 정말 장관이야 밖에 나가서 보면 더 더 멋질 텐데ᆢ"

눈이 떠지지 않는 반 실신 상태에서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맙소사 이건 마치 죽어가는 사람에게 하는 대사 같잖아? 내일 아침에는 멀쩡 할 테니 그만 좀 외쳐요. 그렇게 안타까우면 저 혼자라도 나가보든지ᆢ'


*아아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춥고, 굶주린 밤이 어영부영 밝았다. 자고 나면 멀쩡할 줄 알았는데 메스껍고 어지러운 것은 여전하다. 그러나 어제에 비하면 스프링처럼 통통 튈 것 같긴 하다. 이곳의 상하수도 시설은 오직 주방에만 있어 돈 주고 산 뜨거운 물 한 컵을 식혀 양치질만 대충 하고 해돋이를 보러 나선다. 숙소 뒤 작은 동산이다. 마음과는 달리 어두운 오르막길이 아직도 버겁다. 겨우 올라 스무 명쯤 되는 인파에 섞여 해 뜨길 기다리는데

코글이 박영석대장 묘지에 가서 일출을 보자고 한다. 30m쯤 더 걸으니 그들이 거기 있었다.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이곳에서 산이 되다.-


울컥했다. 엎드려 절하는 병태의 어깨도 가늘게 떨린다. 사진 속의 그들은 밝게 웃고 있다. 그렇게 염원하던 산이 되었으니 영원히 환하게 웃으세요.


바로 그 순간, 안나푸르나 봉우리들이 황금빚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제 일몰도 분명히 황금빛이라 했는데 일출 역시, 주황과 황금 사이, 황금에 더 가까운 오묘한 빛깔로 서서히 물들고 있다. 아주 붉어서 천박해 보이지 않고 격에 맞는 품위를 갖춘 안나푸르나가 하나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박영석대장 앞에서의 울컥한 마음과 뒤엉켜 일출의 감동을 운운하기엔 왠지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역시 식욕이 없으므로 뜨거운 생강차만 마신 후 하산을 서두른다. 빨리 내려가 징그러운 고산 증세를 탈탈 털어버리고 싶다. 내려오는 길은 날 듯 날렵하다. 어제 다섯 시간을 헤매며 올랐던 길을 한 시간 만에 내려온다.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나마스테'도 올라올 때 대꾸하던 목소리의 열 배는 됨직하게 우렁차다. 거의 다 왔으니 힘내라는 인사말도 푸짐하게 건넨다.


등반 사고의 대부분이 하산 길에서 발생하니 주의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 오늘 일정은 거의 내리막 길이라 편하게 내려올 수 있지만 잠깐씩 만나는 오르막 길에선 여전히 몸이 무겁다. 이번 일정 중 MBC에서 ABC까지의 구간을 제일 기대했지만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없다며 바닥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련 없이 구르듯 내려온다.


로지마다 푹 쉬며 왔는데 출발지 보다 1800m나 낮은 오늘의 목적지 뱀부까지 두 시 이전에 도착한다. 이제 고산증도 거의 사라졌으니 마음이 한껏 풀어져 술을 좋아하는 코글과 함께 느긋하게 술자리를 즐겨보기로 한다.